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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개와 같은 인생이라면 (약 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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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게 되는 성도들을 보게 되면 꼭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약속한 것도 아니고 또 가르친 바도 아닌데 왜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하는지 신기합니다. 오랜만에 보게 되면 첫 번째 하는 말은 “목사님 하나도 안 달라 지셨네요.”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는 말은 “그런데 흰머리가 늘어나셨네요.” 왜 이렇게 두 마디는 반드시 똑같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저도 한국 나이로 마흔 아홉이고 내년이면 오십이 되고 보니 이제 흰머리도 제법 점점 늘어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동기 목사님들 중에 대부분이 염색을 많이 하셨는데 저는 그래도 염색을 해야 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행복한 편에 속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흰머리 하나도 없었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흰머리도 쌓여져 가게 되고 우리의 삶의 연령과 더불어 시간도 흘러가고 모든 것이 흘러갑니다.

저는 요즘 시간을 흘러감과 더불어서 많은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장기간의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침묵이 말이 되어야 하는데 너무 생각의 표현을 말로써 많이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기회를 가지게 될 때 미리 이해를 구합니다. 삶의 시간이 너무 신속히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간에 흐름과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침묵 속에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보면서 우리 앞에 시간은 참 빨리 흘러가고 있고 또 우리의 삶도 역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삶의 시간과 모든 여건과 모든 것들이 흘러가게 되면 우리는 어느덧 가야할 곳에 가게 되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 인생에 대하여서 마치 안개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이러저러한 계획을 세워도 때로는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갈 수 있는 안개와 같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안개는 아침에 피어졌다가 해가 뜸과 더불어 우리 눈에 사라져 보이지 않는 이와 같은 잠시적이고 유한적인 개념입니다. 또 때로는 우리는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러 저러하겠다고 말을 하지만 허탄한 자랑을 하고 사는데 그것 자체가 세상의 모든 악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우리는 선을 행할 줄 알면 반드시 선을 행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그것이 죄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기왕에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몇 가지 다시 생각해 보아서 ‘안개와 같은 짧고 유한한 인생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할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보는 것은 안개같이 유한한 삶이라는 것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이 짧고 유한한 삶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우리의 생명을 그 누구도 주장할 수도 없고 보장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정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성도님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일찍 세상을 떠난 분도 있고 더 나이가 많으셔서 세상을 떠난 분도 있지만 아무도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나실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우리 생명의 시간을 연장할 수도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을 봅니다. 또 우리 삶에 대한 기능도 주장할 수도 연장할 수도 기능을 부여할 수도 없음을 봅니다. 우리는 한 순간에 삶의 어떤 기능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또 한순간에 어떤 삶의 부분들을 상실 당하기도 합니다. 저는 참 감사하게도 일 년에 한번정도 건강검진을 하게 됩니다. 벌써 오랜 시간이 되었는데 그때마다 제가 참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맨 마지막에 그 소견란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오래 전에는 그 소견란에 별 특별한 없었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썼는데 매년 거기에다가 몇 자씩 더 적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항이 있으니 ‘관찰하십시오. 유의하십시오. 관리 하십시오.’라는 사항이 점점 느는 것 같습니다. 아마 살아가면서 우리의 모든 신체기관들이 관리를 필요로 하거나 혹은 또 무엇인가 관심을 가지고 주의할 것을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삶의 기능도 점점 달라지고 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모든 능력도 마음도 달라지는 것이 인생의 흘러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즉 우리들에게 있어서 삶의 기회라는 것은 시간뿐 아니라 여러 가지 기능과 능력과 여건상으로도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좀 해 볼만하면 우리의 시간이 흘러서 더 이상 할 수도 없는 기회를 상실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개와 같은 유한한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매우 짧고 제한되어 있고 한시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의 시간들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일을 계획할지라고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삶은 내가 짧아서 이러저러하게 계획을 한다 할지라도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이제까지 우리의 삶의 길을 봅니다. 내가 계획한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신 분이 있으십니까? 저도 역시 목회하면서 마음에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는 것은 내 마음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계획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니 내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에 합일되게 맞추어 가는 것이 우리의 지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내 계획대로 안 되고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요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해주십시오.”라는 것이 마음의 간절한 소원인 것을 봅니다. 더욱이 우리는 가끔가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내게 어떤 일이 생기면 내게 어떤 어려움이 있다면 내게 어떤 상황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쓸데없이 하지 않아도 될 생각을 하는 걱정이 아니라 누구든지 위기를 관리하고 위기 상황을 생각해서 대처하는 이와 같은 법으로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이러 저러한 여러 가지 상황이 일어날 때 내가 교회는 어떻게 대처하고 또 제 자신의 삶은 어떻게 대처하고 라는 이와 같은 것들이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제 자신의 삶 하나가 저의 자신의 삶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 이러한 모든 것들을 생각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까지 나가게 됩니다. 만약에 내 삶에 시간이 매우 짧아진다면 3일, 1달, 1년, 6개월 이와 같이 한시적인 삶이 부여된다면 나는 그 가장 짧은 시간에 무엇을 할까를 생각을 합니다. 여러 가지 사실을 생각하지만 세 마디로 요약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감사한 일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송한 일을 사과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있는 것을 어떻게 나눠주고 또 의미 있게 사용되도록 배치하고 갈까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는 것은 감사함 뿐인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까지도 감사한 분들이지요. 왜냐하면 결국 그와 같은 아픔을 통해서 깨닫게 하셨고 그것을 통해서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짧은 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그 감사를 표현하고 우리의 감사한 마음을 알려 드리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 일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또 사과하는 일입니다. 정말 잘못한 일이 많지요. 마음에 정말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잘못한 것이라든가 혹은 악한 마음은 없었지만 잘한다고 한 것이 상대에게 손해를 끼치고, 상처를 입히고, 아픔을 끼친 것도 상당히 많았던 것을 생각을 합니다. 정말 생각해 보아도 제가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의 잘못과 부정에 대해서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또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있는 주변의 여건을 내가 가지고 있는 기능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힘과 주변의 상황들이라도 결코 나 혼자의 힘으로만 가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를 키워주셨고 선생님들은 가르쳐 주셨고 우리의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도와주었고 때로는 다른 사람이 잘못되어서 우리가 잘된 것도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혼자의 소유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가장 효과 있게 하나님 앞에 사용 될 수 있도록 배치하고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가는가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고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의미를 파악해서 그것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정말 내 인생이 짧고 제한되어 있고 언젠가는 떠날 것이고 또 그 떠날 것이라는 것이 나에게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준비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는 주의 일을 한다고 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 우리가 짧고 제한된 삶의 시간 속에서 허탄한 자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고 악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악한 일이라고까지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세상의 허탄한 자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허탄한 자랑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자랑거리에 우리의 모든 삶을 걸고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무가치한 무의미한 삶입니까? 삶의 평가는 우리들에게 늘 시간과 장소와 여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 국어 시간에는 국어 내용을 가지고 평가를 합니다. 수학시간에는 수학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영어시간에는 영어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시간마다 우리가 그 내용이 다른 것을 가지고 평가를 합니다. 시간마다 우리가 그 내용이 다른 것을 가지고 평가를 받습니다. 30년 전의 평가 받는 것을 가지고 지금의 내 평가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10년 전의 평가 받는 것을 가지고 지금의 내 평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시간에 따라서 우리의 평가 대상은 늘 달라집니다. 나의 평가의 내용은 늘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전에 받은 평가를 지금의 평가로 착각하여 그것을 자랑한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고 평가받지 못할 내용을 가지고 그것을 자랑한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스쳐가는 바람을 자랑한다면 너무나 우스운 일입니다. 평가받지 못할 내용을 가지고 그것을 자랑한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스쳐가는 바람을 자랑한다면 너무나 우스운 일이지요. 평가받지 못할 내 관념의 세계 안에 갇혀 그것을 자랑한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어제도 저는 마음에 상당한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지진이 나서 처음에 보니까 그저 몇 명 몇 십 명이 세상을 떠났다 몇 백 명이 2700명이 3000명이 오늘 아침에 보니까 3500명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정말 나와 내 주변과 이 나라 민족 백성이 그와 같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이와 같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아니라도 내 주변이 아니라도 이 민족 백성이 아니라도 우리가 모두 이 세상에 같이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입장이라면 과연 그 가운데 내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뿐이지 결국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어려움을 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언젠가 알 수 있는 때가 오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생각해 봅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어려움이 닥칠 수 있고 그 어려움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우리가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의미 있다고 얘기해보지만 어느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 의미 없는 허탄한 자랑 때문에 우리의 삶의 시간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확히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사명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것을 이루고 감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 마음의 계획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내 계획이 포함되어질 때 그 계획이 의미가 있습니다. 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니 하나님의 계획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하나님의 계획에 본질을 이루어 드리는 실천력과 그리고 우리의 삶에 의지가 필요한 것을 봅니다. 요한 웨슬레는 항상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모든 어리석은 요청들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당신의 발 앞에 경배하며 당신의 뜻이 항상 최선임을 고백합니다. 기도하고 나서 그때 또 깨닫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렇게 기도하지만 나의 생각은 어리석도 결국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가장 지혜롭고 옳다는 것입니다.” 저도 요즘 기도할 때마다 후렴구처럼 구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여 간구하오니 제 생각은 짧아 이렇게 밖에 구하지 못합니다. 어리석음을 긍휼이 여기시고 주의 밝은 빛과 은혜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제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어리석음을 밝히셔서 제 기도의 소원이 주의 뜻과 합일되게 하옵소서.” 우리들은 날마다 기도하고도 내 기도의 제목이 얼마나 어리석었나를 알게 됩니다. 기도하고서도 정말 그렇게 되기를 생각하느냐고 그렇게 자문할 때 자신이 없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인생의 한계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와 같은 어리석은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믿기에 우리는 기도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짧고 제한된 시간 내에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행하고 어리석은 자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시간에 꼭 해야 될 일이 있어요. 그 시간에 해야 될 그 일을 안 한다는 것은 다른 일로 그 시간에 해야 될 일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그 부분이 완전히 빠져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가장 어려운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지혜롭지 못해서 어차피 모든 일을 다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시간이 모자라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되겠지요. 평상시 우리 삶을 정리정돈하고 일을 체계화시켜 줄이고 해야될 일을 반드시 먼저 해두며 항상 쫓기는 자세가 아니라 길목을 지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지만 우리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 세 번째를 보니,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안개와 같은 유한한 삶을 사는 자세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라고 합니다.
“기회있는 대로 선을 행합시다.”
“기회를 만들어서 선을 행합시다.”
“사명을 느끼며 선을 행합시다.”
처음에 우리는 기회가 있는 대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내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선을 행해야 합니다. ‘너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고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두가지 계명은 하나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우리의 이웃을 사랑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와 섭리의 도구가 되어서 주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기회있는 대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 내 능력과 실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의 선을 이루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기회를 피해가고 우리의 삶 가운데 무엇인가 비껴가고 싶은 때가 있지 않습니까. 생각이 남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을 비껴가고 싶고, 하지 않아도 되는데 괜한 생각하는 게 아닌가 피해가고 싶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기회를 만들어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는 없는 기회도 만들어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한없는 희열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 삶의 힘의 원천입니다. 선을 행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하면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힘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의무가 아니라 기쁨, 권리, 능력, 우리 힘의 원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회를 만들어서 선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느낌으로 선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먼저 느끼는 자가 사명자입니다. 자꾸 잊혀지지 않고, 생각이 나고, 눈에 아른 거리고 밤에 잘 때도 생각이 나고 결국 그것을 해야 마음이 기쁘다면 그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명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봤는데 잊어버려지지 않습니다. 그냥 봤는데 마음속에서 떠나지지 않고 그것 때문에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편하다고 한다면 그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사명을 받게 되는 순간, 우리는 사명 때문에 살게 되고 그것으로 마음에 기쁨을 얻고 은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될 때 기회있는 대로 선을 행하고 기회 만들어서 선을 행하고 우리의 사명이 선이 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드리려 시간을 비축해 두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기도해주셔서 제가 열흘간 잘 쉬고 왔습니다. 제가 쉬는 열흘동안 네팔이라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네팔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산이 많은 곳이어서 그 산들을 다녀오기 위해 갔었습니다. 일정은 히말라야 트래킹으로 이름을 지었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만년설이 쌓인 히말라야를 다녀온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저는 빙벽을 오르는 실력이 안됩니다. 제가 간 곳은 그 눈 덮인 산을 볼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서 눈 덮인 산을 보는 곳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저는 눈 덮인 산을 밟아보지도 못했습니다. 눈 덮인 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 가는 것인데, 수천미터를 올라가는 것입니다. 네팔에는 6천미터 이하의 산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높은 산들이 많아서입니다. 저는 그저 많이 걸었습니다. 지금도 발가락이 얼얼합니다. 많이 걷다보면 많이 생각하게 되고 또 많은 일들을 결정하게 되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니 많은 유익이 있었습니다. 또 산을 본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큰 기쁨입니다. 정말 큰 산은 자기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필요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산을 보기 위해서 그 산에 오고, 어떤 사람들을 막론하고 산은 그 사람들을 다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 가장 겸손한 사람들이 산에 안길 수 있게 되겠죠. 산을 보고 마음에 감동을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저도 역시 산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을 보고 왔습니다.

열흘의 일정을 가지고 출발을 했습니다. 그 곳에서 큰 가방을 주었습니다. 열흘간의 일정이니 이러저러한 짐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가방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산에 가면 포터라는 짐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늘 산을 다니는 사람들이니 동행해서 짐을 날라다 주는 것입니다. 보통 에베레스트산에 오를 때 6명 정도가 가면 40명 정도의 짐 날라다 주는 사람들이 동행을 한다고 합니다. 에베레스트산에 가면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데, 저희는 열흘 정도였으니 그렇게 많은 짐은 아니었습니다. 가방 하나에 대략 25Kg에서 30Kg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한 사람이 지고 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비행기타고 내려서 국내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산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거기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제 가방을 한 사람이 지고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저희 가방 두개를 묶고 또 거기에 자신의 짐을 얹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무게는 적어도 60Kg 정도였습니다. 60Kg면 우리나라고 쌀 한가마니 정도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자신의 몸무게 두 배까지 진다고 합니다. 60Kg의 사람이면 120Kg까지의 짐을 지고 그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받는 돈은 3500원입니다. 에베레스트산처럼 목숨을 걸고 가는 곳은 두 배, 7000원 정도를 받습니다. 저희가 간 곳은 목숨 걸고 가는 산이 아니라 3500원씩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람들이 짐은 지는 순간, 전 모든 것이 싫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돈을 내었기 때문에 편하게 배낭하나 메고 그 분들은 돈을 받았기 때문에 60Kg 이상 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한다는 사실이 제 삶의 구조에서는 용납이 안되었습니다. 제가 그들이 가방을 지고 간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짐 두개를 지고 자신의 짐까지 얹어 간다고는 미처 예상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열흘을 지내야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내 마음에 감당하며 갈까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들의 나이는 보통 18살에서 21살, 나이가 많으면 25살 정도였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물론 아들은 없지만 제 아들뻘 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제가 좋아하는 우리 청년들 수준의 아이들인데, 물론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짐을 잘 지긴 했습니다만 역시 허리는 펴지 못했습니다. 쌀 한 가마니 되는 무게를 얹었는데 어떻게 허리를 펴겠습니까. 허리를 굽히고 짐을 지고 머리를 숙이고 그곳을 올라가는 것입니다. 저희들 보다 항상 먼저 출발합니다. 왜냐하면 늘 아침에 출발하면 밤에 컴컴할 때 도착을 하니, 저희가 도착하기 전 10분 정도 먼저 도착해야 저희가 도착해서 그 짐을 쓸 수 있어서입니다. 늘 가다보면 아이들을 만납니다. 저희가 쉬면 아이들은 출발하고, 저희가 출발해서 가다보면 또 쉬는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은 또 출발하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허리는 못 폈습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어려운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짐을 지고 나중에는 나이들어 늙은 사람들도 짐을 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그 짐을 질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형벌이라면 돈을 얼마 받기 전에, 어떻게 질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신화에 나오는 시지푸스를 생각하지만, 이것은 자원해서 하루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그 짐을 지고 살아야 합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영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이틀 지나면서 아이들과 교제도 나누고 이야기도 하고 친해지며, 돈을 줬으니 당연하다 생각들지 않고 정말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가운데도 아이들은 웃고 떠들고 재미있어하고 또 저녁에 되면 밥을 먹고 친하게 얘기하고 무엇인가 잘 섬겨주는 것을 볼 때 정말 마음속에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안아주고 하면서 정말 아들과 같은 그 아이들을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 아이들을 가련하게 보는 것이 내 삶에 있어서 좋은 일은 아니다 생각되었습니다. 첫날부터 억지로 생각한 것은 내가 이곳에 왔기 때문에 그들은 짐을 나르며 돈을 벌고 좋아진다라고 억지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그 아이들은 짐 질 일도 없고 그 아이들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 더 나쁘게 되었다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마음을 위로하고 갔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친해지니 마음이 점점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가면서 첫날부터 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등산화를 신고 가는데 아이들은 좀 괜찮은 아이들은 운동화를 신고 거의 대부분이 맨발에 고무 슬리퍼를 신고 갔습니다. 늘 다니는 길이니 그렇게 갈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도 역시 돌부리에 발이 채일 것입니다. 그리고 습길에는 거머리가 많습니다. 등산화를 신고도 거머리에 물려 난리치고 하는데, 그 아이들은 안물리겠습니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갑니다. 비도 한번씩 와서 미끄러지고 하는데, 영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했습니다. ‘이 일정이 끝나는 날에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운동화를 한 켤레씩 사주어야 되겠다.’ 마지막 날에 은혜도 나누고 잠시 하나님 말씀도 전하고, 끝나는 날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로 왔습니다. 운동화가게에서 운동화를 한 켤레씩 사주었습니다. 저는 원래 짐을 지고 가는 아이들 십여명에게 사주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같이 왔는데 머뭇거리며 안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10명 정도 사주려고 했는데 결국은 17명에게 사주었습니다. 운동화가 퓨마, 나이키, 아디다스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하루에 3500원씩 받는데 그 운동화는 25000원 정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어떻게 그 운동화를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제일 마음에 드는 것으로 좋은 것으로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한참이 걸려 17명이 다 골랐습니다. 차례대로 와서 구입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한편으론 걱정이 생겼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맨발로 산에 오르는 것이 안타까워 사준 것인데, 저 아이들은 아무래도 산에 오를 때 안신을 것 같습니다. 어디 가는 날에나 신을 것 같고 산에 오를 때는 그냥 슬리퍼를 계속 신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두 켤레를 사줄 수는 없고 그랬습니다. 아이들이 눈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이들이 눈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제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눈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사명이고 마음에 떠나지 않는 것이 사명입니다. 첫날부터 슬리퍼 신고 가는 아이들이 마음에서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간단히 운동화 한 켤레 사주고 끝난 것이지만 그 운동화 한 켤레 사주고 끝난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마음에 남아 있다면 결국 다른 일들이 이루어지리라 생각됩니다. 또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에서 네팔에 있는 포터들을 위해서 특별한 사역이 진행되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 잊혀지지 않고 마음에 새겨지고 잘 때도 눈에 보이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사명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우리가 살아갈 때 정말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잠시 보았는데 스쳐지나가 잊어버려지는 일이 있고, 스쳐지나갔는데 그것이 잊어버려지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내 마음 속에 새겨져서 늘 그 일을 함으로 편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어떤 사명이 생기면, 그 사명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선이라면 그리고 우리 이웃과 나누는 선이라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일이고 그 선을 행치 않는 것이 우리에게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선을 행함이 우리의 사명이고 기쁨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꿔보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이 안개와 같은 인생이라면, 제한되고 짧고 매우 유한한 인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한스러운 생각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주 길다면 우리는 그 긴 경주를 어떻게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짧다고 하니 한번 최선을 다해서 어떻게 잘해볼 수 있지 않은가, 어떻게 멋지게 한 번 경주를 해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인생은 제한되었기 때문에, 유한하기 때문에, 짧기 때문에 한 번 멋진 경주를 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이 짧아서 한탄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짧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 기회가 있고 힘이 있고 우리에게 그 일을 이룰 능력이 있다 생각하여 우리는 최고의 아름다운 삶의 작품을 이루기 위해서 애쓸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언제 아웅 다웅하며 살겠습니까. 언제까지 망설이다 우리 삶을 끝내겠습니까. 우리는 선을 베풀고 가기에도 시간이 없는데 언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미움과 아픔과 고통을 끼치겠습니까. 사랑을 하다 가기에도 시간이 없습니다. 요즘은 무엇을 이루려고 살다 갈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체가 삶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 준비하며 살지만, 내일을 준비할 뿐 아니라 현재 삶 자체도 매우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내일도 우리 삶의 소중함이고, 내일을 위한 오늘, 현재도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삶의 의미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오늘 이 순간도 그리고 내일도 사명 속에 주의 선을 행하다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고 그것이 우리의 자랑과 하나님 앞에 서는 기쁨과 은혜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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