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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벧엘: 하나님의 전 (창 28:16-22, 행 2: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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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의 배경은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속여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은 후 이 사실이 탄로가 나자 고향인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도주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삭은 야곱을 멀리 보내면서 아버지로서 그의 장래를 염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화란 땅 밧단아람이라는 곳에는 이삭의 장인인 브두엘과 그의 아들 라반이 살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외삼촌이 되는 라반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의 여정을 계속하던 중 어느덧 해가 지게 되자 그곳에 유숙하려고 돌 한 개를 가지고 베개로 삼고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꿈에 사닥다리가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로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타나 그 위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창 28장 13-14절).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리고 네 자손이 온 땅에 펴져 세상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난 야곱은 그가 베고 잤던 그 돌로 기둥으로 세우고 그곳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 그곳을 벧엘이라 불렀습니다. 벧엘(bethel)의 뜻은 Beth(집), el(하나님) 즉 “하나님의 집”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벧엘은 “하늘의 문” 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문은 모든 인류를 위한 축복과 구원의 통로가 됩니다. 이렇게 야곱의 돌베개로부터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인 하나님의 전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에 퍼져서 세계 인류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벧엘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하는 처소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습니다. 벧엘 이후에 예배처소로 나타난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을 탈출하여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만든 예배처소입니다. 출애급기 26장에 보면 성막의 구조와 기능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막은 다른 말로 회막(출 27: 21), 증거막(민1: 50), 법막(대하 24:6)의 이름으로도 불러지고 있습니다. 성막은 지성소(the holiest place)와 성소(the holy place)와 뜰(the garden)의 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지성소에 법궤가 있는데 법궤 안에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내려 주신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율법을 상징하는 아론의 지팡이와, 그리고 십계명을 새긴 언약의 비석이 넣어져 있습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차례 들어가는 곳입니다.

  성막에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성소가 있는데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휘장으로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일곱 금등대와 금촛대, 제물을 올려놓는 분향단과, 떡을 놓은 진설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막에는 뜰이 있었습니다. 뜰은 지성소와 성소를 감싸며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미국의 펜실베니아에 있는 조그마한 도시인 랑카스타에 옛 성막의 모형이 보존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관람하고 있습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독립국가로서 왕국을 세우고 성전을 건축할 때까지 약 487년(B.C. 1445-B. C. 959) 동안 제사와 예배처소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있었을 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를 소원하여 모든 준비를 다해 왔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이유는 무수한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역대상 28장 3절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피 묻은 손으로 거룩한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을 유업을 물려주었습니다. 솔로몬은 최초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시작하여 B. C. 959년에 완공 했습니다 (왕상 6:1-38). 솔로몬의 성전은 B.C. 586년에 바빌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약 38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후 예루살렘에 두 개의 성전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B. C. 516년에는 스룹바벨 성전(스 6:15이하)세워졌다가 다시 파괴되었고, 그 후 헤롯왕이 B. C. 20년에 성전을 세웠다가 A. D. 70년에 로마에 의해 함락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세 차례의 성전이 건축되었던 역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후에 나타난 것이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 의해 중동각지로 포로로 잡혀 갔거나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되어 흩어져 있었던 곳마다 세워졌습니다. 회당은 유대인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세계도처에 세워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후손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성전뿐만 아니라, 회당에서 가르치셨던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의 처소인 하나님 전의 발전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이 쌓은 제단과, 성막과, 성전과, 회당을 살펴볼 때, 그 공통점은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를 드리며 유대민족의 정체성과 고유한 히브리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온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전의 역할과 기능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었던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화해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과 유대민족과의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전이 하나님과 온 인류, 세상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로 확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로 다시 창조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과 그 히브리문화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와 온 인류의 생명과 구원을 위해 2천년의 긴 역사 속에서 존재해 왔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과 교육의 지평을 이스라엘에서 전 세계로, 그리고 유대인에서 인류의 구원으로 확대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그의 교육과 사역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세워진 현대판 벧엘, 곧 새로운 하나님의 전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의 본문 사도행전 2장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전인 교회의 특징과 사역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사람을 섬기는 봉사(diakonia)입니다. 2장 44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이와 같이 처음 교회가 생겼을 때 믿는 사람들이 실천하였던 봉사는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자신의 소유와 물건을 서로 나누어 주며 통용하게 된 몇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백 이십 문도가 함께 체험했던 성령의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의 체험으로 변화된 그들은 예수님께서 실천하셨던 그대로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며 섬기는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되었던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녀들과 문둥병자들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

  예수님의 섬김의 생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의 사건으로도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곧 오병이어(五餠二漁)의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13절 이하에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광야에 모인 오천 명에게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 남자 성인들만 오천 명이니까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포함한다면 만 명 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누구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나눔과 섬김이 전통적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식탁(common table)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공동식탁은 다일공동체의 “밥퍼나눔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밥퍼나눔운동은 1988년에 전농동 굴다리 옆, 동대문 청과시장 뒤편에서 청량리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시작했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이 하루 한 끼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행려병자, 알콜 중독자,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가난한 노숙자들과 노약자들에게 양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미 3백만 번째의 밥그릇이 제공되었습니다. 다일공동체의 20명의 자원봉사자들은 매일 아침 7시30분부터 식사준비를 시작해 11시부터 4시까지 천명분의 식사를 지어 배식을 합니다. 오후 5시부터는 다음 날의 장보기를 시작하여 쌀 140kg, 한 가마 반 분량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배 고품과 상처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첫술을 뜰 때 보여주는 간절하고 아름다운 표정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몽클하게 합니다.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절박한 일인가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 계시는 6.25세대들은 그 전쟁 중에 배고픔과 굶주림이 얼마나 참담한 일이었던가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남을 섬기며 봉사하는 일은 마음의 감동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감동을 받을 때 참다운 섬김과 봉사가 실천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볼 때마다 먼저 마음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볼 때마다,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민망히 여기시다”는 곧 그들에 대해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신 뜻입니다. “But when he saw the multitudes,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on them" 감동의 원천은 인간의 가슴, 혹은 심장에 달려있습니다. 심장은 인간의 육체적, 지성적, 정서적, 영적인 에너지의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에너지의 근원을 통합하여 감동을 일으키게 합니다. 인간의 심장이 고갈된 에너지를 새롭게 하여 몸 전체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과 같이, 감동은 사람들의 닫혀진 마음을 열고 녹여주는 최적의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것에서 참된 섬김과 봉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 감동이 없는 생활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동하는 생활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감동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의 손길을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인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가난과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위해 실천해야 할 섬김과 봉사의 제목을 찾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 교회의 생명력은 성도들의 친교(koinonia)입니다. 하나님의 전인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친교로 보존될 수 있습니다. 2장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말씀과 같이 성도들의 교제인 친교가 교회의 생명이 됩니다. 성도의 친교는 교회의 제도나 형태가 아니라, 신령한 영적교제이며, 공동적 참여이며, 함께하는 공동체적 삶을 의미합니다. 친교는 ”성도의 교제“(communion of saints), 거룩한 백성들의 사귐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친교가 잘 이루어져야 교회 밖에 있는 가난한 이웃을 섬기며 봉사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친교가 잘 이루어져야 이웃의 고난과 고통에 동참하며, 복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힘과 에너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교회는 사람의 몸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지체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가는 유기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몸의 다양한 지체가 서로 갈등하지 않고 주어진 역할과 기능을 잘 감당할 때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친교를 통하여 각각의 직분을 잘 감당할 때 참된 교회로서 성장하며 부흥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려면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의 영적 친교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2005년 인구센서스(인구조사)에 의하면 지난 10년간 가톨릭 인구가 219만 5천만 명이나 증가한 반면에 개신교는 14만 4천명의 증가에 불과했습니다. 이 숫자는 불교의 40만 5천 명의 증가보다 훨씬 낮은 숫자입니다. 가톨릭 신자가 이렇게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 것은 가톨릭 교인들이 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며, 있는 것을 나누어 주며, 이웃을 섬기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장례와 같은 관혼상제의 의식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청년들이 이웃과 사회를 위한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회를 비롯한 성은의 성도들이 깨어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한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한국사회는 교회에 귀를 기울었습니다. 교회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고 가난과 무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땅에 개화와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선교 120년이 지난 지금 사회와 사람들은 교회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외면하고 있습니다. 교회로서의 사회의 지도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초대교회와 같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서로 나누는 새로운 봉사와 섬김의 회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복음의 진정한 누룩이 되어 빛과 소금의 소명을 희생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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