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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을 바꾼 선택 (룻 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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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민담에 ‘동가식서가숙’이란 말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동쪽 집에서 식사를 하고 서쪽 집에서 잠을 잔다는 뜻입니다. 과년한 딸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딸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버지는 늘 고민이 되었습니다. 빨리 저 딸이 출가해야 마음이 편할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어느 날 두 군데서 동시에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두 집을 열심히 비교했습니다. 그런데 두 집 다 장단점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서쪽 집의 신랑은 힘은 장사같이 좋고 건강한데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또한 동쪽 집의 신랑은 돈은 많은데 신랑이 늘 골골해서 병치레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 해답이 없었던 아버지는 고민 끝에 딸을 불러 물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너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니?”하고 말입니다. 딸은 생글생글 웃더니 “잠은 건강한 신랑이 있는 서쪽 집에 가서 자고요, 먹는 것은 부잣집인 동쪽 집에 가서 먹으면 되잖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선택은 늘 그럴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 쪽을 선택하면 한 쪽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방 선거를 앞두고 많은 후보들이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구청장 나오는 분도 있고, 시장에 출마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찍으면 한 사람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선택의 갈등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은 늘 선택하는 인생입니다. 배우자를 선택하고, 학교를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합니다. 심지어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도 어떤 것을 살 것인지를 늘 고민하게 됩니다. 남성들은 아침에 출근할 때 마다 어떤 넥타이를 맬까 늘 선택의 고민앞에 놓이게 됩니다. 여성들은 시장을 다녀 와도 이 물건은 참 잘 샀다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급히 사가지고 왔더니 불량품을 사갖고 왔다고 불평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선택은 우리 삶에 늘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선택해야 할 중대한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믿을 종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굴 믿고 누굴 의지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평생을 살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면 일생이 행복할 수 있지만 잘못 선택하면 불행과 슬픔가운데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선택은 직업과 직장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직장을 잘못 선택해서 늘 후회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제 형님 가운데도 그런 분이 계십니다. 예전에 가정이 넉넉지 못하기도 하고, 주변의 권유도 있어서 사범대학에 가서 선생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적성이 안 맞는 것이었습니다. 난 공대를 갔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이 있으셨고 지금은 결국 그만 두시고 다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평생을 산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어떤 분도 그러셨답니다. 지금은 직장을  바꾸셨지만 예전에는 출근할 때 “얘들아, 아빠 오늘 죽으러 간다.” 그랬답니다.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출근은 하지만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싫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직업을 선택하는 것 참 중요합니다. 이렇듯 세 가지 선택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남편도 떠나고, 아내도 떠나고, 직장도 바뀝니다. 그러나 한 가지 선택만은 영원히 유효한 것입니다. 내가 어떤 분을 의지할 것이냐... 내 믿음의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선택은 이렇듯 중요합니다.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내 마지막 세계를 어디에서 보낼 것이냐, 지옥에서 보낼 것이냐, 천국에서 보낼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종종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결과는 영원한 것입니다.

  제가 가끔 드리는 이야기입니다만,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한 분이 등록하셨습니다. 면담을 하면서 “할머니, 어떻게 이렇게 늦게 교회에 나오시게 됐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분 하시는 말씀이, 나이가 들면서 마음도 허전하고 뭔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해서 어떤 종교를 택해야 되나 고민했는데 옆에선 어릴 때 다니던 절에 가라고 하고, 어떤 이웃은 남묘호렌케교로 오라고 하구, 이웃집 사는 집사님은 그래도 교회에 와야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 하더랍니다. 할머니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마침 며느리가 왔길래, “얘야, 내가 종교를 선택해야겠는데 어떤 종교를 선택해야겠니?”하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며느리 왈, “어머니, 이왕 택할 바에는 메이커 있는 종교를 택하세요.” 그러더랍니다. “그럼 메이커 있는 종교가 뭐냐?” “기독교지요.” “알았다. 그럼!” 그래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로 나왔다는 얘기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의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건 비록 잘못 선택해도 돌이킬 수 있지만 종교의 선택은 한번 선택하는 것이 영원을 결정합니다. 성경에는 그릇된 선택의 결과로 고통 받거나 파멸의 길을 걸어갔던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룻기서에 소개된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최악의 선택을 했 그것으로 온 가족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룻기서 1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아멘.
  사사들이 지배하던 때입니다. 마침 그 유대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그 때 한 가정의 가장이 가족을 이끌고 모압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모압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리로 내려가게 되었으나 그 선택은 분명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 유대 땅에서 우상의 땅이요, 불신의 땅이요, 죄악의 땅인 모압으로 내려간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 가정은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룻기서 1장 3절에 보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나오미는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남편을 왜 그렇게 빨리 불러가셨는지 몰랐습니다. 몇 년이 더 지났습니다. 1장 5절에 보니,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라고 했습니다. 두 아들마저 하나님이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때서야 이 나오미가 깨닫게 됩니다. 그릇된 선택의 결과는 너무나 비통한 결과를 이 가정에 안겨 주고 말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에게도 이러한 선택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너는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마침 그 때 가나안 땅에 기근이 왔습니다. 애굽 땅에는 물이 풍부하단 소리를 듣고 짐을 싸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이 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애굽에 내려갔다가 아내 사라를 잃을 뻔한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덜 깨달았습니다. 창세기 16장에 보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녀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조급한 마음에 아내와 의논해서 자기 여종인 하갈과 동침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육신의 아들 이스마엘로 인해서 영의 자식 이삭이 태어났을 때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사래와 하갈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것이 역사를 거슬러 내려가면 나중에는 중동지역 문제의 불씨가 되는 원인까지 됩니다.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의 가정은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그 외에도 많은 그릇된 선택이 있습니다. 사울왕은 불순종함으로 마지막 자녀들과 그가 비참하게 죽는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던 다윗도 밧세바란 여인을 취함으로써 국가적인 재난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미국 부시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을 헤매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 대통령도 비슷합니다만, 부시가 한때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닥을 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무모한 이라크 전쟁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정의의 전쟁이라고, 영적 전쟁이라고 말하며 일으켰는데 지나고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죄 없이 희생당하고, 미군들이 죽고, 이라크인들이 죽고, 어린 아이들이 고아가 되고 수많은 물자가 낭비된 무모한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미군들이 이라크 포로들을 학대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에 방영될 때 마다 부시의 인기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땅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육신을 위해서,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과 내 욕망을 위해서 여러분의 인생을 투자하시겠습니까? 영원한 세상을 위해서 여러분의 자원을 투자하시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7절 이하에 보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눈 앞의 이익을 위해서 여러분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삶을 위해서 여러분의 인생을 투자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릇된 선택으로 파멸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나오미의 가정은 어떻게 됩니까? 이 가정에 하나님이 다시금 은혜를 주셔서 회복의 과정을 밟게 하셨습니다. 파탄 난 이 가정이 어떻게 다시 희망으로, 기쁨으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혜로운 선택과 올바른 선택을 통해서 한 단계, 한 단계 회복되어 갔습니다.
  나오미는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요? 성경 6절, 7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아멘. 

  나오미는 자기 고국인 유대 베들레헴에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나오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사실 우리가 성공하고 잘되면 고향에 돌아가는 게 즐겁지만, 이렇게 두 아들과 남편 잃고 과부가 되어 거지꼴이 되어 돌아간다는 것은 내키는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는 하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고통가운데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성경에서 회개라고 말합니다. 방향을 바꾸어서 다시 돌아오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결단이고, 선택입니다.

  나오미의 고통은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 사람들이 나오미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아니 나오미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때 나오미가 대답하기를 “이제는 내 이름을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기쁨 즐거움’이란 뜻이요, ‘마라’는 ‘고통’이란 뜻입니다. 나는 고통스런 여인이요, 실패한 여인이요, 괴로운 인생이란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전능자가 심히 나를 괴롭게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고 어찌 나를 나오미라고 칭하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셨어요. 하나님이 내게 재난을 내리셨어요. 그것이 뭡니까? 그가 고난 가운데에 깨달은 것입니다. 돌이키고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선택은 바로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평신도 신학자인 C.S 루이스는 '고난이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건강하고 잘 될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향해서 귀를 밝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오미의 가정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아름다운 며느리 룻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두 며느리를 포함해 세 명의 과부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어찌 부끄럽지 않았겠습니까? 나오미가 돌아오다 깨달은 것이 있어서 두 며느리에게 “얘들아, 마침 자식도 없으니 너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모압 땅에서 좋은 신랑감 만나서 다시 새 출발 하거라.” 하고 권했습니다. 참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며느리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그들에게 다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데 어찌 우리만 행복을 찾아갈 수 있겠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강경하게 권고하니,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예, 순종해서 제가 모압땅으로 돌아가겠습니다.”하고 돌아갑니다. 둘째 며느리 룻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16절, 17절에 보면,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룻을 보십시오. 룻의 고백이 참 아름답습니다. 오르바는 떠났지만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룻의 아름다운 선택이 바로 이 가문의 축복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유대 베들레헴에 돌아갔습니다. 룻은 보아스란 유력한 친족을 만나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유명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린 빛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방 여인인 룻이 그리고 그 후에 그는 다윗의 할머니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룻의 선택이 지혜로운 선택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문을 일으킨 룻의 선택은 어떤 선택이었습니까?

  첫째로, 그는 가정을 선택했습니다.

  만약 룻마저 시어머니를 떠난다면 가정은 완전히 해체됩니다. 가정이란 적어도 두 사람, 세 사람이 모여야 가정이지 한 사람만 있으면 가정이 아닙니다. 만약 룻이 나오미를 떠나면 가정은 뿔뿔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룻은 마지막까지 가정을 지켰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제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하나님이 제게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라는 이 고백이 우리 영신교회 며느리들의 고백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우리 한국사회의 어려운 문제가 많은 가정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리 많은 가정이 해체되고 있느냐면 불황의 골이 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나눠 살자, 각자 알아서 살자 해서 이혼해버리고 흩어져 버린다고 합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라면을 끓여 먹어도 한 솥에 물 끓이고 가스불로 한 번에 끓여 먹는 게 돈이 덜 들지, 둘이 따로 끓여 먹으면 돈이 더 들지 않겠습니까? 어려울수록 가정은 하나 되어야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려울수록 가정은 뭉쳐야 합니다.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사업 때문에 가정이 어렵다구요? 그러면 사업을 그만두십시오. 사업이 망해도 좋습니다. 가정을 살리셔야 합니다. 사업은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가정은 다시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업보다 우선이 바로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직장보다 우선이 바로 가정입니다.

  두 번째로, 룻의 선택이 왜 지혜로운 선택입니까?

  룻은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우리 시어머니를 떠나면 홀로 외롭게 과부로 살아가실텐데, 나라도 옆에 있어 드리면 어머니가 위로받으시겠지, 내가 어머니를 사랑으로 돌봐드려야지, 내가 어머니께 효도를 다해야지.’ 하는 마음이 룻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지혜로운 선택은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움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갈등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미움 대신 용서와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갈등 대신 화목과 행복을 선택하십시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이것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선택입니다. 가정을 선택한 사람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등져버린 사람은 다 후회합니다. 돈은 벌었지만 가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직업은 안정되었지만 행복이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랑의 선택은 늘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룻은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믿음을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넓은 길도 있고 좁은 길도 있습니다. 넓은 길은 고속도로처럼 평탄하고 그 길은 많은 사람이 가지만 그 길의 마지막은 멸망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좁은 길은 협착해서 가시밭길이지만 그 길은 생명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두 길 중 어느 길을 택하고 있습니까? 넓은 길입니까? 좋은 길입니까?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교회에 오면 믿음의 사람이지만 넓은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한 여객선이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거친 태풍을 만나서 힘든 항해를 하다가 결국 배가 난파되고 말았습니다. 그 난파된 배 조각을 붙들고 구사일생으로 사람들이 살았는데 바람에 밀려 어느 무인도에 밀려 가 닿았습니다. 무인도에 상륙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먹을 양식이 있나 봤더니 마침 거기에 떠내려 온 볍씨가 있었답니다. 몇 달 동안은 연명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 가지고 얼마 못 먹으니 땅을 파서 농사를 지어서 수확을 하자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지나가는 배가 우리를 보고 와서 구출해 주지 않겠냐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이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파는데 땅속에서 황금덩어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좋은지 농사고 뭐고 다 팽개치고 열심히 황금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양식이 바닥났습니다. 황금은 쌓였지만 양식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굶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일 년 후 지나가던 배가 그 무인도에 닿아보니 사람들이 황금을 쌓아놓고 사람들은 굶어 죽어 시체만 뒹굴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현실의 이익을 위해서 살겠습니까? 눈앞의 쾌락을 위해서 살겠습니까? 내일이 없습니다. 오늘로 끝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준비합니다. 더 나아가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지혜로운 선택은 인생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마지막 한 번,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나사로란 사람은 가난하게 살았고 병자로 살았습니다. 불행하게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좋은 선택을 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영생을 하나님과 함께 보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호세아서 6장 1절에 보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위대한 선택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구주로 모셔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여러분의 인생, 영원을 준비하는 축복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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