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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2 12:38

깨어있으라! (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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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특별한 배려로 터키와 그리스의 기독교 유적지를 잘 돌아보고 왔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모두 살펴보았고 특히 핍박을 피해 살던 지하도시 갑바도기니아에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다섯 번째 편지를 읽었습니다. 첫 부분은 오늘 다루고 나머지 부분은 이번 주 금요특별기도회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다섯 번째 편지는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사데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화려한 역사를 가진 도시입니다. 소위 로마로 가는 다섯 개의 도로가 집중된 도시입니다. 이런 지리적인 요건이 사데를 세계에서 가장 큰 상업도시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사데를 통과하는 주요 도로들은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 당기듯이 그 부근의 부를 끌어 모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데는 아주 잘 사는 도시, 어쩌면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울산과 같은 도시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잘 살기 때문에 사치와 쾌락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치와 쾌락의 도시 사데의 분위기가 교회의 생명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풍조에 동화된 사데 교회는 실상은 살았으나 죽은 교회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교회 중 가장 신랄한 책망을 들은 교회입니다. 거기는 유대인의 미움이나 공적인 박해나 이단적인 교훈도 언급되지 않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말하자면 안팎으로 특별한 위협은 없었으나 심각한 영적인 무감동이 지배한 교회가 사데 교회입니다.

이 사데 교회를 찾아오신 주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분”으로 사데 교회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님은 자기를 소개할 때 그 교회와 관련을 가지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는 언제나 해당 교회의 형편에 부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는 표현은 1장 4절에서처럼 충만한 성령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충만한 성령께서는 어떤 일을 하십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성령의 사역하면 두 가지를 특징적인 사역으로 떠올렸습니다. 첫째는 예언의 사역이고 둘째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성령의 사역이라고 보았습니다.

둘 다 여기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방금 말했듯이 사데 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엄중한 경고를 받은 교회입니다. 살았으나 죽은 교회는 예언적인 경고에 특별한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았다는 평판은 가졌으나 실제로 죽은 교회는 성령의 다시 살리시는 사역으로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영적 죽음에 직면한 사데 교회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일곱 영을 가지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손에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의 사자를 붙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교회 지도자들과 당신의 성도 하나 하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놀라운 사실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그 실상은 죽어있는 교회마저 주님께서는 돌보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형편없는 교회조차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사데 교회를 향해 간절히 경고하시고 권면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해 오십니다. 에베소에서 보낸 편지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다가오고 있습니다.

동일한 말씀이지만 에베소 교회에서는 인정하시는 말씀이라고 하면 여기 사데 교회에서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는 말씀을 받는 교회의 상태에 따라서 칭찬과 위로가 될 수도 있고 책망과 경고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이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심으로 힘들여 신앙의 싸움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위로가 되어 주십니다. 동시에 적당히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서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이 경고의, 책망의 말씀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분입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아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든 하시지 않든 주님은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주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행위를 안다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에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그 말씀이 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책망과 경고처럼 들리고 있습니까?

같은 말씀을 어떤 느낌을 가지고 듣는지에 따라서 여러분의 영적 실상이 진단될 것입니다. 주일마다 선포되는 강단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책망처럼 들립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폭로합니다.

왜 같은 말씀이 어떤 사람의 귀에는 책망처럼 들립니까?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행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책망과 경고로 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무한한 위로의, 격려의 말씀이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을 진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아신다고 하는 사데 교회의 행위는 어떠합니까? 조용히 죽어가는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활기 띤 모습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그렇고 스스로 생각해도 굉장해 보입니다.

소아시아 다른 교회들은 어쩌면 사데 교회의 그 활력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릅니다. 풍요로운 도시의 활기찬 교회의 외적인 모습은 지역교회들의 선망의 표적이 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평판은 듣고 있으나 죽은 자로다.” 당시 사람들이 사데 교회에 대한 평판은 나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웃 교회들이, 일반 세상이 모두 사데 교회를 괜찮은 교회라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세상도 그들을 좋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던 도시 사데의 분위기에 타협한 사데 교회를 세상이 악평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자기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가는데 왜 비난하며 미워합니까?

그러나 사데 교회의 대내외적인 평판과 그들의 실상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종교적인 활동이 왕성했습니다만, 실상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사데 교회는 예배가 끝나자마자 모두 다 집으로 사라지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점심 식사도 함께 하고 각종 프로그램들과 활동들이 주중 시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예배시간만 해도 그렇습니다. 듣는지 마는지 그냥 앉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간간이 “아멘”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교회입니다. 보기에는 아주 그럴듯한 회중이 있고 그러면서도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교회, 그것이 사데 교회의 특징입니다.

좋은 교회 울산교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광역시 내의 다른 교회들의 평판도 좋고 때로는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좋은 교육과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교인들이 모여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어떻게 평가 하실까가 문제입니다.

성도 개개인도 마찬가지의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진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교회활동하면 누구보다도 빠지지 아니하지만 실상은 죽어 있는 자라는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열심 있는 활동, 그 자체가 우리 영적 생명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예배 참석 빈도나 여러 활동의 적극성이 뛰어나면서도 영적 건강이 치명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선언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주님이 우리 교회를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를 향해서 주님이 뭐라고 선언 하실지 살펴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주님의 평가입니다.

“회칠한 무덤 같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는 질책을 바리새인들에게만 항상 돌려야 합니까?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주님의 책망과 결코 무관한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쾌락만 추구하는 인생은 살았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자기 자신만 편안히 살고 즐기는 삶은 의미없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대한민국은 잘 사는 나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외국에 갔다가 돌아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대한민국이 잘 산다는 것이고 대한민국의 수준이 높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걸맞게 세상을 돌아보는 일을 우리가 감당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평안을 추구하고 Enjoy하는 데만 머물 때는 그 사람은 “살았으나 죽었다”고 평가를 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가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깨어나라. 깨어서 지키라.”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특별히 이 말은 사데 교회에는 의미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사데는 어떻게 보면 난공불락의 도시처럼 보였습니다. 남쪽 외에는 동, 서, 북쪽이 다 거의 깎아지른듯한 절벽위에 건설된 도시처럼 보였습니다. 방어하기 쉽고 무너뜨리기 힘든 도시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알렉산더 대제가 그 성을 함락시키지 못해서 특별 현상금을 걸었겠습니까? “누구든지 성을 함락하는 자에게 내가 특별한 상을 내리겠다.”

그래서 거인들이 사데 성채를 바라보면서 관찰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어떤 군인이 하나 성에서 투구를 떨어뜨렸는데 성벽 밖으로 떨어졌습니다. 자세히 보고 있으니까 오솔길을 통해서 나오더니 그 투구를 주워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그 오솔길을 이용해서 성 안으로 침투해서 성문을 열어 제치고 이제 그 성을 함락 시킵니다. 

그것이 한 번이 아니라 300년 이후에 동일한 역사가 되풀이 된 것이 이 사데의 역사였습니다. 거의 절벽에 가까운 암벽위에 건설된 성채는 함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마는 두 번 다 어이없이 함락되었습니다.

너무 안전하다고 방심한 사데의 역사처럼 사데 교회는 밤의 도적처럼 심판 아래 노출되어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빛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면 빨리 손을 써야만 합니다. 희미해지는 등불을 빨리 손쓰지 않으면 꺼져버리고 맙니다. 심지를 돋우든지 기름을 붓든지 하지 않으면 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혹 불빛이 잦아들기 시작한 그런 모습이 이미 여러분의 삶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남은 바를 붙잡아 지켜라”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아직도 예배에는 그런대로 참석합니다. 예배에 나왔으니까 찬송도 부릅니다. 기도도 합니다. 문제는 실제 내용입니다. 소리로는 따라하는데 마음은 멀리 가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함께 눈은 감았는데 생각은 다른데 가 있습니다. 함께 찬송하는 입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찬양을 드리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함께 눈을 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향하여서 우리의 영적인 주목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목소리의 간절함이 아니라 심령의 간절함을 주님께서는 원하시고 계십니다.

참 생명이 결여될수록 사람들은 외형을 화려하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외국여행을 하면서 이방종교를 대할 때에 그런 느낌을 가끔 받습니다. 얼마전에는 태국에 갔을 때 어떤 사원에 갔는데 금으로 완전히 안팎을 발라놨더라고요. ‘이 종교는 아무것도 내어놓을 것이 없구나, 치장한 것 말고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핵심이, 생명이 있는 종교는 건물에 온갖 치장을 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조금 남아있는 생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결여된 종교의식만큼 가증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으면 그 찬송을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면류관 드리세”라고 노래하지만 마음은 떠나있고 삶에서는 자신이 왕노릇 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찬송을 기뻐 받으실 리가 만무합니다.

종교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 중심에 진실성이 결여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한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어떻습니까? 여러분 행위의 온전함이 참여하는 일마다, 순서마다 함께하고 있습니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예배하고 온전히 섬기고 있습니까?

첫 사랑과 헌신을 우리는 항상 갖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처음 만나서 고백할 때뿐만 아니라 함께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확인되어야만 참된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으면 지금도 그 사랑이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즐거움을 회복하십시오.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기쁨을 되찾아야 되겠습니다. 새 삶의 기쁨을 확보하십시오. 그 능력을 회복하십시오.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결코 세상을 되는대로 살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전적 헌신을 우리에게 기대 하십니다. 반쯤 드리는 헌신은 헌신이 아니라 배신입니다. 99% 충성은 온전한 충성이 아닙니다. 자신을 온전히 우리를 위해서 바치신 구주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은 우리를 온전히 드릴 때만 합당한 것입니다.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은 사데 교회가 무엇이 없다고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외형적으로는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예배도 있고 활동도 거기에는 항상 있었습니다.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다만 완전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 찾지 못했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드린 것이 없다고 책망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주일 연보도 안했다는 책망을 지금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표준에 미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다 벌여놓고 하는데 하나도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는 지적입니다.

그들의 헌신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였습니다. 세 살짜리 아이에게 과자사주는 것보다도 못한 마음 자세로 드리는 주일 연보를 주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친척집에 갈 때 아이한테 과자 사가는 그 정도 신경도 안 쓰고 드리는 헌금을 주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십 년, 이십 년 예수 믿어, 마음먹고 한 번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하는 것이 아들 한 학기 등록금 내는 것보다도 정성이 모자란다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친구 만나는 약속 시간보다도 예배 시간 지키는 데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하면 그런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할 까요?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어려운 것들은 골똘히 생각도 하고 토론도 하지만 평범한 것은 생각해보지 않는 것이 죄인들의 문제입니다.

그게 죄인들의 모습 아닙니까? 평이한 상식을 가지고 여러분이 여러분의 헌신의 자세를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하는 말씀이 혹 우리 자신의 신앙 모습 가운데는 없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사데 교회도 매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송도 불렀고 기도도, 연보도 뒤 따랐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그들 나름대로 봉사도 있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온전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한 마음으로 헌신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섬기기를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기 이르지 못하는 것은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만 향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간곡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지켜서 돌아서라.”

사데 교회는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처럼 교회 나와 봤자 무언지도 모르고 그냥 앉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사데 교인들은 처음에 예수 믿을 때에 기쁨으로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였을 때에 그들은 놀라운 평안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뭐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나와 앉아있는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이런 저런 다른 이유로 교회당을 찾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 속에는 화려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처음 들은 그 복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라 기쁨으로 받아들인 그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하는 시간이 일주일 168시간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이 되지 못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한 번도 복음을 제대로 깨달은 적이 없든지 아니면 어떻게 그 복음을 들었는지 다시 회상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네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복음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동시에 그 복음을 전파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울산의 복음화, 울산의 성시화는 구호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복음 전하는 그 일을 위해서 훈련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광역새생명 훈련에 동참해야만 합니다. 초 중급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오늘로 마감되는 고급반 훈련에 신청해서 사역해야만 합니다. 복음화 성시화는 구호가 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참여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여러분은 라이즈업 울산에 대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이 함께 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헌신이 되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모이고 우리의 물질적인 후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것은 아직까지 이 일을 위해서 성도들이 헌신하는 것을 제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어떤 분이 저한테 전달해 주데요. 어떤 회장님 이름으로 들어왔는데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제가 받는 후원금들은 다 비크리스천들이 100만원씩, 50만원씩 하고 있습니다. 울산의 복음화를 우리가 정말 소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부르짖었듯이 100만 울산시민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리는 것이 우리 생애의 사명입니까? 그러면 왜 청소년들을 위한 이 거룩한 일에 우리 성도들은 뒷짐 지고 있어야만 됩니까?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다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는 동시에 우리는 이 가르침을 선포해야 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청소년들은 복음 전하기 쉬운 대상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담당했던 목사님이 사회하기 위해서 날 만나서 그러더라고요. “청소년을 모으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5500인지 있어야 하는 비용이 1200정도 밖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게 걱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학생들 모으는 일만 되면 후원하는 돈들은 얼마든지 가능할거라고 격려해 줬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먹으면 5천 몇 백 만원 되는 돈 그것을 우리 울산 교회가 감당해도, 다른 교회들과 함께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 들 때문에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힘이 빠져서 되겠습니까? 일곱 명이 첫 주간에 운동장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두 번째 주간에는 열네 명이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지난주간에는 44명이 모여서 기도했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여러분 함께 기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을 현장에서 기도하는데 함께 나가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70개 교회의 학생들이 이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증거 해야 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호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복음 전하는 일에 자신을 드려야 하고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네가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회개와 순종을 모르는 교회와 개인에게서는 주님은 말씀과 성령을 거두어 가십니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거기에는 싹을 틔울 수 없는 돌과 같은 반석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울산을 복음화 하기 위해서 울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어느 도시도 부럽지 않은 이 도시에 우리를 살게 하심은 이 도시에 복음화를 위해서 우리를 세워주셨다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어느 시에 내가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다행히 사데 교회에도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대체적인 모습은 실망 적이었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실망스런 일반적인 모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데 교회에 있는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거룩한 소수에 주목하십니다. 사람을 많이 모아놓고 일을 시작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국민중심당이 출범할 때 어떻게 했는지 여러분은 아십니다. 발기인대회를 통해서 일들을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한번도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소수, 마음에 부담을 가지는 거룩한 소수의 기도를 통해서,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기를 호소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는 몇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기를 원하시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저가 이 몇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을 감당할 수 있으면 우리 울산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으로 인해서 광역시 울산은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아직도 희망이 있습니다.

당시 사데 교회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상실하고 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살기가 너무 편안했다는 것입니다. 풍족했다는 것입니다. 풍요와 안일한 삶이 그들을 망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대로 한 지역 교회는 그 지역 특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영향을 입기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영향을 주지 못하면 우리는 그 도시의  향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혼율 1위의 도시, 자살율 2위의 도시의 영향을 입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평안할 때 영적 활기를 오히려 상실하기 쉽습니다. 외적 선행과 활동을 계속 하면서도 자기 몫의 사회봉사도 교인으로서의 몫을 다 하면서도 사치와 쾌락을 즐기게 되면 서서히 죽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쾌락을 조심해야 합니다. 평안과 안일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마지막이 덫과 같이 임할 것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사데 교회를 찾아오신 주님이 어떤 분이었습니까?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데 교회의 진단을 들어보니까 꼭 우리 모습 같습니다. 예배에도 안 빠지고 나오고 기도회도 남보다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을 들어보면 진국은 다 빠지고 건더기만 남아서 늘 해왔던 가락만 읊고 있습니다.

찬송 부를 때도 그렇습니다. 성도들을 서로 돌아보고 생각해야 되지만 왜 하필 하나님 찬송하는 시간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입은 따라 부르는데 마음은 무슨 노래하는지 떠나 있습니다. 

찬송하면서도 찬송 받으실 그분에 대해서는 마음이 멀어져있습니다. 일곱 영을 가지신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신 주님만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해서는 안돼” 느끼면서도 어떻게 해보려고 하면서도 되지 않는 자신으로 인해서 실망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지만 오직 나의 신으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분께 새 생명을 달라고 호소하십시오. 예배하는 시간에 하나님께 우리가 그런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고 하면 예배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올 때의 그 잘 생긴 모습 그대로 돌아가면 예배하는 의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성경에서 다섯 교회를 말했지만 이 다섯 번째 교회의 모습이 특히 우리 모습하고 어떻게 그렇게 닮았나?” 그렇게 생각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입은 자입니다. 죄악을 뉘우치면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그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분은 아직도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를 붙잡은 손을 떼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실 능력이 풍성하십니다. 그 분의 은혜를 입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위해서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혼자서도 기도하십시오. 새벽에도 기도하십시오. 밤에도 기도하십시오. 특별히 매일 저녁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분들은 금요 기도회 시간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므로 개인이 새로워지고 교회가 새로워지고 새로워진 교회가 지역 사회의 축복이 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아멘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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