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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전신갑주 시리즈(1) : 진리의 허리띠 (엡 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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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여성 여러분, 제가 참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여자 분들끼리 만나면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제가 들어보니까 “너 참 예뻐졌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해 주로 남편이나 자녀들 이야기, 살림 이야기 많이 하시더군요. 맞습니까? 그런데 우리 남자들끼리는 만나면 직장 이야기나 가정 이야기도 하지만 제일 많이 나오는 레퍼토리는 단연 군대 이야기입니다. 여자들이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왜 남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군대 얘기냐? 그렇게 만날 하면서도 지겹지도 않냐고 한다는데, 남자들 세계에서 군대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기억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한창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기에 그토록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도 끝나지 않는 것이 군대 이야기인 것입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설교하면서 군대 이야기를 종종 하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군인’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군인’ 하면 애국심에 불타 나라를 지키는 사람,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충성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자세가 없으면 그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닙니다. 바로 이 같은 군인의 특성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을 ‘군사, 군병’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되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평화 시가 아닙니다. 치열한 영적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전시입니다. 우리의 원수인 마귀사탄은 지금도 각종 궤계로 우리를 공격하여 넘어지게 하고 멸망시키려 듭니다. 이러한 원수마귀의 공격을 막아내고 복음의 능력으로 그들을 쳐서 한 생명이라도 더 마귀의 손 안에서 구원해내는 것이 영적 전쟁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도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사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두 가지를 착각하도록 만듭니다.

첫째는, 전쟁이 끝난 줄 아는 착각입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평화 시가 아닙니다. 전쟁이 없으니까 평화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지금은 엄연히 휴전기간입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지금까지도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다만 휴전, 즉 잠시 전쟁을 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총 쏘고 대포 쏘는 전쟁이 없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귀사탄도 우리로 하여금 전쟁이 끝난 것처럼, 평화 시인 것처럼 착각하게 해서 우리의 긴장이 풀어지도록 만듭니다. 절대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두 번째로, 마귀사탄은 우리가 이 전쟁터에서 민간인인 줄 착각하도록 만듭니다. 전쟁이 나면 군인들은 당연히 총을 메고 전쟁터로 달려가야 합니다. 휴가를 갔다가도 싸움터로 돌아가야 하고 심지어 군 생활을 다 마치고 제대한 사람들조차 예비군으로 소집되어 전방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민간인들은 보따리를 싸고 후방으로 후방으로 피난을 갑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마귀사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는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야” 하고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민간인인 줄 착각하고 치열한 영적 전쟁터를 피해 후방으로 피난을 갑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영적전쟁터에서 민간인이 아닙니다. 더 이상 전쟁터를 두려워하거나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민간인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 크리스천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그러면 우리 모두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 준비 없이 무조건 전쟁터로 달려갔다가는 큰일 납니다. 전원 전사합니다. 반드시 군사들은 전쟁을 치루기 위한 준비를 잘 갖춰야 합니다.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전쟁을 위해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제가 처음 군대 갔을 때 생각이 납니다. 훈련소에 입대를 하니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사복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는 일이었습니다. 군복을 입고 나니 벗어놓은 사복은 소포로 집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들이 군대에서 보내온 사복을 받고 울어본 분들 꽤 많을 것입니다. 군복을 입고 나니 그 다음에 하나씩 하나씩 군수품이 지급되는데 가짓수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닙니다. 제일 먼저 철모가 보급되고 그 다음에 군화, 허리띠, 소총과 대검 등이 다 지급되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참다운 군인으로서 전투할 준비를 다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싸우겠다는 혈기만 가지고 영적 전쟁에 임했다가는 마귀사탄에게 총 맞아 죽기 딱 알맞습니다. 이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방어 무기로 우리의 온 몸을 보호하고 또 어떤 무기로 마귀사탄을 공격하느냐가 영적 전쟁의 승패를 전적으로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설교 시리즈 제목이 바로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10~12절을 읽어봅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2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관한 씨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 이 모두가 마귀사탄과 그 조무래기인 귀신들을 뜻하는 말인데 바로 이들과의 치열한 영적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10~11절은 우리가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주님 안에서 그분이 주시는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하고 마귀의 궤계와 공격을 이겨내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신갑주’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신갑주’란 말은 우리가 영적 싸움을 할 때 두 가지 종류의 무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는 방어무기인데 우리 몸을 방어하되 몇 군데만 보호하면 안 됩니다. 온 몸을 빈틈없이 보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적인 원수마귀는 빈틈 파고들기가 주특기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우리 몸에 빈틈이 있으면 우리의 제일 약한 그 부분을 귀신같이 파고들어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온몸을 전혀 빈틈이 없게 보호하고 방어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공격무기인데 방어만 하는 전쟁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모든 공격을 빈틈없이 막아내면서 공격무기를 통해 원수 마귀를 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4~17절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여섯 가지가 나오는데 함께 찾아봅시다. 14절에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가 나옵니다. 15절에 ‘평안의 복음의 신’, 16절에 ‘믿음의 방패’, 17절에는 ‘구원의 투구’와 유일한 공격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의 검’이 나옵니다. 이러한 전신갑주는 사도 바울 당시 로마 군인들의 무장 모습을 설명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군은 세계를 정복한 막강한 군대였습니다. 로마군은 ‘군단’ 단위로 되어 있었는데 한 개 군단은 4800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두 자원입대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엄격한 훈련을 받았고 철저하게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군단이 로마의 주력군으로서 약 15만 명 정도 되었고 그 외에 군단보다 많은 숫자의 보충부대도 있었는데 이 보충부대는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가장 중요한 전투는 모두 ‘소수정예’인 이 15만 명의 군단 병사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로마의 군단을 보면서 이들이 왜 그토록 강한가 생각해 보았던 것입니다. 15만 명이라는 병력은 다른 민족의 군대에 비해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숫자가 적은데도 어떻게 이들은 이렇게 강하고 전쟁마다 승리해서 세계를 호령하게 되었을까? 싸움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금 전 설명했지만 이들 로마 군단은 숫자는 적지만 반드시 자원한 시민들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엄격한 훈련과 철저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군대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영적 전쟁도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2005년 현재 우리나라 전체인구 중 기독교인은 약 876만 명, 천주교는 514만 명, 불교는 1072만 명입니다. 기독교인보다 불교인이 훨씬 많고, 그보다 무종교인의 숫자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영적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876만 기독교인이 1072만 불교인보다, 또 그보다 훨씬 많은 무종교인보다 더 강하고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도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하나하나가 모두 일당백의 용사가 될 때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일당백의 용사들이 되려면 로마 군단처럼 네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로마의 군단은 반드시 자원해야 하며, 로마 시민권을 가져야 하며, 엄격한 훈련을 받고, 철저한 무장을 갖춰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도 이들처럼 자원하는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자원하는 심령 말입니다. 또한 로마 군인들처럼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 말입니다. 나는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이 땅에 속한 시민이 아니라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땅의 것이나 세상의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로마 군인들처럼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처럼 전신갑주로 철저하게 무장할 때 우리 모두 일당백의 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

이 하나님의 전신갑주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14절에 나온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얼마 전 제 친구 목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허리 디스크 때문에 설교도 못 하고 쩔쩔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허리 디스크에 걸리면 오래 서있기 힘들고 심한 경우 앉아있지도 못합니다. 우리 몸에서 허리가 중심이기 때문에 허리가 약하면 온 몸이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역도선수들이 허리에 굵은 가죽 띠를 띠고 나오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허리를 띠로 든든히 붙들어 매야 제대로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인데, 전투에 나가는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허리띠를 맸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 군인들은 갑옷 속에 허벅지 중간쯤까지 내려오는 모직 옷인 ‘튜니카’(가운 같은 옷)를 입었습니다. 전투를 하기 전에 가죽 띠로 이 옷을 붙들어 매야 긴 옷 때문에 밟히거나 넘어질 염려 없이 병사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 나서기 전 허리띠를 띠어야 행동을 개시할 ‘준비’가 완료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로마 군인의 허리띠는 매우 중요한 무장이었던 것입니다.

여섯 개의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서 진리의 허리띠가 첫 번째로 나오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병사가 허리띠를 띠어야 싸움을 시작할 준비가 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진리의 띠를 띠어야 영적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엄격한 훈련기간을 거치고 모든 준비가 다 끝나서 이제 하나님이 부르시기만 하면 전쟁터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허리띠를 띠어야 비로소 병사는 불편함 없이 행동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처럼 우리 안에 진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고 행동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6.25 직전 우리나라 국군 중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병사들이 섞여 있다가 여순반란사건을 일으킵니다. 국군이 나가 싸우는데 병사의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 속에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없는 병사가 섞여 있다면 그는 아군의 사기만 떨어뜨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치열한 영적 싸움터에서 아군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아군의 사기만 떨어뜨리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믿는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하고 참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역사에 보면 진리를 위해 죽은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마르틴 루터는 천주교의 잘못된 신앙에 대항해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고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고 그를 체포해 죽이려 했지만 프레데릭 영주가 보호해 주어 겨우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 황제였던 카를 5세가 루터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1521년 3월 6일 보름스에 있는 국회에 나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신변보장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보장만 믿고 보름스 국회로 갔다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이제 종교개혁을 일으킨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국회에 갈 것인지, 아니면 생명의 위협이 두려워 안 갈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루터는 이런 말을 남기고 보름스 국회로 담대히 나아갑니다. “나는 보름스에 입성할 것이다. 비록 보름스 국회의 지붕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가 달려든다 할지라도 나는 그곳에 서서 마귀를 쫓아낼 것이다.” 멋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루터가 멋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진리의 힘’입니다. 이렇게 루터가 목숨을 걸도록 만든 것이 바로 성경의 진리였습니다. 그가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발견하게 된 말씀이 1장 17절, 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단순한 말씀 같지만 이 안에는 우리가 구원 받는 방법은 행위도 아니요 공로도 아니며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이신칭의의 절대적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이 진리를 천주교가 왜곡하였기에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만약 루터가 다른 인간적 소신 때문에, 이를테면 천주교의 비리에 격분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면 절대 목숨을 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붙잡은 것이 바로 성경의 절대 진리였기에 그는 어떤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보름스 국회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허리와도 같습니다. 바로 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생명을 걸었고 오늘 우리도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간혹 교회 일을 하면서도 인간적인 동기로 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인간적인 성취감을 얻으려고 일하고, 체면 때문에, 욕심 때문에 일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정말 ‘일’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은혜는 못 받고 꼭 실패하거나 시험에 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나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진리에 순종해서 이 일을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진리가 주시는 능력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도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되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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