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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극적인 배척자 (마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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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장은 지난해에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비유들이 등장하지만 비유의 의미는 크게 3가지 요점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장한다는 것, 하나님 나라는 내 모든 소유를 기꺼이 포기할 만큼 지고의 가치가 있다는 것,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비유 후에 예수님은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우리 주님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배척했습니다. 비천한 목수 출신을 메시아로 받들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매우 친밀한 사람들이었으나, 예수님의 신성한 본질을 깨닫는데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 때문에 그곳에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13장의 하나님 나라 비유를 중심에 두고 마태는 ‘인간적 친밀함의 한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유가 시작되는 시점에서는 모친과 동생들에게 배척되는 모습이 기록되었고, 비유가 끝나는 시점에서는 고향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모습이 기록됩니다. 인간적으로 친밀하다고 해서 예수님의 신성한 본질을 더 잘 깨닫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혈연이나 지연과 같은 인간적인 친밀함을 중심으로 해서 건설될 수 있는 나라가 결코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친밀한 교제’를 통한 교회의 부흥을 꿈꾸는 일들이 많습니다. 사실 성도간의 교제는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인간적인 친밀함’만 증진한다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적 친밀함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고 그 분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주님의 신성한 본질을 깨닫고,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제가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우리 주님의 본질을 깨닫는 것과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외면하면서까지 중심을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14장에 접어들면서 주님을 배척하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추려보면, 예수님께서는 먼저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셨고, 다음으로 모친과 동생들에게 배척받으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도 배척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지역의 통치자였던 분봉왕 헤롯에게도 배척 받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배척을 당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의 일생은 배척받는 일생이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은 오직 한 가지의 소원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당신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 한 분의 사랑으로 족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단 한 가지 기쁨과 즐거움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몸을 단장하고,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남자든 여자든 자기를 사랑해주고 자기의 가치를 알아줄 때 힘이 납니다. 자신을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없고, 아무도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에게 삶은 유쾌하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척받는 사람에게 삶은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네 신앙생활 속에는 삶이 몹시도 무겁게 느껴지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고,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말 그대로 ‘군종 속에서의 고독’을 느낍니다. 그럴 때면 힘이 나지 않고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제 몸 하나 버티기도 힘들어집니다. 만약 우리 중에서 이처럼 깊은 외로움 속에 빠진 분이 있다면, 배척 받으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그 외롭고 고달픈 그 심령을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묵묵히 일하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하여 그분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전능하심과 지혜로우심을 안다할지라도 그분께 나의 삶 전체를 의탁하지 않는다면, 나는 주님의 능력과 지혜를 알고도 배척한 예수님의 고향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주님의 권능의 소식을 듣고서도 두려워 떨기만 했던 헤롯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의 은혜가 당신의 연약해진 영혼을 소생시키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처럼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기쁨과 즐거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봉왕 헤롯(Herod Antipas)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1-2) 본문의 헤롯은 예수님의 탄생 때에 베들레헴 유아들을 학살했었던 헤롯대왕의 아들입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베레아 지역 남쪽 인근 지역을 다스렸던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고후 11:32)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이복형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인 헤로디아를 좋아했습니다. 이미 그녀가 또 다른 이복형인 헤롯 빌립과 결혼한 상태였지만, 이혼 하게하고 자신도 이혼한 후에 함께 살았습니다. 형수를 가로챈 것입니다. 그의 명백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의 죄를 내놓고 지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의 부도덕한 행동을 회개하도록 촉구했습니다(4). 이 때문에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체포했지만, 민중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이 두려워 죽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5). 그러다가 그의 생일 잔칫날에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Salome)가 귀빈들 앞에서 춤을 추는 일이 있었습니다(6).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살로메는 당시 열 서넛 살 정도였는데 헤로디아 가문의 퇴폐적인 가습을 이어받아 상당히 요염한 춤을 추었던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헤롯은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했습니다(7). 어린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무엇을 구할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했습니다(8). 이에 헤롯은 근심했습니다(9). 개인적으로 밉기는 하지만, 모든 백성이 위대한 선지자로 여기는 의인의 목을 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귀빈들 앞에서 맹세한 것 때문에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요한을 참수합니다(10).

세례 요한은 하나님을 위한 일생을 살았으나 어떤 면에서 비참한 최후를 당한 것 같습니다. 소위 오늘날 ‘예수 믿고 복 받으라’는 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지지리도 복이 없는 셈입니다. 뭔가 예수를 잘 못 믿은 사람처럼 취급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불명예스런 처형은 예수님의 불명예스런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게 합니다. 또한 요한의 제자들이 그 시체를 가져 장사했다는 묘사 역시 예수님의 죽음과 그의 장사 상황을 내다보게 합니다(12). 세례 요한은 살았으나 죽으나 예수님을 증거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사람의 인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묵묵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서 일생을 살았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헤롯의 통치 영역을 떠나셨습니다. 예수께서 헤롯의 통치 지역을 떠나신 것은 요한의 사망 이후 당신님께로 사람들이 몰려들면 헤롯을 자극하기 쉽고, 그렇게 되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불필요한 마찰이 생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떠나심이 헤롯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기회가 마감된 것과 같은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그는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서 ‘버려둠’의 형태로 임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4, 26, 28) 생일잔치에서 딸의 야한 춤과 헤롯의 허세부리는 맹세와 세례 요한의 참수는 당시 헤롯 궁전의 방종한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그러한 삶을 살도록 버려두시고 떠나셨습니다. 더 이상 아무 말씀도 그에게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을 참수한 이후로 헤롯은 의로운 자를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세례 요한의 망령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들으면서도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여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이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헤롯은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대면합니다. 그때에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심히 기뻐했는데, 그 이유는 호기심과 어떤 이적 행함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눅 23:8). 그러나 초라한 예수님의 행색을 보고서는 군병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보냅니다(눅 23:11). 그 때도 예수님은 헤롯에게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고 헤롯이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버려두셨습니다. 무관심하게 되신 것입니다.

헤롯처럼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부도덕한 삶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치 않고 여러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 앞에 바르지 않는 그 삶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소극적으로 주님을 배척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2:30)고 하셨고, 헤롯 역시 그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소극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무서운 사실은 어느 날 하나님께서 더 이상 회개를 촉구하시지 않고 버려두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인하여 양심이 찔리고 내 삶에 하나님의 징계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다면, 아직은 그분께서 관심을 보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베풀어지고 있는 때에, 주님의 은혜를 배척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모으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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