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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되는 교회 (빌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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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요즘 월드컵 때문에 온통 나라가 축구분위기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축구를 좋아합니다. 선수가운데 박지성 박주영선수를 좋아합니다. 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매너좋고 실력도 좋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선수들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축구는 어떤 특정한 한 선수만 잘한다고 되는 운동이 아닙니다. 11명 전원이 다 잘해야 합니다. 공격도 잘해야하지만수비도 잘해야 합니다. 공격과 수비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골키퍼가 잘해야 합니다. 축구와 같은 경기가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팀웍입니다. 하나되는 팀웍이 잘 되어야 좋은 팀이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강동교회에서 6년여 동안 목회를 하면서 우리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 목회자들에게 말을 할때에도 항상 감사합니다.
6년여 사역 시간 동안에 많은 부분이 긍정적으로 변화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하나되는 교회로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교회도 불완전하여 현실 속에서 이런 저런 문제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항상 로고처럼 우리가 기도하고 강조하는 내용이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비젼의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오늘날 지상의 많은 교회들이 얼마나 분열과 다툼으로 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는지 모릅니다.특별히 우리 중에는 그 아픔과 상처를 몸소 체험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직접적인 경험은 없지만 우리 지역과 우리 노회의 교회들이 그런 아픔과 상처를 겪는 것을 지켜보면서 너무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 특별히 두명의 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여집사였던 유오디아와 순두게라고하는 여인들입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이 두명의 여인은 빌립보교회의 핵심 여자 일군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 둘이 서로 대립하여서 다툼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이든 남자이든 교회 속에서 일을 하다보면 우리가 서로 다툴 수 있습니다. 평신도일꾼도 그렇고 전임사역자도 그렇습니다.이런 갈등은 빌립보교회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 중에서 가장 풀기가 어려운 것 중에 내 안의 감정의 문제일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그 속에 핵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해결되지 않는 부정적인 감정들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거나 거부당하였거나 하였을 때 좋지 않던 감정들이 내 마음에 핵심감정으로 남아있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무의 옹이와 같습니다. 모든 나무에 보면 나이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밝은 곳에서 햇빛을 잘 받고 자란 나무는 나이테가 일정하게 넓고 규칙적입니다. 그러나 음지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무는 나이테가 좁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에는 옹이가 생기게 됩니다. 그럴 경우 옹이 때문에 재목으로 쓸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많은 경우에 우리 마음의 상한 핵심감정들로 인하여서 인생의 많은 부분을 어렵고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처로 인한 마음의 문제가 있을 때 삶의 기쁨이 없어집니다. 평안이 사라집니다. 특히 교회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여집사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사람이 서로 불화하고 있었습니다.빌립보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였지만 이 두사람으로 인하여 서로 단합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여성도들은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 바울과 같이 개척의 주요 역할을 한 자로 교회에서 중요한 지위에 앉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중요한 직분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빌립보 교회의 상황을 바울이 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전부 다른 배경을 가지고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100명이 모이면 100명이 다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견이 서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도 힘들게 되어버립니다.바울은 의견일치가 서로 되지않으니 갈라서거나 교회를 나와 다른 교회를 개척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교회를 포기하고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득 맥도날드라는 유명한 목사는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백성들도 영접하라”고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시면서 주님께서 이끄는 무리들을 공동체를 이끌고 우리들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교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하나를 이루어가야 합니까?

1. 주안에서 굳게 서야 합니다.

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바울에게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랑이요 사모하는 대상입니다. 바울의 기쁨이요 바울의 면류관입니다. 여기 바울을 보면 비록 교회가 문제가 좀 있었지만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하며 기쁨과 면류관으로 고백합니다. 먼저 바라기는 우리들의 삶에 교회가 나의 사랑 나의 사모의 대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기쁨이 되며 나의 면류관이 되어지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바울이 교회를 축복으로 여기고 기쁨으로 여기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교회는 바로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울서신 곳곳에서 교회를 주님의 몸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1장 23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교회란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사람이 바로 교회요 우리 주님의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주님의 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주님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피의 댓가로 우리를 구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아무리 별볼일없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몸버리시고 피흘려 우리를 구속하셧습니다. 그리고 이땅에서 교회를 이루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강조합니다.즉 교회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교회에 충성하는 것은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교회와 예수님은 하나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합니다.그런데 바울은 단순히 ”예수믿으십시요“라고 전도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전도하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즉 교회 중심의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돌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를 사랑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정말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물론 목사도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장로님도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성도님들도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교회란 바로 주님의 피를 값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피값을 지불하시고세우신 주님께서는 먼저 교회가 하나되기를 소원하십니다.
그 하나됨을 위해서 먼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주안에서 굳게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서는 것이 굳게 서는 것일까요

바울은 고전16장 13절에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합니다.
먼저 굳게 서는 것은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한 믿음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굳게 서는 신앙은 “남자답게 강건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의 특징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누가 이런다고 쏠리고 저런다고 쏠리고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 좌지 우지 되지 않는 믿음입니다. 중심이 바로 굳게 잡혀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먼저 우리 신앙이 시류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쉽게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깨어 강건한 신앙으로 자기를 지켜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굳게 서있는 신앙은 무장되어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즉 굳게 서있는 신앙은 굳게 무장되어 준비될때 가능하나 신앙입니다. 그래서 종말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우리의 온 몸을 무장하고 훈련하는데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내가 먼저 주안에서 강건한 신앙으로 잘 무장되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의 공격에 승리하고 세상의 공격에 이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이길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먼저 하나되는 교회를 위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같은 것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이것은 한번이 아닌 계속적인 마음의 상태가 되어지기까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 교회에서 다툼이 일어납니까?
서로 마음이 다른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빌립보 교회의 2명의 여성지도자가 구체적으로 어디서 생각이 다른지 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여기 바울은 사람의 다툼과 분쟁의 문제가 바로 마음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속에서 일꾼들은 비록 외모가 다를지라도 마음은 한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합니다.여기 바울이 집사들이 서로 다투어서 싸웠을 때 무엇이 문제였고 왜 그랬고 문제를 물어보지 않습니다. 결국 궁극적인 원인은 마음이 문제이고 같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궁극적으로 겸손함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를 비우는 겸손함의 마음입니다. 교회 속에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마음을 품어서 같은 마음을 품는다면 사실 교회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는 한마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같은 뜻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같은 비젼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세상에서 말을 하는 코드가 같아야 합니다.종종 교회 속에서 보면 이런 저런 소리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잘되게 하려고 하는 소리가 있고 자기를 잘되게 하려고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을때 우리들은 겸손합니다. 겸손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기의 주장 자기의 생각으로 조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한번의 소리를 발하기 전에 그 소리를 내기까지 신중하게 기도하고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겸손하게 자기의 소리를 발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느끼는 것은 너무 다른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하나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은 교회 속에서 많은 경우에 마음이 갈리고 서로 갈등하고 부딪히는 이유가 선천적인 기질의 차이에 있을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담즙질의 사람은 과업지향적입니다. 이 기질은 일을 위해서는 과감한 선택을 합니다.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가족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높은 기준으로 가지고 사람을 대합니다. 바울이 이 기질입니다. 그래서 실수한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에 있어서 높은 기준에 비추어 실수한 마가를 용납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결국 바나바와 헤어지고 맙니다.
다혈질의 사람은 실수도 많이하고 정도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수가 있는 사람을 잘 받아줍니다.그리고 다혈질이 있는 곳에는 항상 사람들이 끓고 웃음이 넘칩니다. 그러나 시작은 잘 하지만 마지막이 용두사미격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기질의 차이는 신앙스타일도 차이가 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기질의 차이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도 차이가 나게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교회 속에서 우리가 서로의 기질의 차이를 인정하고 기질의 약점과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차이 다른점을 해결할 때 정말 조심할 것은 “내”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현실의 교회에서 우리에게 정말 조심할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교만”입니다. 교만하게 되면 자꾸 자기의 생각 자기의 소견을 주장하면서 자기생각만 옳다라고 주장합니다.그러다보면 결국 다투게 됩니다. 서로 싸우게 됩니다. 화합하지 못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겸손함입니다.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됨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 속에서 먼저 한 마음을 서로 같도록 힘을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깨서 사신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자존심을 앞세우면 교회는 같은 마음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내가 죽고 주님이 살아서 주님이 앞설때 주님 중심으로 한마음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명심할 것은 내가 그냥 저절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지배할 때 내가 죽습니다. 믿음이 지배할 때 내가 죽습니다. 성령이 역사해야 내가 죽습니다. 은혜가 역사하시는 삶이 되십시오,믿음이 역사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탁하는 것은 공동체적으로 같은 마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서로 깨어 기도하는 일입니다. 자꾸 함께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할 때 영이 하나됩니다. 함께 기도할 때 뜻이 하나됩니다. 우리 교회가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항상 하나되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안에서 화해의 사역자가 필요합니다.

3절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하나됨과 화해를 위해서 어떤 제3의 무명의 사람에게 화해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체적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이 인물에 대해서 크리스소스톰은 유오디다나 순두게의 남편이나 오빠일 것이라고 했고 해석학자 라이트푸트와 왈부드는 에바브로디도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볼때 전문적인 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일꾼인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서로 권하여 하나되게 하라고 부탁합니다. 빌립보교회뿐만 아니라 글레멘드를 위하여 다른 동역자까지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화해를 부탁한 이 사람은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라고 합니다. 바울이 화해와 중재를 부탁한 이 사람은 이미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많은 고난을 받고 희생을 한 귀한 일꾼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헌신과 수고는 화해를 위해 수고했을때 다른 사람들에게 충분히 인정받을만한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분열이 일어나고 문제가 일어날 때 모든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만한 이런 화해의 사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화해의 사역자가 사역할 때 불협화음이 사라지고 서로 하나되는 교회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화해자 중재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관계를 잘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말씀 중에서 황금율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언뜻보면 이 말씀은 인간관계를 먼저 전제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문맥속에서 볼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적으로 고려된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관게의 핵심은 하나님과 관계입니다. 이런 하나님관계가 바로 되어있는 사람이 바른 화해자 중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상담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세상상담학과 기독교상담학은 차원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상담학은 인간편에서 모든 것을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상담학은 진정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관계가 되어지도록 지도하기 때문에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화해자가 되는 것 정말 의미있지만 먼저 영적인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바르게 이루어질때 모든 관계가 바르게 질서가 잡힙니다. 인간적으로 좋은말을 해서 화해를 시키는 것은 임시방편이 될뿐입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화해가 되고 영적인 화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종종 교회가 분열이 일어나고 깨어질때가 언제입니까?
처음에 일어났던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중간에 말로 인해서 해석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상처를 받으므로 문제가 더 커지고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덕스러운 화해자, 지혜로운 화해자가 있으면 문제도 문제가 안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화해를 위해서 관계를 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덕이 있다는 것입니다. 파가 나뉘어져 분열이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고전14장에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덕입니다. 바울은 고전14장 12절에서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26절에서는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이런 덕있는 화해자들은 나보다는 남을 나보다는 교회를 세우는 자입니다.
덕있는 화해자들은 같은 말을 해도 교회를 세우는 말을 하고 하나되게 합니다. 그래서 덕있는 사람들이 잇는 곳에는 질서와 하나됨의 역사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이런 덕있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 권리 자기 주장보다는 교회를 위해서 주님의 피사랑과 피헌신을 하는 희생의 사람들입니다. 나보다는 남을 세우고 나보다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 속에 이런 덕있는 사람들이 많아지시기를 바랍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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