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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성령으로 난 사람 (요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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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라고 불리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니고데모의 바리새인이면서 또한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라는 말은 그냥 일반적인 지도층 인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의회였던 산헤드린의 의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0절에 니고데모의 신분이 하나 더 제시됩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칭호는 그냥 일반적인 존대의 칭호가 아니라 그가 실제로 공적으로 인정받은 백성들의 교사임을 말합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주요 파벌 중에 하나로서, 주전 2세기에 형성된 폐쇄적인 집단이었습니다. 바리새파라라는 이름은 구별된 자(the elect) 즉 "참다운 이스라엘(the true Israel)"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일종의 시험기간을 거쳐서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입단하면 십일조 규정과 정결 규정 등 공동체의 의무 규정을 반드시 지켜야 했으며, 이를 통해서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구별된 의인들이라고 자부하고, 또 그것을 대외적으로 과시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구별된 참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하고 율법 준수와 수호의 열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리새파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선생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그가 율법학자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학자들은 흔히 랍비라고 불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칭호는 공적인 율법 교육을 받아서 정식으로 율법학자로 인정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율법학자가 지닌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포함한 옛 전승들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권한과 책임을 맡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공식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서 율법과 전승에 대한 그들의 유권해석에는 아무도 의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 함께 니고데모에게는 유대인의 지도자라는 칭호가 있는데 여기서 지도자라고 하는 이 칭호는 종교와 법을 포함한 유대인의 생활 전반을 규제하고 유대인 사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행사하던 의결기관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큰 권한을 행사하는 지배계층이었던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신분이 알려주는 니고데모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그는 그야말로 모든 면에 있어서 유대인적 특성을 가장 농축하여 지니고 있는 가장 유대인다운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참 이스라엘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고, 유대교의 모든 깊은 지식을 통달한 사람이고, 정치적으로도 큰 권한을 가진 지배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탁월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서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대해 파악하고 이해하고 있을법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실상 그 반대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계속해서 살펴봅시다. 서품 받은 율법학자인 랍비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칭하면서 다가왔습니다. 어두운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유대인으로서는 최고의 지위를 셋씩이나 동시에 지니고 있는 탁월한 유대인이었지만 사실상 그는 밤의 어두움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져오시고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는 니고데모의 율법에 대한 열의와 지식 그리고 권력에도 불구하고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그의 대화를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동원하여 예수님께 호의적으로 인사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예수께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 즉 선지자이심을 인정하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일으키신 놀라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받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니고데모의 지위를 고려할 때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다른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께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호의를 넘어서서 예수님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세와 예레미야와 같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 3.12에서 모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하고 말씀하셨고, 렘 1.19에서 내가 네 곁에 있어서 너를 도와주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선지자들과 같이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동행과 도우심을 받는다는 것이 니고데모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안목이라고 할 만한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이 예수가 진실로 어떤 분인지 알아보지 못한 반면, 니고데모는 예수가 행하시는 능력의 사건이 단지 놀라운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역사하고 계심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의 이러한 안목과 이해가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절에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예상 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 가장 호의적인 말로 인사하고 있는데 비하여, 예수께서는 친절한 인사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의 생각이 어떠한지, 니고데모가 찾아온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니고데모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아셨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궁금함이 있고 기대와 소원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그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깨닫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예수께서는 한눈에 파악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신 것은 그 핵심적인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선 여기서 눈에 띄는 특이한 말은 거듭난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거듭난다는 말을 교회에서보다 세상에서 더 많이 사용하는 듯 합니다. 사람이 겉모양만 조금 바꾸어도 거듭났다고 하고 회사나 기관이 무엇을 조금만 개선했다 하면 심문 방송에서 그 단체가 거듭났다고 떠듭니다. 하지만 이 말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 쓰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말로 거듭이라고 옮겨진 이 말은 물론 횟수로 다시 한 번 더라는 의미가 있지만 원래 이 말의 뜻은 위로부터 즉 하늘로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다라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지만 그 원래적인 의미는 위로부터 난다, 하늘로부터 난다,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말씀은 사람이 위로부터 나야,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위로부터 나야 한다고 하시자 드디어 유대인의 율법교사인 니고데모의 무지와 몰이해가 폭로되고 맙니다. 그는 "위로부터 난다"는 예수의 말씀을 듣자마자 그것을 육신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연관시키면서 사람은 그럴 수 없다고 강변합니다. 장성한 다음에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느냐고 회의적인 반문을 합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영적으로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식과 경험과 지도력을 겸비한 사람이지만, 유대교의 모든 비밀스런 전승들을 통달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속해 있는 영역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고, 그가 바라고 이해하고 예상하던 것과는 너무나 판이한 것이어서 아예 깨달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영적으로 완전히 무지한 니고데모에게 다시 한 번 자상하게 설명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인 출생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물은 세례의 물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통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창조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로 세례 받는 것은 성령으로 출생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즉, 물의 세례는 내가 성령으로 완전히 새롭게 창조되는 사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비가시적인 사건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완전히 새로운 출생이란 것은 유대인 그 누구도 알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워진 존재, 완전히 다시 태어난 존재, 하늘로부터 태어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위로부터의 출생 혹은 성령으로 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 속한 사람의 완전히 새로운 성격, 과거의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른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날카롭게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6-8절에서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십니다. 이 구절의 뜻을 풀이하여서 다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체의 출생이나 육체의 신분의 변화는 단지 육체의 일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이며 영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나라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새로운 존재들, 즉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자들, 즉 세례의 물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새 존재들만이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다. 바람의 근원과 그 종착지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령의 사람이 영으로 태어나는 것도 바로 그런 신비한 일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 자연적인 인간은 본성적으로 땅의 것, 세상의 것에 붙잡혀서 얽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간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의 삶이나 죽음이 모두 그냥 땅에 붙들려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에 얽매여 있는 자, 육신적인 삶만을 알고 그런 삶만을 사는 자에게는 열려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 나라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의 사람만이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고 거기에 살 수 있습니다. 영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성령을 통해서 다시 태어난 사람, 성령을 통해서 새로워진 사람을 말합니다. 고대에는 바람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고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는 가장 큰 불가사의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지지도 않고 통제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불가사의한 것처럼 사람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일도 세상의 지식과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인가 아니면 어려운 일인가? 그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닙니다. 어렵다 쉽다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하나님으로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면,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된 사람이라면,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새로 조성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는 것을 자신의 노력을 통해 자기 인품이나 성격의 일부분을 개선하는 것쯤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자기의 인격을 도야하고, 자신의 품성을 개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다시 태어남, 즉 위로부터 태어남, 성령으로 나는 것 바로 그것이며, 오직 그래야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계시는 것은 그 자체로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는 것은 성령의 하시는 일을 통하여 알려집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알려집니다. 성령이 계신 곳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사람들이 사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위로부터 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일하시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꾸며서 가장하거나 흉내낼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마술사 시몬은 사도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성령의 권능을 사려고 했으나 그에게는 저주와 멸망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성령만이 성령의 역사를 이루시며, 성령의 사람만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첫째로 그분은 구원의 영이며, 새 창조의 영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나라를 건설한 교만한 자들, 결국 죄악으로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의 나라에 속하였던 우리들을 구원하신 분이며 이를 위해 새 창조를 행하신 분입니다. 성령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의 절망적인 죄의 현실을 깨닫게 하셨으며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만나게 하셨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여러분 자신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은 다 그분이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새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났고, 새 피조물이 되었으며, 새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성령은 여러분과, 모든 족속들과, 온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없는 공동체로 만드십니다. 성령은 그러므로 또한 사랑의 영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에 오순절에 과연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분은 놀라운 권능으로 임하셨고, 그분의 강림하심으로 지구상에 최초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분의 사역은 단지 유대인들만 향하신 것이 아니며, 희랍인이나 로마인들만을 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때, 그 곳에 있던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메소포타미아인으로부터,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에 이르기까지 성령께서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성령께서 이 온 민족들 모두를 향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새 창조를 행하시겠다는 것을 처음부터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과연 그 이후로 이천년동안 성령은 교회를 통해서 유대인이나 희랍인이나, 야만인이나 스키타이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는 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기 전에는 유대인과 희랍인이 서로 차별하였고,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 받았으며, 종이 자유인과 결코 함께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자 이 모든 차별은 사라지고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단지 한 집단을 이룬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이루신 공동체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가 더욱 주목하여야 할 성령의 사역이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면서 동시에 우리 교단 총회가 정한 환경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모든 피조세계를 지으시고 유지하시는 창조의 영이시며 생명의 영이심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분은 태초에 혼돈 위를 운행하셨던 그 하나님의 영이며, 온 세상 만물이 그분으로 인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그의 생명의 권능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며 그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오늘날 사람을 포함하여 이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환경의 파괴로 인한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탐욕을 채우려는 과소비와 과폐기 및 과도한 개발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바라볼 때 이 문제는 피조세계 전체를 창조하시고 보전하시며, 특히 생명을 부여하시고 지키시는 성령의 역사를 인간들이 깨닫지 못하고 그 성령의 뜻과 역사를 무시하고 거스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피조 세계는 구원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피조 세계 전체는 인간의 교만과 탐욕과 타락과 죄악의 희생되었으며, 그 와중에 함께 고통 받고 함께 구원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9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뀉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19-23)
인간의 탐욕과 죄악과 타락으로 인하여 피조물도 함께 고통받고 탄식합니다. 사람들이 성령으로 난 사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구원에 이르면 피조물도 함께 썩어짐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환경의 보호와 생태계의 보존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생활 가운데, 가까이는 우리의 식생활의 자세를 바꿈으로써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완전한 회복과 보전은 우리의 환경개선 노력이나 환경운동가들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직 죄악 속에 탐욕과 교만 속에 있던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성령으로 난 사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때 피조세계도 함께 완전한 구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의 사람은 자기 자신을 고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향하여 자신을 개방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덧없이 사라져버릴 이땅의 잠시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합니다. 우리는 차별과 미움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포용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신음하고 인간의 건강한 삶이 위협 받는 오염된 세계가 아니라, 사람과 피조물이 함께 생명을 활짝 꽃피우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일들을 이룰 수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지혜, 세상의 경륜으로는 알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이루는 단 하나의 방법은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이 모든 일들은 사실은 성령께서 동일하게 원하시는 것이며 또 성령께서 실제로 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성령께 맡겨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겸손하게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던 제자들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주도권을 버리고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를 갈망하며 겸손히 기다리며 우리 자신을 성령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여러분, 이천년 전 그분을 대망하던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여러분들에게도 충만하게 임하시고자 합니다. 여러분에게 그리고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사랑의 공동체와 생명의 세상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역사를 갈망하고 기대하시며 겸손하게 자신을 성령께 내어드리십시오. 성령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강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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