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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의 부활(5): 신령한 몸으로의 변형 (고전 15: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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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남길 마지막 말 한 마디는?>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딱 한 마디만 한다면 어떤 말을 남기시겠습니까?
19세기의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지금 들어가야겠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9세기의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임종시 이모가
"죽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해라"라고 말하자,
"내가 언제 하나님과 싸웠는데?" 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폴레옹의 형수 엘리자베스 보나파르트가 죽을 때 누군가
"아무도 죽음만큼은 피할 수 없지."라고 말하자
"세금도 피할 수 없지."하고 유머 섞인 대꾸를 했습니다.

1601년 영국에서 순교 당한 마크 박워스도 아주 유명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게 목숨이 천 개가 있다 해도 나는 하나님을 위해 모두 바치겠다."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도 임종시 위대한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실 때였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은 아마 가장 진실한 말일 것입니다.
그 어떤 위선도 거짓도 과장도 없이 마음 속에 있는 그대로를 말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지금 당장 죽는다면 어떤 말을 남길 것입니까?
저도 곰곰 생각을 해봤지만 딱히 좋은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처럼 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신의 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한다면 어떤 형태로 부활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고전 15장에서 나타난 몸의 부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 본문 말씀이 '부활 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아니, 모든 성경 가운데에도 가장 중요하고 가장 흥미로운 주제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또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우리가 부활한다면 어떤 형태로
부활할 것인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영혼은 좋은 것이로되 육체는 나쁜 것이라는 이원론적 사고를 했기 때문에
사람이 죽은 다음에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희랍 철학의 영혼불멸설에 영향을 받아 사후에도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남지만 육체는 한 줌 흙으로 소멸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가상의 적수가 질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해서
자신이 그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아주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35절 말씀을 보세요.
일단 가상의 적수들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해서 논증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그들은 어떤 몸으로 옵니까?"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고린도 교회안에
'몸의 부활'(ANASTASIS NEKRON)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요.
그런데 이들 적대자들이 던지는 질문은 부활이 있다면 도대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 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참 중요한 질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장차 부활한다면 어떤 모양으로 부활하게 될까요?
젊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아니면 세상 떠나기 직전의 늙은 모습으로?
우리 몸에 있는 흉터는 부활하게 될 때 그냥 있을까요? 아니면 깨끗이 사라질까요?
부활했을 때 우리는 서로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전혀 알아 볼 수 없을까요?

지상에서 빚쟁이에게 시달린 분들은 부활해서 천국에서는 서로 못 알아보면 좋을 것입니다.
지상에서 자기 외모에 불만이 많은 분들은
부활만큼은 좀 더 멋진 모습으로 이루어지길 바랄 것입니다.
지상에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던 분들은
천국에서도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부활과 관련해서 이런 종류의 물음들은 참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합니다.

자, 그렇다면 바울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 말씀이 워낙 중요한 말씀이기에 한 절 한 절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여러분, 36절 말씀을 보세요.
이런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첫 마디는 "어리석은 자여!" 하고 꾸짖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문자주의'(literalism)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마가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과 더불어 부활에 대해서 논쟁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한 한 여인이 부활해서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답은 사두개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에 이와 같이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장차 부활하게 될 때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꼭 하늘의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본문에서 전개되고 있는 바울의 말씀과도 꼭 일치하고 있습니다.
몸의 부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부활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 때문에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두개인들이 부활해서도 부부관계가 지속되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던 이유가 부활을 문자 그대로 이해했던 어리석음 때문인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 역시 몸의 부활을 죽은 시체가 다시 벌떡 일어나는 것으로서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자, 몸의 부활이 죽은 시체가 다시 일어나 걸어다니거나 호흡하는 것도 아니고,
몸 없이 영혼만 떠다니는 유령도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형태로 일어날까요?

36-49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면 부활의 몸이 분명히 현재
우리의 몸과 연속성이 있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신령한 몸으로
변형된, 전혀 새롭고 영광스러운 상태로의 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제자들이 알아봤습니다.
분명히 부활 전과 부활 후에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서로 알아 볼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런가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대화를 나누시다가
저녁때가 되어서 민가에 들려 함께 저녁을 드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순식간에 예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예전과는 뭔가 다른 신령한 몸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이 예전의 육신과 연속성, 불연속성이
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처럼, 우리의 부활 역시 옛날의 몸과
분명히 연관성이 있는 동시에 전혀 다른 형태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씨앗과 열매의 비유: 씨앗 = 현재 우리의 몸, 열매 = 부활의 몸>
이제 바울 사도는 36-41절에서 자연과 관련된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하여
몸의 부활이 어떤 형태로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비유가 바로 씨앗과 열매의 비유입니다.

여러분, 씨앗과 열매는 분명히 연속성이 있지만 불연속성도 있습니다.
씨앗의 생명이 있기에 그 생명이 자라나 열매로 맺혀지는 것이 아닙니까?
사과 씨앗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사과 씨앗 한 알갱이가 땅에 심겨져 나중에 사과 열매가 되지 않습니까?
사과 씨나 사과 열매는 분명히 똑같은 사과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 형태는 다릅니다.
형태만 다른 것이 아니고 그 맛이나 성분도 다릅니다.
이것은 사과 씨앗과 사과 열매가 연속성도 있고 불연속성도 있다는 말이지요.

자,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36-41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씨앗을 뿌릴 때 지금은 씨앗이지만 나중에 열매가 될 씨앗을 뿌립니다.
그러므로 그 씨앗은 단순한 씨앗이 아니라 장차 생겨날 몸,
즉 열매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밀이든지 어떤 곡식이든지 간에 지금은 다만 씨앗을 뿌리지만 그 열매의 형태는 다릅니다.
바로 이 때문에 3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는데,
그 하나 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누구도 씨앗이 열매로 맺혀지는 과정을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장차 어떤 형태로 부활하게 될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우리 몸의 부활이 이루어질런지에 대해서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장차 우리가 어떤 형태로 몸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서
미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주제넘게 예단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이지요.
씨앗이 어떤 모습으로 열매 맺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수 때까지 기다려봐야 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부활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지에
대해서도 최후 심판 때까지 기다려봐야 합니다. 

다한 한 가지, 한 개 한 개의 씨앗 알갱이가 땅에 떨어져 나중에 각기 고유한 몸을 입어
열매가 되듯이 우리의 육체도 분명히 변형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씨앗과 열매가 전혀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유기체적 연속성이 있듯이 우리의 부활도
질적으로 전혀 다른 형태의 변형된 몸이 되겠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연속성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재 몸이 씨앗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부활해서 변형될 몸은 열매라고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씨앗과 열매에는 유기체적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다 있듯이
현재의 우리의 몸과 부활후의 우리의 몸 사이에도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다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 사도는 39-41절에서 몸의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육체는 다 똑같은 육체가 아니라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 등등 수없이 다양한 육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동물이나 식물 등의 생물의 세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자연과 우주 만물 모두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체'(天體), 즉 '하늘의 몸'이라고 부르듯이 해, 달, 별 등등 수없이 많은 몸들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장차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어
영광스런 부활을 하게 될 때 우리의 몸은 전혀 다른 몸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몸이 아닙니다.
더욱 더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이 될 것입니다.

자, 이런 유비를 통하여 바울은 몸의 영광도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늘에 속한 몸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몸들의 영광이 저마다 다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들의 영광이 별마다 각기 다릅니다.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의 네 가지 차이점>
바울은 이와 같이 다양한 몸들과 몸들의 영광을 언급한 뒤 42-44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아,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여기 보세요.
우리가 장차 부활하게 될 때의 몸은 현재의 몸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영광스럽고 거룩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몸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몸이 아닙니다.
온갖 짐승들의 몸, 새들의 몸, 물고기들의 몸, 해의 몸, 달의 몸, 별들의 몸,
등등 수없이 다양한 몸들이 있으며 그 영광도 각기 다릅니다.

부활 후의 우리의 몸도 전혀 다른 성질의 몸이 되어서 현재의 몸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형이 될 터인데, 바울 사도는 네 가지로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첫째로, '썩을 것'(perishable)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imperishable)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의 현재의 몸은 장차 썩어 없어지지만,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로, '욕된 것'(dishonorable)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glorious)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의 현재의 몸은 비천하고 욕되지만, 부활의 몸은 찬란한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약한 것'(weak)으로 심고 '강한 것'(powerful)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의 현재의 몸은 약합니다. 질그릇처럼 조금만 부딪쳐도 금방 깨지는 연약한 몸입니다.
사고도 잘 당하고 질병도 잘 걸리는, 참 약하기 짝이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주석처럼 강해서 절대로 쓰러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넷째로, '육의 몸'(physical body)으로 심고, '신령한 몸'(spiritual body)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이 네 번째 대조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대조를 다 축약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psychikon soma,' 즉 '육의 몸'입니다.
정신과 육체가 지배하는 자연적인 몸으로서 생로병사와 영욕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썩어지고 욕되고 연약하고 제한된 땅의 몸입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부활해서 변형될 몸은
'pneumatikon soma,' 즉 '영체'(靈體), '영의 몸'입니다.
부활의 몸은 육체와 정신이 우리를 지배하는 연약하고 제한된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지배하는 신령한 몸으로서
영원히 썩어 없어지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고 강한 하늘의 몸입니다. 

자, 여기에서 보면 네 가지 대조가 다 '심는 것'과 '거두는 것'으로서 표현되어 있습니다.
씨앗, 즉 알갱이가 심어져 분명히 생명의 동질성이 있지만 전혀 다른 형태
다른 성질의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지요.     

<첫 사람 아담 = 우리의 현재 몸, 둘째 사람 그리스도 = 부활의 몸>
자,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45-49절에서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그리스도를
대조시키면서 현재의 몸과 부활후의 몸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창 2: 7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생기가
아담의 코에 들어가 '생령'(生靈, psyche)이 되었습니다.
정신과 육체를 부여받은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담의 몸은 어떤 몸입니까?
썩을 몸이며, 욕된 몸이며, 약한 몸이며, 죽어 소멸될 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즉 그리스도 예수는 '살려주는 영'(pneuma),
즉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하며,
영원히 죽지 아니할,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첫 사람 아담의 몸은 땅의 몸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라면,
마지막 사람 그리스도 예수님의 몸은 하늘의 몸이며 영원히 죽지 않을 몸입니다!

자, 그런데 46절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육의 사람, 썩어 없어질 욕되고 연약한 몸을 가진 아담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영의 몸, 썩어 없어지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고
강한 부활의 몸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달리 말해, 먼저 첫 번째 사람 아담처럼 자연적인 몸, 육의 몸이 있은 다음에
마지막 아담, 즉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처럼 신령한 몸이 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순서로 보면, 우리의 현재의 육적인 몸이 먼저이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는 것이 나중이라는 뜻이지요.

47-49절 말씀을 보면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의 차이에 대해
계속해서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에 속하지만,
둘째 사람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신 주님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흙으로 빚은 아담을 닮아 흙으로 돌아가지만
장차 부활하게 될 우리의 몸은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와 같이 하늘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바라보며>
여러분, 오늘 부활에 대해서 참 중요한 말씀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부활해서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씨앗과 열매의 비유처럼 씨앗과 열매에는 분명히 유기체적 생명의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양과 성질은 다르기에 또 불연속성도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과 분명히 연관성이 있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몸으로 변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체, 즉 신령한 몸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벌써 영체, 영적인 몸, 서로 모순되는 말이 아닙니까?
영혼과 육체가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하면 영적인 몸은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까?
이것을 논리학에서는 'OXYMORON,' 즉 '모순 어법'이라고 합니다.
뭐 '침묵의 소리,' 혹은 '군중 속의 고독,' '더럽게 잘 생겼다,'
혹은 '잔인한 친절' 등이 모순어법이라고 볼 수 있지요.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이와 같은 '영체,' 즉 '영적인 몸'이라는
모순어법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분명히 몸은 몸인데 영적인, 신령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기대가 됩니까?
분명히 지금 우리의 몸과 연관되어 서로 다 알아 볼 수는 있지만
굉장히 다른 모습, 마치 천사처럼 영원히 죽지 아니할 그 어떤 몸으로 변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못 생긴 것, 키 작은 것, 뚱뚱한 것이나 주름살이나 흰머리나 그 어떤 썩을 것,
욕된 것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형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모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다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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