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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닮은 사람 (창 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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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인간을 하나님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 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신인동형론( v
����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 되었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중심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마음과 생각과 사람됨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아주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처음 창조 되었던 우리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사람됨이 참 착하고 아름다웠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인간은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함으로 상실 하였습니다. 죄가 이 땅에 들어옴으로 세상이 변하였고, 죄가 사람의 마음에 들어옴으로 사람이 변하였습니다. 살기 좋은 세상은 살기 힘든 세상으로 변하였고,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악하고 무섭고 추한 사람들로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면 그와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나타나는 열매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에 보면 그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아멘.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방언과 예언과 신유 의 은사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람 됨’과 연관이 있고, 성령의 은사는 ‘사람의 능력’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능력을 좋아합니다. 물론 능력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 됨’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열매들을 잘 살펴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말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거듭남의 구체적인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재벌 총수가 좋은 장학재단을 만들면서 만 명을 벌어 먹일 사람을 키우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큰 사업을 하는 분의 생각이 그와 같은 데 미친다고 하는 것이 참 귀한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도 꽤 훌륭하고 좋은 장학재단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다 만 명을 벌어 먹인 유능한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 대부분의 장학재단은 만 명을 벌어 먹일 능력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사람을 선발할 때 능력 위주로 선발합니다.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고 또 그렇게 선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 됨’입니다. 사람이 되지 못한 사람이 능력을 갖추게 되면 만 명을 벌어 먹일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만 명을 잡아 먹일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정말 그와 같은 장학재단들이 만 명을 벌어 먹일 사람을 키우려고 한다면 능력 위주로 사람을 선발하고 그에게 돈만 투자할 것이 아니라 능력과 함께 ‘사람 됨’을 눈여겨보고 선발을 하고 능력의 계발 뿐 아니라 ‘사람 됨’의 계발을 위해서도 투자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면에서 생각할 때 성령의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현대 사회가 사람 됨 보다 능력을 더 중시하는 것과 같이, 교회도 성령의 열매 보다는 성령의 은사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되지 않고 능력만 있는 사람이 만 명을 벌어 먹이는 사람이 되지 않고 만 명을 잡아먹는 사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열매에는 관심이 없고 성령의 은사에만 관심을 갖다보면 말이 되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성령의 역기능이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방언을 말하고 병을 고치고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믿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혹은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변하고 성격이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리 만큼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 말은 이렇게 바뀌어 져야만 합니다. “예배당은 다녀도 좀처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당이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이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은 힘이 없어도 예수님과 성령님은 힘이 있으십니다.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을 바꾸는 힘이 예수님과 성령님에게 있습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힘, 사람을 하나님 닮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구원의 능력이 예수님과 성령님에게 있는 줄 저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그냥 예배당만 다닌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성령의 은사도 없습니다. 그것은 참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는 받았는데 성령의 열매는 맺지 못한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기도도 열심히 하여서 방언의 은사도 받고 신유의 은사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맺지 못하여 여전히 그에게서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가 나지 아니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화평이 없습니다. 오래 참음이 없습니다.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없습니다. 함부로 사람을 미워합니다. 시기합니다. 무시합니다. 무례합니다. 사납습니다. 성냅니다. 이기적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짓밟습니다. 헐뜯습니다. 뒤에서 수군수군합니다. 참을 줄 모릅니다. 착하지도 않습니다. 부드럽지도 않습니다. 욕심도 많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있는데 성령의 열매는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성령의 은사는 있는데 정작 중요한 성령은 없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이 전부인 줄 알고 거기서 그침으로 정작 중요한 성령의 열매는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은사를 행하는 것을 보고 그를 성령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은사는 있는데 열매는 없는 것을 보고는 성령님도 예수님도 별 볼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은사만 받고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차라리 은사를 받지 못하여 능력이 부족하였더라면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일도 상대적으로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를 받아 방언도 하고 병도 고치고 예언도 하고,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목사도 되어 나름대로 외적인 능력을 갖추고서도 사람이 변하지 않음으로 그 능력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방언) 산을 옮길만한 능력이 있다고 하여도 사랑 즉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만 있고 열매가 없다면 그와 같은 은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되지 못하고 능력만 있는 사람이 만 명을 벌어 먹이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만 명을 잡아먹을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성령의 은사만 받은 사람들이 그 은사와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제가 참으로 은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근사함입니다.

엘리에셀을 양자 삼으려고 했던 아브라함. 물론 그의 판단은 하나님과 달랐습니다만 저는 종을 양자 삼으려고 했던 아브라함에게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종인 엘리에셀을 고향 땅으로 보내 아들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데려 오게 합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그와 같은 행동을 보면서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훌륭한 사람됨을 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은혜를 받습니다.

조카 롯에게 먼저 땅을 양보함으로 모든 사람과 평화하려고 하였던 아브라함을 보며, 그와 같은 아브라함을 남처럼 대하고 땅부터 욕심내다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 포로로 잡혀가는 롯을 구해 내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우는 아브라함을 보며 감탄합니다. 너무 근사합니다. 그 훌륭함과 근사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임을 보며 믿음의 위대함을 깨닫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단 한 말씀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용기는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훌륭하고 근사한 것입니다. 저는 은사보다 그와 같은 열매가 욕심납니다. 은사를 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기 보다는 그와 같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예수를 열심히 믿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성적으로 가장 취약한 젊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며 거절 하였던 요셉, 그 때문에 억울하게 옥에 갇혀 고생을 하면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였던 요셉,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용서하고 끌어안고 울던 요셉을 보면서, 그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를 읽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비유 중에 나오는 인물이지만, 일자리 없이 그냥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가난한 사람들 걱정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시장을 들락거리던 포도원 주인,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도 온전한 하루 품삯을 쥐어 보내는 포도원 주인을 보면서 천국을 느낍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끼게 됩니다. 너무 근사합니다. 너무 훌륭합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예수를 정말 잘 믿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저는 방언의 은사를 받고 싶은 욕심이 별로 없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고 싶은 욕심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빈손 들고 집에 들어갈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하루 종일 시장 터를 들락거리던 그 포도원 주인의 마음에는 정말 욕심이 많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어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제 사랑하는 자녀 손들이 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골리앗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나가 싸워 이기는 다윗이 좋습니다. 골리앗을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가 이름도 모르는 구시라는 사람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하던 다윗이 너무 좋습니다. 큰 사람 골리앗 앞에서도 자신을 의지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당당하고, 작은 사람 구시 앞에서도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다윗은 너무 근사한 사람입니다. 저는 예수 잘 믿어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윗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식이 보입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시고, 자신을 세 번 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도 찾아가 다시 소명을 주시는 예수님. 의인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예수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의 기록을 읽으며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가슴에 말도 못할 은혜를 받습니다. 저는 정말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과 이 설교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의 소원이 다 예수님을 닮는 것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소원이 기도가 되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서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다 우리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고, 우리가 봉사를 하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과 같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서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가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서 그리스도 예수의 느낌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삶이 마치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닮아서 사랑이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모든 갈등과 불화를 잠재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죽기 살기로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남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닮아서 좀 더 착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사나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싸움을 해도 세상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악독하게 잔인하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을 잊어버리고 악으로 악을 이기려는 버릇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우리 하나님을 닮아서 좀 더 정직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우리들이 우리 하나님을 닮아서 무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시 돋친 말, 사랑 없는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 파며,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도리어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사람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였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인간의 중심이 아닌 인간의 외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닮으면 우리의 외모도 하나님을 닮지 않겠습니까?

마음과 말과 생각과 행동과 삶이 하나님을 닮아 감으로 우리의 표정과 외모까지도 하나님을 닮아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느끼며, 보며, 읽으며, 냄새 맡을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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