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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와 세상을 향한 부활의 의미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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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 아침에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초대교회는 부활절부터 시작해서 50일 동안 ‘기쁨의 50일’ (The Great Fifty days)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부활의 기쁨은 얼마나 오래 지속됩니까? 우리에게는 부활의 기쁨이 이미 지나가버리지 않았나요? 우리는 어쩌면 부활절 계란이 우리의 뱃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부활의 기쁨도 함께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부활절 아침에 그렇게 유난스럽게 기뻐하는 것도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나의 부활 때문이 아니라, 일주일의 긴긴 고난주간이 끝나고 오는 여유로움 때문은 아닐까요? (제가 너무 과소평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부활 그 자체, 부활의 신앙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데 있습니다. 두 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부활의 기쁨이 여전히 내 안에 충만합니까?

  제가 오늘 철지난 노트를 펴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 아련한 그 부활을 다시 얘기하는 것은 그 부활이 우리의 믿음의 핵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토록 부활이 중요하다면 부활절에 한 번 부활에 대해 설교하고 끝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초대교회처럼 7주 동안 부활에 대해서 설교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2-3번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한 책들을 사기 위해서 서점에 들렀는데 저는 놀랐습니다. 부활에 대한 책은 이외로 적었습니다. 그 기독교 서점은 수 천 권의 책들로 가득했습니다. 설교, 상담, 리더십 등에 대한 책들은 수십, 수 백 권이 넘었는데 부활에 대한 책들은 책꽂이의 한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 책들은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그 모습 속에서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부활의 신앙을 보는 듯 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부활의 신앙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부활을 말하려면 죽음을 먼저 말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죽음과 함께, 죽음 이후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죽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병원의 영안실을 찾았을 때 언젠가는 나도 그 영정 사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 부모가, 내 자녀가, 내 친구가, 내 곁을 떠나갈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그 순간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축제가 열리면 죽은 이의 모습을 나무로 만들어 관에 넣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만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죽은 이의 모습을 보고 음식을 즐기면서 그들도 언제간가는 죽게 되리라고 인식했다고 합니다. 죽음을 즐겁게 받아들이게 한 것이죠. 그러나 죽음은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에서 죽음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죽음의 순간에 소멸하는 육체로부터 자유로워 천국의 축복으로 올라가게 된다.” 기독교의 부활 사상과 비슷하지만 사실은 기독교의 부활과는 거리가 먼 영혼 불멸론입니다. 죽음을 아주 좋은 것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 죽음은 어둡고 침침한 것,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고전 15:26에서 죽음을 최대의 원수요, 최후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과 희망의 근원은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에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죽지만 다시 부활하기에 기쁜 것입니다.

  죽지만 부활하는 나는 과연 언제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날까요? 다시 말하면 ‘부활의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한국교회는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견해를 견지해 왔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육체는 땅에 묻히고 썩지만 우리의 영혼은 보존되어 하늘나라에 갑니다. 그리고 2천년이든 3천년이든 우리의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주님의 재림하는 순간 우리의 썩어진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어 부활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 속에 박혀있는 철저한 부활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부활이 주님의 재림 때 이루어지고, 우리가 죽으면 영혼의 상태에 하늘나라에 거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거부하는 영혼불멸론에 다시 갇히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육체는 없고 영혼만 있는 영혼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바로 그것이 영혼불멸론입니다. 다음 기회에 다시 한 번 이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카톨릭 신학자였던 크레머는 신약성경에 세 가지 차원의 부활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세례에서 일어나는 부활, 둘째는,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 셋째는 마지막 날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세 번째 부활만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마지막 날에 완성될 완전한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두 번째,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입니다.

  만약 저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우리가 언제 부활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저는 ‘내가 죽을 때’라고 분명 말할 것입니다. 내가 죽는 그 순간 나는 주님이 입으셨던 그 신비한 영의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내가 죽어 천국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 안에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마지막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모습처럼 우리도 변화합니다.

  제가 전에 저의 부활을 의심했을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결점이 많고 흠이 많은가?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 고집이 있는가? 고치고 싶지만 얼마나 고쳐지지 않는 더러운 꼬라지가 있는가? 내가 이렇게 결점이 많은데 내가 죽는다고 어떻게 한 순간 예수님처럼 신비한 부활의 몸을 입을 수 있을까?’

그래요. 제가 염려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제가 부활의 몸을 입었는데도 나의 여전한 허물과 꼬라지가 있으면 어떡하나?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내가 부활하는 그 순간 나는 아무런 흠도 없는 주님이 입으셨던 그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예수님처럼’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천국의 파티장소에 들어섰을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걸작 품이 될 것입니다. 그 분의 예술작품이 될 것입니다. 천사들이 흠모할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토록 빚으시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작품이 완성될 것입니다. 마침내 나는 그 분의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광채 나는 얼굴로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처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죄 없는 마음. 두려움 없는 마음. 기쁨과 감격의 마음. 지칠 줄 모르는 예배의 마음. 흠이 없는 분별의 마음. 여러분은 그 예수님처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동안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주십니다. 슬픔을 주시고, 눈물을 주시고, 연단을 주시고, 그것들을 통해서 나의 것과 나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삶을 통해서 지금 저를 빚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명이 다하려는 순간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서 저를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십니다. 천국에 도달하는 순간 나는 영혼만을 가진 나의 모습이 아닌 부활한 완전한 나의 모습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나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시고, 나를 위로하시고, “내 집에 잘 왔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습니까?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십자가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믿을 수 있는데 부활하신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을 다시 파괴하고 다시 세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믿음과 희망의 내용이 단지 십자가뿐이라면 우리는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그 믿음과 희망은 우리들을 비참함과 죽음과 고난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고독과 당황스러움에 더욱 빠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 분에게는 생명만이 있을 뿐 죽음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 분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계십니다. 내가 죽는 순간, 나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더 이상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저는 준비됐어요.”라고 말합시다.

  옆에 계신 분과 인사합시다. “정말로 아름다우시네요. 제 눈이 부십니다. 그런데요 그건 흙이네요.” 이렇게만 인사하면 안 되겠죠. 다시 한 번 인사합시다. “제가 부활해서 천국에 있을 때도 저를 알아 봐 주십시오.” 

  천국이 주님과 함께 늘 하는 죽음이 없는 곳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는 지옥입니다. 지옥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옥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곳입니다. 비참한 탄식과 후회가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구원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뒤늦게야 깨닫는 곳입니다. 기회를 한 번만 더 얻을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러나 지옥은 이제 모든 기회가 끝난 곳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곳입니다. 기회가 없는 곳이기에, 소망이 없는 곳이기에 무서운 곳입니다.

  사형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부활과 내세를 믿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인 사형수가 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의아스러울 것입니다. 하늘나라 간다고 믿고 평온해 하다가도 사형집행 날이 되면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 발버둥을 치는 사형수들의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김혜원 여사가 있는데 그 분은 오랫동안 교도소에서 사형수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교화했던 사람입니다. 그 분이 쓴 책 <하루가 소중했던 사람들>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형수들이 단순히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에 대한 집착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과거를 참회하고 새롭게 눈뜬 세상이,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세상임을 알았기에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은 열망 때문이다. 난생 처음 사람다운 삶을 한 번 살아보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그들은 그렇게 살기위해 발버둥 친다.

  이제야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서 그 삶을 한 번 살기 원하지만 그 값진 인생을 살아야할 자신의 목숨이 없기에 그들은 그토록 후회하며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죄와 벌”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처형당하기 직전에 생각한다. 설혹 겨우 설 수 있는 자리밖에 없는 좁은 바위, 영원히 가시지 않을 암흑과 고독, 그리고 폭풍의 대해에 둘러싸인 그러한 바위에 선 채로 수천 년 아니, 영원한 세월 속에 파묻혀 산다 해도 그렇게 사는 것이 지금 바로 죽는 것보다 낫다. 오직 사는 것, 살아나가고 살아 내는 것- 그것이 어떤 인생인들 상관없다.

  사람은 삶을 갈구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모든 사람은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은 더더욱 갈구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만나는 그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고 단언하지 마십시오. 그는 누구보다 사는 것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사는 것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볼 때, 사람들을 볼 때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무의미한 것들로 판단하지 맙시다. ‘부자인가? 예쁜가? 직업은 무엇인가? 피부색은 무엇인가? 대학은 나왔는가?’ 이런 것들로 사람을 판단하지 맙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는 모두 무의미한 것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그 사람의 영혼에 있습니다. 그의 영원한 생명에 있습니다. 그가 구원을 얻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부활의 의미는 그것입니다. 그토록 엄청난 부활이기에, 그렇게 영원토록 지속될 부활이기에, 또는 그렇게 영원히 지속될 고통이기에, 부활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과 부활의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그 사람은 심장의 박동소리가 멈추면 예수님처럼 될 사람들입니다. 또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과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그 사람은 심장의 박동소리가 그치면 영원한 지옥에 들어설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그 영혼을 사랑해라. 그 사람을 내버려두지 말고 포기하지마라.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라. 그 영혼을 위해 슬퍼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를 나의 집으로 이끌어라. 그가 부활의 몸을 입고 나와 함께 영원토록 살게 해라. 영원히...”  (이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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