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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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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빛’이다

주님은 오늘 이 말씀을 산 위에서 많은 무리들 앞에서 특별히 제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십니다.  5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산상설교는 제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누구입니까? 제자들은 당시 가난한 어부들입니다. 바로 이 앞 4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은 학문이 없는 범인이요, 이제 갓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초년병들입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자마자 5장의 산상설교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옛날에 냉장고가 있습니까 아니면 제대로 된 방부제가 있습니까? 소금은 음식의 부패를 막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또한 음식에 간이 맞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지요, 그래서 고대 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태양과 소금’이다 말할 정도였습니다. 빛은 또 얼마나 소중합니까? 빛이 없으면 우리는 밤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옛날 시골길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깜깜한 어둠 속을 우리는 그 빛 하나 의지하고 갑니다. 밤중에 산속을 헤매다 멀리서 불빛이 보이면 우리는 안도감을 갖습니다.

그런데 바로 너희가 세상에서 이런 소중한 역할을 하는 빛과 소금 같은 존재다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을 향하여 누가 당신은 ‘이 사회의 빛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이 사회는 어두움만 가득할 것입니다’ 하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떻게 빛이야, 나같이 나약한 사람이 어떻게 소금이야 하며 손사래를 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면서도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소금입니다. 빛과 같은 존재가 되라는 호소도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빛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제자로의 부르심과 세상의 빛과는 등치 관계입니다. 세상의 빛이 아니면 제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너를 복의 근원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축복의 통로를 삼으시겠다는 뜻입니다. 너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도록 하겠다는 것이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자기라는 존재를 시시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세상이 부패하거나 어두우면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마치 여러 형제들 가운데 큰아들을 혼내듯이 말입니다.

나는 그런 능력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하여 주심으로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오늘은 오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님은 빛 중의 빛이십니다. 이 빛의 능력이 우리 가운에 부은 바 되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우리가 빛을 발하는 전제 조건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예루살렘에 머물며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까지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태양이고 우리는 마치 달과 같습니다. 달은 태양 빛을 반사하여 지구에 비춥니다. 주님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볼수록 더 밝게 비칩니다. 내 안을 깨끗하게 닦으면 닦을수록 더 환한 빛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등지고 살면 아무런 빛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욱 더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더 잘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소금과 빛은 크리스찬의 두 가지 실존을 보여줍니다. 소금은 은밀성을 말합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모든 행위는 은밀한 가운데 세상에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 합니다. 다른 또 하나의 실존은 빛입니다. 이는 드러나는 존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빛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불을 켜서 말 아래 곧 보이지 않는 곳에 두겠습니까? 등경 위에 두지요. 산위에 두기 때문에 숨기지 못합니다. 만약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이 예수 믿는 사람인지 모른다면 그것은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를 통해서건, 착학 행실을 통해서건, 아니면 여러분 얼굴에 있는 기쁨과 평화를 통해서건 여러분은 드러나고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가 빛을 비추어야 할 곳은 ‘세상’입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지 교회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거꾸로 되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는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려서 교회 안에서는 칭찬이 대단한데 세상에 나아가서는 전혀 그 빛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성도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립니다. 저도 건강한 목회, 말씀에 근거한 목회를 하자고 교회를 개척했지만 새벽기도부터 수요예배, 금요 심야, 이제는 주일오후 예배까지 일반 교회에서 하는 모든 프로그램을 그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구역예배지요. 이것도 조만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저 역시 여러분을 교회에 묶어두고 교회의 빛이 되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가 원하는 궁극적 목표가 는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의 빛이 되기보다는 사회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네 번째 비전이 사회의 빛이 되는 교회입니다. 다만 지금의 모든 프로그램과 모임은 훈련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훈련 없이 세상에 나가다가는 사회에서 다 깨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적당히 기도하고, 적당히 말씀 보며,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하다가는 세상에 나아가 백전백패합니다.

십일조를 비롯한 물질 훈련을 받지 않고 여러분이 세상에 나아가 세금을 제대로 내고 불의한 재물을 받지 않는 빛으로서의 사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는 훈련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병원이나 휴양소가 아닙니다. 물론 세상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심령이 교회에 와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주된 기능이 그것만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치유 받은 사람들이 다시 말씀으로 무장하여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에 있는 시간보다 세상에 있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많은 직분을 받고 봉사하는 것보다 하다못해 통반장을 하며 세상에서 받은  바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성도들이 많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훈련만 제대로 받은 분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와서 예배만 드려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교회의 빛이 된 사람들은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기 쉽지만 사회에서 빛이 된 사람은 교회 와서도 빛의 역할을 더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이유도 우리를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사60:22) 하나님은 우리가 위대한 빛의 사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더 강하게 훈련을 시키십니다. 일반 사병은 훈련기간이 한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교는 3 개월에서 6 개월이 걸립니다. 훈련을 강하게 받지 않으면 천 사람을 지도할 수 없습니다. 강국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 때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혹독한 환경에 두시기도 하십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연단을 받게 만들기도 하고, 비참한 가난과 외로움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또 어느 때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바로 때리시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기도 응답을 더디 이루어 주심으로 우리가 기도의 용사가 되도록 만드시기도 합니다. 이는 다 여러분을 연단시켜 세상을 먹이고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훈련의 목표는 세상입니다.

신앙생활 적당히 하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다 교회 와서 위로 받고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들 하듯이 묻혀 살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설교하고 목회하면 편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우리를 가만 놓아두질 않습니다. 말씀은 끊임없이 우리를 충동질 합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오늘 말씀은 이런 존재를 ‘맛 잃은 소금’이라고 평가합니다. 그 운명은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적당히 살라고 가르치다 이제는 한국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오히려 뭇사람들로부터 질타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교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우리 창립예배 때 이만열 교수님이 축사 때 말씀하셨던 것을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한국에 교회가 수만 개가 있는데 또 하나의 교회를 세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깊이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지 일반 교회와 다르지 않다면 세울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빛과생명 교회 이름은 ‘빛’과 ‘생명’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살리자는 뜻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 한사람 한사람이 사회에서 빛과 같은 존재, 소금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닷물은 엄청 짭니다. 그래서 소금이 아주 많이 들어가겠거니 생각했는데 바닷물 평균 농도는 3.5%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김치의 염분도 3-4%이고 아주 짠 김치라도 5%를 넘지 않습니다. 이 3.5%라는 소량의 소금이 그 큰 바다를 썩지 않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 입맛을 돋우기도 합니다. 저는 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3.5%의 소금 같은 존재, 빛 같은 존재만 있으면 그 사회는 건강합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망하는 것은 불의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의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 한국교회 교인수는 불과 20-30만에 불과했습니다. 그때 당시 인구를 2천 만으로 계산하면 불과 1-1.5%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인들은 사회와 문화, 교육과 의료, 사상계와 독립운동 등에서 중추적인 역할들을 했습니다.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입니다. 독립만세운동으로 구속된 19,525명중 3,426명이 기독교인으로 무려 17.6%에 달하고 대부분 시위 주도자들이었습니다. 여성의 경우 구속자 수 471명 중 65.6%인 309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민족을 비추는 빛이요 소금같은 존재였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 3.5%의 소금 농도만큼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 빛과생명 교회를 세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그렇다면 세상에서 우리가 발휘해야 되는 빛은 무엇입니까? 오늘 읽은 16절 말씀에서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착한 행실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고민하고 이에 대한 답을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선포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일제시대는 사회개화와 독립운동이 빛의 사명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빛처럼 소금처럼 사는 것일까 저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평화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갈등이 많습니다. 남과 북의 이념갈등 뿐만 아니라 사회 내부의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부유한 사람 20%와 그렇지 못한 80% 사이의 갈등이 있습니다. 강남은 날로 게토화되어 가고, 비강남은 박탈감을 앓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가치는 평화입니다. 어떤 신념이나 주장보다 더 앞서야 할 것이 평화입니다. 6,70년대의 주요가치가 ‘경제성장’이고 7,80년대가 ‘민주화’였다면 2천년대를 사는 우리에게 절대가치는 ‘평화’입니다. 평화가 정의요, 어떤 명분이나 정당성이 있다할지라도 폭력과 분열은 악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서로 갈등하고 화가 나 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그래서 정치권과 언론이 아주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권이 통합의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만 조장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더 문제입니다. 언론은 사회의 입입니다. 그런데 이 언론이 오히려 사회의 분열을 더 부추기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한국사회의 갈등의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들은 어느 곳을 가든지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목표는 진보나 보수의 집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세상의 이념이나 가치가 아닙니다. 바로 이 세상 안에 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인 정치의식은 하나님 말씀으로 쓸어내려야 합니다. 교회는 진보든 보수든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평화의 전당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정직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믿을만 해’ 하는 말이 좀 나왔으면 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믿는 사람이 더 해’ 하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정직이라고 할 때 저는 남이 안 볼 때도 교통신호 잘 지킵니다. 저는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하는 식의 작은 정직을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정직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정직은 자기 손해가 날 줄 알면서도 그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정직이 되었으면 합니다.

속이지 않고 세금을 제대로 내는 것입니다. 불량제품 만들지 않고 정직하게 제대로 된 제품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다보면 가끔 물건을 팔러오는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제품이라고 하며 파는데 불쌍해서 물건을 사줍니다. 그런데 그 물건을 받고나서 사용하다 보면 화가 납니다. 아무렇게나 값싸게 만들어서 조잡하고 불량품이 많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저는 기독교의 이름이 들어간 제품은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살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 거래도 깨끗해야 합니다. 빌렸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고, 갚지 못할 사정이 있으면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

셋째는 사람을 중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경제 논리가 앞서가서는 안 됩니다. 온 천하를 다 주고도 살려야 할 것은 사람입니다. 경제논리가 앞서가서는 안 됩니다. 어느 크리스찬 기업(홍성사)은 회사가 어려운데도 사람을 해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IMF 때였는데 경제도 어려운데 몰인정하게 해고할 수 없다고 하여 사장은 월급을 대폭 깎고 나머지 직원들은 조금씩 깎아서 해고를 막았다고 합니다. 그 회사는 도서출판사인데 아주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컨대 도서 재고부는 다른 곳보다 더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을 중시하는 자의 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건물 하나를 지을 때도 기독교의 정신이 들어가야 합니다. 건물은 사람이 쾌적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도록 지어야 합니다. 경제성이 앞서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이런 빛의 사명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감당하라고 하면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줍니다. 빛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기쁨이 되도록 만드십니다. 실제 그래요. 싸우는 사람보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부정직한 사람보다 정직한 사람이 더 행복하고, 사람 중심으로 일을 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빛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충분한 능력도 주십니다. 기도하면서 나가면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 항구적인 에너지원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 능력을 덧입어 모두가 빛 된 존재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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