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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창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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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 모두가 조심해야 할 병 - only for myself !

  저는 대학입학 원서 넣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원서를 넣고 오던 날, 저희 어머니께서 참 많이 우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하필이면, 꼭 저하고 닮은 우리 아버지, 아무 능력없는 조그만 교회 목사님을 남편으로 만나 20년째 고생 중이십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인가, 집에 가봤더니, 어머니가 엉엉 울고 계셔요. “엄마, 왜 울고 있어?” 그래 보니까, 저희 엄마 이가 다 빠져 버렸어요. 그 때 저희 집이 한참 어려워서 가락동 시장가서 남들이 버리 시리기 주어다 먹었던 때거든요. 모진 고생끝에 어머니 이가 다 빠진 거에요. 그래서 지금도 저희 어머니는 진짜 본인 이가 하나뿐이랍니다. 가난한 목회 생활 중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셨지만, 그 마음에 아직까지 품고계신 소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기 서 있는 큰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총신대학교 신학과에 대학원서 넣은 그날, 어머니의 눈물을 보며 의기양양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 저는 한없이 떳떳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눈물이 감사와 감격과 기쁨에 겨운 눈물인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눈물을 가득 담으로 눈으로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시던 어머니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종남아, 지난 주 토요일에 엄마가 공장에서 일하는 아가씨를 한 명 전도했어. 그런데 이 아이가 꼭 교회를 나올 것 같이 하는데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아서, 엄마가 중국집으로 데리고 갔단다. 그래서 너희들도 평생 사주지 못한 음식들, 탕수육이며, 새우튀김을 사줘가면서, 기어이 약속과 주소를 받아서, 주일날 집으로 갈테니, 문 앞에 나와 있기로 꼭꼭 약속을 했어, 하지만, 막상 주일이 되어 그 집 앞을 찾아 가봤지만, 그 아이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거야. 조급한 마음에 초인종을 누루고, ‘벧엘교회에서 왔습니다. 송인선이란 학생 집 아닌가요?’ 라고 말하자마자, 스피커에서 다짜고짜 온갖 욕설이 날아들지 않겠니? 결국 그 아이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교회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니 생각이 나더라. 엄마는 어떻게든 이 길을 가겠는데, 너도 이제부터 평생 엄마가 가는 길을 간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막 눈물이 나서 하루 종일 울었단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어머니가 제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매우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어머니가 가던 길을 위해, 신학교에 진학한다는 생각을 해본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조그만 백 명도 안 되는 교회를 섬기려고, 20살 먹은 여자 아이 하나 전도하려다 눈물을 흘리고, 이가 빠질 정도로 힘든 길을 걷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한 게 아니었어요. 저는 누구나 알아주는 큰 교회 목사님이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 일이 어렵다면, 차라리 열심히 공부해서 신학교수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는 가난과 멸시를 떨쳐 버리고 싶었습니다. 실상 신학교는 제가 성공하기에 가장 알맞은 문으로 보였고, 그래서 두드렸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10년 전 그 날 저는 도저히 어머니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은 이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일까요? 왜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는 기뻐 받으셨으면서도, 가인의 예배는 받으시지 않으셨을까요? 원문에 더 가깝게 번역을 하자면,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그 진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찰스 스펄젼과 워치만 리와 같은 대 부흥사들 이후부터 최근까지 분문은 가인이 드린 예배가 피의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흠향하시지 않았다고 해석되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는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 하나님이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오대 제사중의 하나인 소제는 곡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은 곡식의 제사도 기뻐 받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제사가 곡식을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측에 불과합니다.

아벨의 제사는 모세의 속죄제를 반영하는가?
또한 아벨의 피흘리는 제사마저도, 모세의 율법에 비추어 보면, 적절하지 못한 제사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드려진 속죄제물을 반드시 불살라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아벨이 제물을 불사른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말 성경에는 마치 아벨이 숫양의 첫 새끼 한 마리를 드린 것처럼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을 확인해 보면 아벨은 암양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드렸습니다. 이것 역시 모세의 율법에 의한 속죄제와는 사뭇 다른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제물의 종류와 그 절차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구절이 아닌 것입니다.

가인의 예배의 실체
그렇다면 왜 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굳이 모세의 율법까지 상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본문속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5절을 읽어 볼까요?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그래요.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원문은 “가인의 진노가 불타 올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불타오르는 가인의 진노는 누구를 향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불같은 진노는 자신이 방금전까지 드린 제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 드린 예배의 실체입니다. 가인은 비록 한 해동안 열심히 일한 곡식을 아름답게 장식해서 하나님께 드렸지만, 실상 그것은 하나님이 참 주인이 아니었던 제사였던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가 쌓은 단은 화려하고 값비싼 제단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목적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의 예배의 목적은 바로 가인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단을 쌓았습니다. 가인이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예배를 받으셔야했습니다. 그래야만, 그가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린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올해와 같은 결실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좋은 집 짓고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가인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이 가인의 예배를 5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이어지는 하나님과 가인의 대화속에서도 우리는 가인의 마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죄에 물들어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아시는 하나님이 친히 가인을 찾아 오셨을 때, 가인은 하나님께 절규했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이 내려졌을 때 그는 필시 몸부림치며 소리쳤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저의 죄벌이 너무 중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무거운 짐을 향한 비통한 푸념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 불평을 늘어 놓을 때가 아닙니다. 가인은 무엇보다 지금 회개해야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동생에 대한 연민 따위는 물론이고, 하나님께 대한 죄책감과 죄송함마저도 그 자국도 없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결국 가인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마음에 영혼의 눈이 깜깜하게 가리워, 회개의 눈물조차 의미없는 통곡의 눈물으로 바꾸어 버린채 가련한 인생을 이어갑니다.

무엇을, 누구를 위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왜 그 자리에 앉아계십니까? 여러분을 위해서 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아니, 전도사님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제가 저 자신을 위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오늘 가져온 십일조가 얼마인줄이나 아세요? 이번 주에도 제가 몇 시간이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는데요? 제가 저희 교회 25년 개근이올시다. 제가 전도한 숫자가 전도사님 나이보다 2배는 많을 텐데, 하나님을 위해서냐니요? 대체 그런 질문이 어디있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지금 마음속으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오늘 분명히 설교에 실패한 것입니다. 신학교에 가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일 년동안 최선을 다해 땀 흘려 결실한 소산을 하나님께 바친다 해도 그게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절규의 외침을 토해내는 일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가인의 예배와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진정 여러분을 위해서 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입니까? 이 말은 오늘 여러분이 헌금 얼마를 가졌왔냐를 묻는 말이 아닙니다.그동안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전도했는가를 묻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교회 출석 성적을 묻는 것도 아닙니다. 이 질문은 이렇게 잡다하고 외식적인 여러분의 껍데기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여러분의 근본적인 마음을 파고드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함입니까? 여러분을 위함입니까?

서머나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계시록 2장 8-10절을 보셔요. 주님이 서머나 교회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 서머나 교인들은 환란당하고 매우 궁핍한 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사람이 잡히고, 죽고 재산을 몰수당해서 사람들의 눈에는 서머나 교인들만큼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서머나 교인들의 중심이 보였습니다. 네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계시록 3장 14-18절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내가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도다하나 네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겉모습은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그 중심을 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겉모습에 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중심을 보시고, 지금도 여러분의 중심을 원하십니다.

우리 중심에서 시작되는 생사위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생사위주!의 신앙생활은 바로 오늘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는 불평과 짜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는 오직 감사와 기쁨과 평안과 사랑과 화목이 있을 뿐입니다.

  한 주간도 험하고 어지러운 세상이지만, 여러분의 걷는 걸음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길, 여러분이 들이쉬고 내쉬는 한 호흡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호흡이 되길..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여러분의 삶이 되길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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