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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난은 축복의 통로 (왕상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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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어렸을 때,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산동네 무허가 건물에서 살았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다른 집 벽과 벽 사이에, 방을 만들었다. 앞은 철제 캐비닛(cabinet)으로 막고, 위에는 검은 루핑(roofing)으로 치고, 맨 땅 위에 나무 마루를 만들어, 불도 없이 차디찬 바닥에서 살았다.

  그것도 나중에는 집들이 철거되어, 부서진 건물 아래서 몰래 살았다.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살았다. 아버지께서는 돈벌러 가셔서 오시지 않았고, 형과 누나는 친척집에 흩어져 살았다. 동네 사람들도 다 떠나고, 아무도 없었다. 이런 곳에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과 살았다.

  하루에 한끼도 먹을 수 없어, 물만 마셨다. 이처럼 가난은 고통스럽다. 눈물겹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와 가난한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찾아가, 떡 한 조각을 가져오라는 엘리야의 말에, 기가 막힌 현실을 고백한다.

  12절이다.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어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하였다.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을 키우는, 가난한 사르밧 과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두 사람이 자식을 키워도 힘이 드는데, 여인 혼자 아들을 키우기가 쉽지 않았다. 요즘이야 돈 많은 미망인들이 많지만, 그 당시만 해도 과부와 고아하면, 으레 가장 가난하고, 굶주린 소외계층의 대명사였다.

  이처럼 가난한 그녀는,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음식을 만들기 위해, 남겨둔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밖에 없었다. 가난은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그렇지만 가난 때문에, 절망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르밧 과부가 받은 축복은, 가난에서 시작되었다.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벼랑 끝에서 경험하는, 주님의 은혜의 신비다. 슬픔 속에 기쁨이, 절망 속에 희망이, 눈물 속에 웃음이, 극한 가난 속에 풍요의 씨앗이 담겨있다. 가난의 아픔 속에서 잘 반응하면,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가난을 잘 다루면 보화를 캘 수 있다. 가난 속에는 보화가 담겨 있다. 우리는 가난 속에 담긴, 풍요로움을 찾아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사르밧 과부가 경험한 축복을, 우리도 누릴 수 있을까요? 사르밧 과부의 삶을 통해, 가난을 풍요로움으로 바꾸는, 놀라운 비결을 배우시기 바란다.

1. 왜 가난해지는가?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없다. 돈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우리는 물질적인 복도 필요하다.

  월세를 낼 돈도 없으며, 자녀가 아파도 치유할 돈이 없고, 교육할 학비가 없다면, 행복한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따라서 가난이 찾아오면, 이 가난이 어디서 왔는지 살펴봐야 한다. 가난은 크게 3가지로 온다.

(1) 죄 때문에 온다.

그래서 축복의 장으로 알려진, 신명기 28장에는, 죄로 인한 저주의 내용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을 잊으면…, 결국 어려움이 닥치고 가난해진다.

①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할 때, 가난해 진다(삿3:12).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 원수를 강하게 만들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면, 원수를 강하게 만들고, 나를 약하게 만들어, 다 털리게 만드신다.

② 게으름의 죄로 가난해 진다(잠6:9-10).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자를 싫어하신다.

예수님께서도 주인이 맡겨 놓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게으른 종을, 악하다고 하셨다(마25:26).

③ 타락과 방종의 죄 때문에 가난해 진다.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하고, 쾌락에 탐닉하여 돈을 물쓰듯이 쓰거나, 땀 흘리지 않고 쉽게 부자가 되려고 도박하거나, 남을 속여 쉽게 부자가 되려고 하면, 모두 죄가 되기에 가난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면, 가난은 축복이 될 수 있다.

(2) 구조적인 가난

가난한 나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가난하다. 또한 천재지변이나, 백성을 학대하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소년소녀 가장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가난은, 죄가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난을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신다. 이런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연대의식과 공동운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축복은 사명이기에, 가진 자는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는, 복지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가난 때문에, 서로 돌아보며 사랑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망하지 않고, 함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3) 훈련의 방편이다.

사르밧(ת󰘪󰙣󰘼)이라는 히브리어는, 짜랍(ף󰙝󰘼, 제련하다, 연단하다)에서 왔다. 즉 제련, 연단, 용광로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사르밧은 불순물을 제련하는 용광로란 뜻이다.

  사르밧은 사람들의 성품을 녹이고, 아름다운 인격을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훈련장이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훈련하는 장소다. 사르밧 과부는, 게으른 여인이 아니었다. 구조적으로 가난했고, 하나님께서 훈련하시는 모델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2. 어떻게 가난을 풍요로움으로 바꿀 수 있는가?

(1)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히 여기고, 주님의 은혜를 정말 사모해야 한다. 그 당시 수많은 가난한 과부들 가운데, 사르밧 과부를 찾아오셨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녀에게 임한 증거다.

  우리는 해야할 일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 속에 축복이 임함도 하나님의 은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가난한 자들을 능히 부요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면,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셔서, 풍성한 부요를 누리게 하실 수 있다.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삼상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전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그러므로 부자는 부요함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 모든 부요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또 가난한 자들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얼마든지 부요하게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2) 은혜를 구하려면, 가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라.

가난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사르밧 과부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었다. 가난이 하나님의 통로였다.

  가난이 부요로 바뀌는 일은, 한순간에도 가능하다. 깨닫는 순간이다. 가난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보는 시각이 다르고, 해석이 다르다. 가난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가난을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가난 속에서 비전을 본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통찰력이 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며, 남과 다르게 본다. 엘리야는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자신을 먹이심을 경험했다(5-6).

  가난하지 않았다면, 경험할 수 없는 은혜다. 그래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가난을 더욱 가난하게 함으로, 부요를 경험하게 한다. 그는 부족함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임을 알았던 사람이다. 가나 혼인 잔치의 이적 또한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다.

  부족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인생은 신비다. 부족함도 축복이 될 수 있다. 문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문제로 인하여 잘 된 사람은 수없이 많다. 문제는 문제를 어떻게 다르고,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자신의 문제를 아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부족한데도 부족함을 모르면 문제다. 라디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했다(계3:17).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찾으면, 문제는 해결된다.

(3)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라.

엘리야는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듯이, 성문 주변에서 나무를 줍는 과부를 만났다(10).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온 몸에는 먼지를 뒤집어 쓴 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

  (10下)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지금 우리처럼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상황이 아니다. 기근이 몇 달되어, 물을 얻기가 쉽지 않다. 내일이면 죽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다. 나도 마실 물이 없는데,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물 좀 달라면, 쉽게 줄 수 있나?

  그러나 그 과부는 달랐다. 요청을 받는 순간, 순순히 응했다. 그녀가 물을 가지러 갈 때, 엘리야는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자 여인은 내게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 밖에 없다. 이것으로 음식 한 끼 해먹고, 내일부터는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엘리야는 한 술 더 떠, 두려워 말고,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했다(13).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통에 가루가 없어지지 않고, 그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14).

  이 약속을 믿는다면, 먼저 떡을 만들어서, 내게 가지고 오라는 말씀이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고 받아들였다. (15-16)을 보면, 저가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아마 이 여인에게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당신의 하나님을 말한다.

3. 가난을 통해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려면

(1)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일하시기 보다, 우리가 가진 것을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축복하실 때,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것으로 축복하셨다.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어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

  우리는 자신에게 없는 것 때문에 한탄하느라, 자신 안에 있는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은 모세가 처음 보인 반응은,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출4:2).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에 있던 지팡이를 통해, 이적을 베풀어주셨다. 오병이어의 이적도, 소년이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이적을 베풀어 주셨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 때에도, 물과 물을 담을 수 있는 돌 항아리를 통해 이적을 베풀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져오라고 하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는 것,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가져오라고 하신다. 그것을 드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적을 창조하신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은과 금만 우리를 부요케 만들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의 이름은 천국열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주님께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말 부요한 사람은, 지금은 비록 가난할 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소유한 사람이다.

(2) 남아 있는 작은 것을 먹지말고, 하나님께 심어라.

사르밧 과부는 아직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하나님께 심었다(12-13). 엘리야는 꼭 알아야 할 하나님의 이적의 원리를 가르쳐 주었다. 심을 씨앗과 먹을 양식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농부는 추수한 다음, 먹을 양식과 다음 해에 심을 씨앗을 구분해 두고, 이듬해에 심을 종자는 결코 먹지 않는다. 종자 씨앗을 먹어 버리는 농부가 있다면, 그는 정말 어리석은 농부다. 씨앗은 미래를 의미하기에, 그 농부에게는 미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씨와 먹을 양식을 구분해서 주신다.

  (고후9:10)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십일조는 미래를 위하여 심어야 할 씨앗이고, 십의 구는 먹어도 되는 양식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심어야 할 씨앗까지 먹어버리는 결과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라. 사르밧 과부는 두 번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다. 그러자 놀라운 이적이 나타났다. 15-16절이다.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순종하면 복받는다. 순종은 축복의 원리다. 지식만 가지고는 안 된다. 순종하면 복이 임한다.

  (신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보다 높고, 하나님의 원리는 인간의 이성보다 탁월하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이적이 나타나고 축복이 임한다.

풍성한 축복을 원한다면, 먼저 심어라.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게 된다. 사르밧 과부는 전 재산을 심었다. 하나님은 액수를 보지 않으시고, 헌신의 정도에 따라 평가하신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게 된다. 우선순위를 잊지 말라. 한 사람이 순종하면, 복의 근원이 된다. 사르밧 과부가 순종하자, 여러 사람이 복을 받았다(15).

  결론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난하게 사셨다.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다(고후8:9). 그러므로 가난하다고 슬퍼하지 말고, 기죽지 말라. 예수님께서도 가난하셨다. 가난에 머무르지 말라. 가난을 정당화하거나 선호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가 부요해서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부요를 통해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기를 원하신다.

  가난하다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고, 남아 있는 것을 양식으로 쓰지 말고, 종자로 심어라. 믿음으로 심고, 기대를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심어라. 이해되지 않아도, 말씀에 의지해서 심고, 그 후에 거두시기 바란다. 부디 씨앗을 먹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처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주신다.

극한 가난 중에도 믿음으로 순종했던 사르밧 과부처럼, 믿음의 부요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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