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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요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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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 신문에 우리나라에 관련된 몇 가지 통계가 발표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저의 관심을 끈 것은 종교인구의 변동사항이었습니다. 지난 10년 사이에 천주교인은 약 40%가 증가하였고 불교인은 약간 증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인만이 그 수가 약간 줄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갱신과 회복을 꿈꾸며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유월절 예비일에 최후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성찬식을 행하셨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는데 이 기도에는 제자들과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으로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며,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A.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1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가 됨에 있어 “우리와 같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나 되는 방식에 따라 하나가 되는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시는 방식은 각자 다른 인격과 개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 목적을 가지고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양성 가운데서의 일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도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오직 함께 하나님의 선교라는 한 목적으로 결합할 때 가능합니다. 모든 교인들이 다 같을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뭉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의 다양성과 일치라는 도식으로 교회의 일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2:4-7). 은사는 다양하지만 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이 다양한 은사들이 결합하여 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도 다양한 개성과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색깔도 다르고 삶의 가치관이 다르며 사는 모습 또한 다양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가 되려면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오직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목적 아래 뭉쳐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뭉쳐야 합니다. 분열은 마귀가 원하는 것이고 분열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없습니다. 바울의 권면처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겠습니다(엡4:3).

이탈리아 독립사에는 인상적인 세 명의 청년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마치니, 가리발디, 그리고 카보우르인데 세 명의 성격은 각각 달랐습니다. 마치니는 예언자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민중을 격려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독립에의 불을 붙였습니다. 또한 가리발디는 실행적인 사람으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독립을 원하는 자는 나를 따르라. 그러면 보상은 무엇인가? 보상은 곤고와 가난과 죽음이다”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카보우르는 중용을 걷는 사람으로서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행은 더디었으나 이탈리아를 정치적으로 통합하여 독립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세 사람은 각각 성격은 달랐지만 나라의 독립이라는 목표 아래 결합하여 큰 뜻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깊이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입니다.

B.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죽음 이후의 부활과 영생을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기쁨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도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즉 주님께서 가지셨던 기쁨이 우리에게도 충만하여 환란과 시험을 이길 수 있기를 소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기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근심할 수밖에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성도들이 지금은 볼 수 없으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1:6-8). 사도바울도 주님이 가지신 기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고난의 길에서 승리하였습니다(롬8:18).
32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도 동로마제국에서는 박해가 계속되었습니다. 리키니우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에게 우상 앞에 향불을 피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때 세바스테의 12연대 소속 40여명의 용사들은 이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총독은 그들을 돌아서게 하려고 온갖 회유와 고문을 하였으나 그들은 끝내 신앙을 지켰습니다.

총독은 드디어 그들을 추운 겨울 날,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 발가벗겨 앉혀 놓고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누구든지 살고 싶으면 기독교를 버리고 목욕물로 들어가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40명의 용사는 영광의 때가 가까운 줄 알고 더욱 기뻐하며 서로 격려하였습니다. 하지만 몸이 점점 얼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한 병사가 배교의 뜻을 알렸습니다. 이에 그들을 지키던 군사들이 그를 끌어다 목욕물에 넣었는데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퍼지더니 천사들이 아름다운 면류관을 하나씩 들고 내려와 용사들의 머리에 씌워 주었습니다. 다만 임자를 잃은 한 면류관만이 공중에 떠 있었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군사가 감동되어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얼음위에 앉아 함께 순교함으로 공중에 떠 있던 면류관의 주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쁨을 갖고 고난을 뛰어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C.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속세 도피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오직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물들지 않는 성결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디도서2:12). 여기서 바울은 성도가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 정욕을 버리고 성결하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성도와 교회의 세속화를 경계하였습니다.

조그만 개울에서 파리나 작은 벌레들이 목욕을 할 때에, 몸은 물속에 잠기지만 날개는 적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성도들이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살아도 세상에 속하지 말고 신앙의 날개만은 적시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세상에서 세속화되지 않고 거룩함을 지키려면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하여 기도하시기를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는 일에 열심히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히4:12). 이에 시편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예찬하였습니다.

D. 예수님은 우리가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명을 다했듯이 제자들도 세상에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세상에서 불러 모아낸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보냄을 받은 기관입니다. 주님의 소원대로 파송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잘 성취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의 끝에 파송을 합니다. 예배인도자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와 종으로서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계 속으로 나아갈지어다”라고 외치고 회중은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통하여 사명을 받은 뒤에 세상으로 파송을 받습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잘 감당하십시다. 요나처럼 사명을 받고 도망가지 맙시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고 도망가다가 붙잡혀 왔습니다. 그는 세상 끝으로 도망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육지를 피하여 바닷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도망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큰 어려움을 당하고 붙잡혀 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명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구하십시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들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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