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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속에 숨겨진 뜻 (삼상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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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별로 웃을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경제도, 정치도, 사회도, 가정도 불안정합니다.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도 지금처럼 어려웠을 것입니다.
환경이야 어떻든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 스코틀랜드의 ‘제이니’ 라는 학자는 항상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매일 천국을 다녀오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깃발과 같습니다. 성에 깃발이 꽂혀 있다는 것은 그 성에 왕이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마음 속에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시기에 기쁩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고, 얼굴에 웃음이 있다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의 표정을 보면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활짝 펴 있는 얼굴을 하고 계시면 “보기에 참 좋습니다” 고 인사,
굳어 있는 얼굴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얼굴 좀 펴세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외국 선교사가 한국 목사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한국의 교인들은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둡습니까? 교회 오기 전까지는 바깥에서 명랑하게 얘기하고 웃다가도 교회에 들어서기만 하면 왜 갑자기 어둡고 우울해집니까?"
목사님은 대답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국 교인들은 예배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그 선교사는 웃으면서, “그러면 그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잊어 버렸나 보군요”
하더랍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십자가도 중요하지만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기쁨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난만 묵상할 것이 아니라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 찬양할 것이 아니라 승리를 주신 주님도 기쁘게 찬양해야 합니다.
성령의 동행하심도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 속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기뻐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쁨의 내용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쓴 편지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냥 기뻐하라가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기쁨은 환경에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주님을 모신 기쁨입니다.
거듭난 기쁨입니다.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언제나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영국의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꿈을 갖고 중국 오지에 들어가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노력하면 할수록 어려움이 닥쳐와 사역이 무너지고 자신의 육체에 심한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영혼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친구 메카시에게서 편지한 장을 받습니다.
이 편지는 그냥 신실하신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신은 포도나무 가지이지,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가지가 할 일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줄기로부터 영양분을 빨아들일 때 절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

이 사실을 묵상하고 놀라운 기쁨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테일러는 용기를 얻고 진정으로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 힘을 다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후로부터 사역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포도열매를 맺기 위해서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지가 붙어 있는 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포도나무의 문제입니다. 가지는 그냥 붙어있기만 하면됩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내 맘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시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죄사함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일꾼 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아픔이 와도/ 어떤 어려움 속에도/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기쁨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런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때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셔서 자기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사사 시대를 지나면서 이스라엘은 영적인 암흑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이 왕이 되어야 하지만 백성들에게 참된 왕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습니다.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레위인까지도 심각한 범죄를 범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상은 하나님이 통치자를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연결하는 중심에 사무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고난당하는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 그녀의 남편은 엘가나라는 사람입니다.
▶ 엘가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 또는 하나님의 소유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이 사람은 레위인으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하기 위해 에브라임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정기적으로 중앙 성소에 나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엘가나는 그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했습니다.
그는 비록 두 아내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한나
한나는 은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신앙 좋은 남편이 있고 사랑을 받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자식은 하나님의 복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자식을 거느리는 것은 풍성한 축복으로 생각했습니다.
무자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 엘가나는 당시의 풍속대로 브닌나를 첩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브닌나는 자식을 낳았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한나에게는 커다란 고통입니다.
그런데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게 합니다.
성경을 보니까 브닌나를 대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수처럼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 다음에 심히 격동케 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고의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본 부인을 박박 긁었다는 겁니다.
두 가지 원인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교만입니다.
처음에는 고분고분했을 것입니다. 좋게 보이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낳고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본부인 알기를 우습게 알고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본 부인인데 .... 이런 생각을 하니까 한나가 미워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② 질투입니다.
하나님께 화목제사를 드리고 난 제물을 나눌 때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습니다.
한 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매년 그렇게 하니까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격동케 했을 것입니다.
한나가 울고 먹지 않으니까 남편이 위로해 주었습니다.
《삼상 1: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내가 당신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소? 내가 있으니 울지 마오. 그런 얘기입니다.
살다 보면 자식에게 실망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아내에게 이 구절을 외워두었다고 사용하십시오. "내가 열 아들보다 낫지 않소."

어째든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식을 낳는 부분은 한나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그녀를 사랑해주고 위로해 주었지만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녀는 울며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아들로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고난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고난을 만났을 때 솔직히 하나님께 쏟아 놓으라.

▣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사람입니다.
그는 포로 신분이었지만 궁에서 왕의 술관원으로 왕의 측근이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고국 이스라엘의 형편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예루살렘의 성벽이 훼파되고 성문이 불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울고 슬퍼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고국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울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것은 영적인 반응입니다.

일반적인 감정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고난당할 때 힘들 때는 우십시오. 화가 날 때는 화를 내십시오.
금식해야 할 일을 만나면 금식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 솔직하게 털어놓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을 속이며 스스로 위안하고 있습니다.
속에는 화가 나는데도 그렇지 않은 척 애써 자신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가짜 위안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반응과 영적인 반응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 예레미야는 참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전해야 하는 말씀은 조국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예레미야 너는 나의 일꾼이 되어라 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나의 일꾼이 되어라
그리하면 내가 어디든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복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백성들에게 가서 설교했습니다. 가르쳤습니다. 하소연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고하게 이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을 들이고 최선의 노력을 했지만 결과는 없었습니다. 실패입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싫증을 내고 피곤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수치를 주기 위해 예레미야를 성문 곁에 있는 광에 집어 넣었습니다.
야! 그만해! 우리는 더 이상 네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귀찮게 하지마
이것이 예레미야가 당하는 어려움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한다고 했는데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일을 했는데 결과가 허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에게 보여 주는 태도는 하나님 앞에 솔직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분과 느낌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일을 경험하게 될 때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처럼 솔직해 지기는 어렵습니다.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아름답고 멋있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분노와 두려움을 표현하는 기도였습니다.
《렘 20:7-10》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현대인의 성경 번역은 이렇습니다.
《렘 20:7-10》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속이시므로 내가 속임을 당했으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시므로 나를 이기셨습니다. 내가 하루종일 조롱거리가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횡포! 멸망!' 하고 부르짖게 되니 내가 주의 말씀 때문에 하루 종일 수치와 모욕을 당합니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기억하지 않고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 하면 주의 말씀이 내 속에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내 뼛속에 사무치니 내가 답답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10) 나는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 두려움이 있다! 그를 고발하자! 그를 고발하자!' 하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며 내가 신임하는 모든 친구들까지도 내가 타락하기를 바라며 `그가 유혹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가 그를 잡아 복수하자.' 하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 한나도 브닌나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울며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이 고난이 바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쳐서 아픈 마음과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 나왔습니다.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여종을 잊지 마소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고통과 아픔을 거두어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라는 뜻임

성도 여러분
좀 더 하나님 앞에 솔직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위선의 기도를 원치 않으십니다. 진실한 기도/ 마음을 털어놓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2.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과정을 이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엘가나의 집안을 택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한나의 태의 문을 닫으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브닌나의 괴롭힘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토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이라는 영적인 지도자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계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 요 5장에 보면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는 전설이 있습니다.
가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연못을 휘저어 놓는데 이때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연못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확률 0%의 38년 병자도 꼼짝 못하고 누워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자 이 병자는 대답하기를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안타까운 대답입니다.
오랜 병으로 누워있어서 안타깝고 / 눈 앞에 전능하신 예수님이 계심을 알아보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니까 확률이 전혀 없던 환자가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 눅 19장에는 삭게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리의 직업을 가지고 돈은 많이 벌었지만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야했습니다. 이 당시 삭개오는 국적을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유대인으로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언제나 내가 이 직업은 그만두어야지" 하면서도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손가락질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보고 싶었지만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만나러 여리고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소문을 듣고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나무 밑으로 지나가시면서 삭개오를 초청하십니다.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삭개오집에 들어가셔서 먹고 마실 때 주위에서는 예수를 향하여 죄인에 집에 들어갔다고 야단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실 때 삭개오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니까 분노와 한이 다 풀리고 관계의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일하십니다.
우리가 때로는 원망으로 때로는 탄식으로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기대이상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성도여러분!
나의 마음을 아플 때,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들이 가득할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고난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아주 망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너무 특별한 존재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사랑받기 위해 축복받기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나의 이 고통과 고난은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난 가운데 주님 안에서 해결함 받고 날마다 기뻐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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