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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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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2)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예수님께서 창조주시며, 참 빛이심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본문은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은혜가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말씀을 통해 복음의 놀라운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영적 무지

10절을 봅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참 빛 되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심각한 영적 무지를 발견합니다. 아무리 짙은 어두움도 빛이 비취면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참 빛이 세상에 계셨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창조주이심도 알지 못했고, 그 분이 참 빛이심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읽을 때면 마음에 안타까움이나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나타나게 하셨습니다(롬 1:20). 동물의 세계나 식물의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발견합니다.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광활한 우주를 탐색하는 사람들도 경외감에 사로잡힙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모습이나 인체의 구조에 대한 설명들을 접하게 될 때, 우리는 그 기기묘묘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비록 성경을 배우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전능하신 창조자의 손길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성과 양심을 통해서도 인간은 신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게끔 창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없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빛이 비춰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영적인 소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때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를 재미있게 시청했었습니다. 동물들의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경외감에 사로잡혀 잔잔한 은혜 가운데 젖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해설자의 설명이 은혜의 정적을 깨뜨렸습니다. 이 동물들이 진화되었다는 거예요. 그럴 때면 저는 머리를 쥐어뜯고 옷을 찢고 싶을 만큼 탄식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뻔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동물학 박사, 식물학 박사도 깨닫지 못합니다.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영적 무지는 이처럼 자연의 법칙까지 거역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빛이 어둠 한가운데 있음에도 어둠이 알지 못할 정도니 그 무지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로마서 3장 10-18절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부패해버린 인간의 사상과 사고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부패해버린 인간의 양심과 선행으로는 결코 빛에 접촉할 수 없습니다. 일생동안 영적인 무지 속에 살아가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빛 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까지 빛을 깨닫지 못한 영적 소경들이 많습니다. 우리도 오랫동안 영적인 소경으로 살아왔었습니다. 우리의 소경 되었던 시절을 기억한다면 때로 그들이 반발하며 악하게 대적해도 판단하거나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영적인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겠지요. 각자 마음에 품고 있는 태신자들이 우리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이 참 빛이심을 깨달아 함께 찬양하며 경배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접하지 않음 - 배척

11절을 봅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여기서 자기 백성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매우 특별했습니다. 자자손손 바로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걸어서 건넌가 본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일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어본 사람들도 그들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백성들도 그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의 왕이 되셔서 많은 기적들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을 만 백성 가운데 구별하시고, 거룩한 나라요,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며 구원의 주님이심만방에 나타내기 원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특별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씨 가운데서 장차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수많은 선지자들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렸던 은혜와 특권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막상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넘치도록 경험한 그들은 오히려 주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그 모든 특권을 상실한 채 나라를 잃고 2000년 동안 유리방황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끝내 배반할 때 그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은망덕으로 되갚는 것은 비단 이스라엘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인간에게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을 끊임없이 배신해 온 것이 인류의 역사였습니다. 역사를 멀리 회고할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의 삶에도 그러한  배신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구보다 많이 경험했지만 조금만 어려우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합니다. 그 동안 베풀어 주신 그 많은 은혜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감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당장 주어지지 않은 작은 것에 대해 불평합니다. 경제적으로 조금만 힘들면 하나님을 떠나 돈을 의지하여 살려는 마음을 먹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다고 변명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알아도 거역합니다. 죄의 유혹이 닥치면 하나님을 외면하고 뿌리치며 죄를 향해 달려갑니다. 기이할 정도로 쉽게 물질과 정욕의 유혹에 무릎을 꿇어버립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기보다 이 땅에 소망을 두고, 기회만 포착하면 말씀대로 살기보다 세상이 가르치는 방식대로 살려고 합니다. 교묘하게 하나님의 뜻을 피해 자기의 고집대로 행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로우시지만 인간은 언제나 교활하고 배은망덕합니다.

빛을 깨닫지 못한 것은 빛이 흐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빛의 양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많은 기독교 서적들과 방송 매체와 교회의 전도를 통해, 설교와 간증들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문제는 각자의 인간 자신에게 있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것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 밝은 빛 가운데 살기보다 어두운 가운데 숨어 살기를 원하는 죄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보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 사랑하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려는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핑계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결코 핑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계속해서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빛이 비취고 있습니다. 빛이 비취고 있으나 깨닫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심각한 영적인 무지 때문이거나, 아니면 고의적으로 빛을 피해 깊은 어둠의 동굴로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영적 무지 때문이라면 자기의 철저한 영적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도움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의 적으로 빛을 피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하나님보다 죄를 더 사랑하는 마음을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늘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지금까지는 인간의 심각한 영적 무지와 끊임없는 배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마음이 어두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12절은 이처럼 타락한 인생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타락하고 악해도 그 중에는 영접하는 소수의 사람이 꼭 있습니다. 기독교를 금지하고 탄압하는 중국이나 북한에도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욕과 멸시를 당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만 영접합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봅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단어는 '영접하다'는 것과 '믿는 다'는 것의 관계입니다. 영접하다는 동사는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행동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반면 믿는다는 동사는 현재 계속적인 행동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구분하자면 영접하는 것은 최초의 단회적인 행동을 말하고, 믿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자가 그 후 지속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두 가지를 같은 개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현재적으로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과거 어떤 시점에서든지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그는 현재적으로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동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현재의 삶에 허물과 약점이 있고 믿음이 약하여질지라도 완전히 믿음에서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을 믿다가 중단하거나 배도한 경우를 봅니다. 이것은 그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제대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 곧 진정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아니냐의 판단은 믿음의 시작에서가 아니라 믿음이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는 지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할 때, 그것은 한 번 영접함으로써 영원히 믿음으로 동행하는 삶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예수님을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권세는 힘(Power)이 아니라 권위(Authority)나 권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어떤 것을 얻는 것 이전에 근본적인 신분에 변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웃집 아이를 대할 때와 자기 아이를 대할 때의 차원이 다릅니다. 모든 아이를 좋아할지라도 좋아하는 아이들을 대하는 눈빛과 사랑하는 자식을 대하는 눈빛은 그 질이 다릅니다. 제가 그런 눈빛을 한번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 눈에서 사랑이 폭포수같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32장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기록해 두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그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든든한 빽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한 자원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실 때 그 삶은 현격하게 바뀝니다. 어둠 속을 방황하던 사람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됩니다. 인생허무와 운명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고아와 같은 소외감과 외로움에서 벗어나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원인모를 불안과 답답함과 초조함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더 이상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존재를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내 인생 내가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이기적으로 살 수밖에 없던 사람이 베풀고 나누어주는 넉넉한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저는 어릴 때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래 부잣집 자식이었는데 가난한 집에 버려졌다가 다시 원래의 부모를 찾아가는 상상입니다. 또 부잣집의 양자로 입양되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슬픈 상상이었습니다. 그 때는 가난에 대한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음식과 고급 옷에 대해 부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데서 오는 불만족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친구였던 부잣집 아이는 자주 굶으면서 아무 옷이나 대충 걸치고 살아도 전혀 불만족해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부탁만하면 좋은 옷과 음식으로 채워주실 수 있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당장은 없어도 넉넉하고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이처럼 돈에 대해서도 자유를 얻습니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 돈에 매인 삶이 아니라 돈을 다스리고 관리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는 크레디트 카드를 자녀들에게 주십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현금을 들고 다니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신용카드를 많이 사용합니다. 당장 현금이 없다고 해서 당황해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만큼만 카드로 현금을 인출해서 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만큼 필요한 때에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당장 현금이 없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펄펄 뛰면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로또 복권 1등에 당첨 된 것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복입니다.

1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서 권세를 주셨다는 말은 단번에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권세는 한번 주심으로서 결코 취소되지 않는 권세입니다. 한 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물론 자녀가 된 이후에도 잘못을 범하면 징계는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인이 형벌을 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입니다. 재판장이 죄인의 죄를 추궁하고 심판하시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이 바로 자랄 수 있도록 회초리를 때리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택한 자녀에 대한 징계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13절은 세 번의 부정적인 진술과 한번의 긍정적인 진술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자녀가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어떤 계획과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단순하게 영접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조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을 주시는 분의 사랑과 마음을 알고 감사함으로 받을 때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이처럼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정말 믿는다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분과 교제하는 삶에,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실제 삶에서 가장 든든한 빽이 되시며, 우리의 자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항상 당당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들 상호간에는 형제요 자매가 된 것입니다. 서로 아픔을 나누고 서로 사랑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도와주고 채워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영광스러운 복음입니다. 이 시간 아직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했다면 자신의 영적 무지와 고의적인 배척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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