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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 (롬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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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 / 로마서 4:1~12

요  절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속죄제물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공부하였습니다. 4장에서 바울은 구원 얻는 방식에 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행복을 누리는 복음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와 행복은 유대인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좇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누릴 수 있는 행복임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신약시대나 구약 시대나 구원을 얻는 방식은 동일하며, 오직 하나의 방식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을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로 인정받는 믿음을 덧입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 (1~5)

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바울은 3장 28절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육신으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경우는 어떠한가?'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유대인들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율법을 온전히 순종한 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행위는 완전하고, 자신의 공력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장막에 머물게 한 유일한 의인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공력을 자랑했고, 그러한 공력 때문에 자신들도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이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에 호소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 진리를 말해 주는 가장 결정적인 구절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델로 생각하지 않고 순종으로 구원받은 모델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율법을 순종함으로 아브라함의 축복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아브라함과 같이 순종하지 않더라도 아브라함의 공로 때문에 자기들은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소돔 땅에 살던 조카 롯이 전쟁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집에서 기르던 가신 318명을 데리고 단까지 추격하여 갔습니다. 야간 기습 작전으로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다메섹까지 쫓아가서 롯과 빼앗겼던 재물과 소돔성 사람들을 다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소돔 왕이 주는 뇌물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롯을 구출하고 난 후에 두려움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심신이 지쳐 있었습니다. 연합군이 언제 보복을 가해 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많은 손실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나이는 84살이 넘었는데 아직까지도 딸자식 하나 낳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주시겠다고 말만 하시고 십 년이 넘었는데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운명적인 슬픔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았는데 손해만 본 것 같아서 피해 의식이 들었습니다. 벌떼처럼 달려들 원수들을 생각하니 심히 두려웠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이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다메섹 엘리에셀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시고,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이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있던 아브라함이 언약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이 두려워서 두 번이나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먹고살기 힘들다고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하갈을 첩으로 얻기도 하고, 사라가 죽은 후에 여러 후처들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의 생애를 볼 때 많은 실수와 허물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위를 보시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인과율에 의해서라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하는 자는 자기가 받는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삯으로 여깁니다. 여러분들이 직장에 월급을 받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한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것입니다. 월급받을 때 사장님에게 감사합니까? 당연하게 여기고 오히려 적다고 불평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않고 빚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의 대가로 하나님께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삯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기는 구원받을 만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께 쓰임 받을 구석이 있어서 쓰임 받는 것처럼 착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분들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의 착한 행실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와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의로운 심정이 가득합니다. 수시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불편하게 합니다. 끊임없이 교만과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여 나오는 자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행위를 보고 의롭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는 하나님 보실 때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사 64:6). 그러므로 의를 주장할수록 하나님의 진노만 쌓을 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구절은 성경 중에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라고 역설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한 대가로 삯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은 일을 잘하고 못하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믿음만 있으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못 판단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경건치 않는 자를 심판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건치 못한 자신의 행위를 생각하며 감히 하나님께 나오지 못합니다. 이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니 당연히 죄인을 벌하시고 심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분이시요, 구원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속죄제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칭의라는 말은 법률적인 용어로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청산하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갚아야 할 채무를 주님께서 대신 갚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갚아야 할 빚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경건치 아니한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는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경건한 사람이요, 비교적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구원받을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 하나님을 믿을 때 담대히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어떻게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까? 자기 아버지는 경건치 아니한 자기를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 믿음을 보고 조건 없이 그를 영접해 주었습니다.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여기에서 의로 여기신다는 말은 의를 수여한다, 전가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죄인에게 의를 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수여하십니다. 경건치 못한 우리를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십니다. 언약의 축복에 참여하는 자로 온전히 받아들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날마다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인과응보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율법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행위를 보고 불의에 빠져서 자학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제가 심방을 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일한 것이 없어서 심히 부담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부담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 자신을 기뻐하십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음으로 주님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서 복음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행복 (6~8)

6~8절을 보십시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시편 32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대 속죄일에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근거로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알지 못했던 아브라함이나 율법을 알고 있었던 다윗이나 모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음을 증거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율법 이전이나 이후나 구원의 원리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요,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노래 잘 부르는 성악가요, 악기 잘 타는 음악가였습니다. 위대한 시인이요, 모든 부귀영화를 한 몸에 지닌 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을 신앙의 영웅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다윗은 신하들이 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동안 저녁때까지 침상에서 딩굴었습니다. 오후 늦게 일어나 옥상을 거닐다가 심히 아름다운 여자가 목욕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에 흑심이 생겨 그 여자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 여자는 전쟁에 나간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음욕이 발동하여 우리아의 아내를 궁으로 불러 간음죄를 지었습니다(삼하 11:4). 은밀히 육신의 쾌락을 즐겼는데 그만 임신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우리아 장군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그 아내와 동침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 장군은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하들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데 집에서 편안히 아내와 동침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우리아를 맹렬한 전쟁터에 보내어 살해했습니다(삼하 11:15).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할 왕이 간음죄에다 살인죄까지 더하였습니다. 우리아가 죽자 다윗은 밧세바를 궁으로 데리고 들어와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주야로 묵상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당시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 32:3,4) 다윗은 아마 죄의식을 잊기 위해 매일같이 잔치를 배설하고, 마시고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내면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다윗은 나단의 책망을 받고, 모든 죄를 토설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다윗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숨은 죄를 다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 때 다윗은 기쁨이 충만하여 시를 쓰고 그 행복을 노래했습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워진 사람은 행복하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시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7,8)

불법은 죄인 줄 알고도 범한 죄를 가리킵니다. 7절의 죄는 복수형으로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자범죄를 가리킵니다. 8절의 죄는 단수형으로 창조목적에 빗나간 본질적인 죄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죄를 사해 주시고, 덮어 주시고, 죄 없다고 주께서 인정해 주시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가 완전무결함을 말해 줍니다. 아무리 크고 중한 죄라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오기만 하면 깨끗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간음죄를 숨기려고 살인죄까지 지은 사람이라도 괜찮습니다. 일한 것이 없을지라도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죄를 자백할 때 그 믿음을 보시고 모든 죄를 사해 주십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여 주십니다. 먹보다 더 검은 죄라도 양털같이 희게 하여 주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무거운 죄 짐을 멀리 옮겨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돈 벌 궁리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젊은이는 취직하고, 예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이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모든 인간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는 결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얻어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죄의 사슬에 매여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면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젊은이는 좋은 직장을 얻고, 결혼도 했습니다. 예쁜 두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외도를 하며 거리를 방황합니다. 아무리 좋은 인간조건을 갖추어도 여호와의 손이 주야로 그 영혼을 짓누르고, 종일 신음함으로 뼈가 쇠하는 고통을 당한다면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죄 사함이 없는 곳에 진정한 행복도 없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을 다 지켜 행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십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죄를 연달아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행복을 노래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행한 것이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갈 때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십니다. 여러분이 경건치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나갈 때 예수님의 피로 주홍 같은 여러분의 죄를 가려 주시고, 먹보다 더 검은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하여 주십니다. 이 은혜를 누리는 자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죄의 은혜를 덧입을 때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 나라입니다. 다같이 찬송가 495장을 불러보겠습니다. "내 영혼의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일한 것이 없을지라도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모든 언약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사죄의 은총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Ⅲ. 의롭다 하심을 얻는 대상(9~12)

그런데 이러한 행복을 누리게 된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따라서 할례 받은 유대인들만이 의롭다 함을 받는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9, 10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은 언제 의로 여김을 받았습니까? 아브라함은 99세때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할례 받기 14년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무할례 시에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99세에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입니다. 인을 쳤다는 것은 어떤 상태나 신분을 확증하는 표시입니다. 할례는 무할례시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그 사실을 확증하는 표시에 불과합니다. 할례가 의의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세례를 받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증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처럼 할례도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표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할례가 그들로 하여금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처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 뜻이 무엇입니까? 11절 하반절과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에게도니라" 이는 모든 무할례자들이 아브라함처럼 믿으므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에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서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할례자의 조상도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무할례시에 의로 여기신 것은 아브라함을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좇는 자는 다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불신자들이든, 모태 신앙인이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열심히 봉사한다고 그것을 의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다윗과 같이 일을 아니할지라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나올 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좇아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이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습니다(요 8:56).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을 때 그 후손 가운데 오실 그리스도를 믿고 멀리서 환영하며 즐거워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장차 오실 그리스로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다윗도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실 것을 믿었습니다(행 2:31). 이처럼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이나 모두 구원을 받는 원리는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려면 오직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예수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들이 인과응보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이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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