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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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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본문/베드로전서 5:1-11

요절/베드로전서 5:2,3  "너의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여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전서는 네로 황제의 박해 시대에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보낸 위로의 편지요, 백절불굴의 용기를 심고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심어 주는 편지입니다. 그래서 용기의 서신, 나그네의 서신, 희망의 서신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때는 이미 초대교회가 개척된 지 20~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교회 구성원들의 연령층도 다양해졌습니다. 진보적인 청년들과 보수적인 나이든 성도들 사이에 긴장관계가 생겼습니다. 장로들은 권위주의에 빠지기 쉽고, 청년들은 교만하여 대적하기 쉬웠습니다. 이로 인해 질서가 무너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교회의 영적 질서 유지를 위하여 장로들과 젊은이들이 각각 힘써야 할 바가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로는 선배들이 있고 아래로는 후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배로서의 역할과 후배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영접하여 우리 교회가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1-4)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다." 장로들은 교회의 최고 어른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고 그곳에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이들에게 양무리들을 부탁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장로들은 교회를 치리하는 권위를 가진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책임 있는 지도자로 공식적으로 세움을 받은 분들을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함께 장로된 자라고 겸손히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요, 최고 연장자라고 해서 일반 장로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장로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어깨에 힘주고 대우받고자 하는 사람이 장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몸소 실천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하는 산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무엇을 명령했습니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 했습니다. 장로 중에는 가르치는 장로가 있고, 치리 장로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장로는 목사를 가리키고 이를 감독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치리하는 장로는 교회를 감독하고 봉사하는 장로입니다. 아무튼 장로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기둥과 같은 지도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최고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물고기 잡으러간 자기를 찾아오셔서 떡과 생선을 구워주신 사건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일평생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이 말씀이 베드로의 인생 요절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피로 사신 양들을 치는 것을 최고의 사명으로 여기며 장로의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장로된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 명했습니다. 영어로 보면 '하나님의 양 무리의 목자들이 되라'(Be shepherds God's flock)고 되어 있습니다. 장로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피로 사신 양들을 품고 섬기는 목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는 결코 높은 신분이 아닙니다. 더더구나 계급도 아닙니다. 장로의 직분은 바로 목자의 직분입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목자입니다. 자기 양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열매로 얻은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목자의 직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양 무리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때를 따라 영적인 양식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본에는 "그들을 잘 감독하십시오."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목자는 곧 하나님의 양 무리를 감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감독한다고 하면 높은 위치에서 감시하고 통제하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본문에 있는 대로 감독자는 섬기는 자입니다(serving as overseers). 장로들은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로 세움을 받은 자들입니다. 감독자의 개념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떠날 때 장로들을 불러 전한 고별 메시지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리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감독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양들을 돌보며 섬기는 자입니다. 양들이 위험한 곳으로 가지 않도록 감독하고, 양들의 잠자리가 어떠한지 확인하고, 병든 양들을 없는지 일일이 살피며 섬기는 사람이 감독자입니다. 양들의 형편을 살피고 그들의 필요를 일일이 채워주는 사람이 감독자입니다. 감독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로서 어떤 자세로 양들을 섬겨야 합니까?

첫째,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장로가 양무리를 치는 것을 부득이함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기꺼이(willing to) 양을 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자가 되기를 원하시는지 생각하며 자원함으로 양을 쳐야 합니다.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로서 봉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자의 직분은 겉으로 볼 때는 쉽고 고상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양들을 칠 때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섬겼습니다(행 20:19).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일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습니다. 양을 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요, 하나님의 뜻임을 깊이 영접하고 자원함으로 쳐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이 주님께서 피로 사신 양 무리를 돌보는 것임을 깊이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일 평생 기꺼이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양을 치는 것입니다. 장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쳐야 합니다. 사랑은 부득이함으로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된 사람만이 주님께서 피로 사신 양 무리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칠 수 있습니다(고후 5:14).

둘째, 즐거운 뜻으로 양을 쳐야 합니다.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양을 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양을 치는 목적이 순수하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돈을 바라는 탐욕으로 양을 쳐서 안 되고, 양들을 섬기는 그 자체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양을 많이 쳐서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그는 더러운 이를 위하여 양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친다면 그는 삯군이지 목자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삯군은 삯을 얻기 위하여 양을 치는 것입니다. 양이 목적이 아니라 돈 버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리가 오거나 맹수가 달려들면 양을 버려 두고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선한 목자는 즐거운 뜻으로 양을 칩니다. 양을 섬기는 그 자체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간절한 소원으로 주님의 양들을 치는 것입니다. 양을 섬기는 그 자체가 행복이 되고 즐거움이 됩니다. 이처럼 오직 즐거운 뜻으로 양을 섬기는 분들은 지치지 않습니다. 꾸준하게 양을 치고 섬깁니다.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에 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캠퍼스에 들어가지 않아도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서 그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양들을 섬기기 때문에 양을 칠수록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게 됩니다. 올해는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3) 장로들은 나이도 많고 신앙 경륜도 많습니다. 그 동안 교회에서 봉사하고 쌓아놓은 업적도 많습니다. 또 교회를 위해서 헌금도 많이 하고 희생도 많이 했습니다. 개척기부터 섬기던 분들은 개척 조상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도 있습니다. 그래서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기 쉽습니다. 주장한다는 말은 지배하고(lording over) 주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맡기운 자들을 종 부리듯이 하는 것이 주장하는 자세입니다. 장로들은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양들은 앞서가는 목자를 따라갑니다. 목자가 먼저 앞서 가면 양 무리들이 안심하고 따라갑니다. 양들은 개척 정신이 없습니다.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는 양들에게 모든 면에서 앞서가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 양들이 따라갈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면에서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 받는 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장로의 직무를 감당하고자 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삶 가운데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힘썼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참여하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했습니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믿음의 본을 남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본을 남긴 사람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에 순종하는 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지시하시는 땅으로 갔습니다. 이삭은 약속하신 땅에 믿음으로 우거하는 믿음의 본을 남겼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백 배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열두 지파를 축복하는 본을 남겼습니다. 다윗은 범죄하였을 때 회개하고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예를 남겼습니다.

박사무엘 선교사님은 러시아 양들을 치는 본이 되고 있습니다. 유사무엘 선교사님은 대학교수의 직분보다 선교사의 직분을 귀히 여기는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안마태우스 선교사님은 게릴라식 제자양성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계명 센타에 남아 있는 5가정을 생각할 때 너무 고맙고 하나님 앞에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의 역사입니다. 아무리 충성해도 떠나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게 하시고,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역사가 오랫동안 침체되고 힘든 가운데서도 이안드레아 목자님은 변함없이 양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대구에서도 하혜정 목자님은 개혁의 와중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양을 치고 제자 양성을 하는 본이 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금식하며 기도하며 양들을 섬기는 목자의 심정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큰 은혜가 됩니다.

이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뜻으로, 양 무리의 본이 될 때 어떤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 목자장이라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목자 대장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자장은 대장이라는 개념보다 목자는 목자인데 가장 권위 있는 목자, 목자의 보범이 되는 목자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목자로서 완벽한 삶을 사신 선한 목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양 무리를 위해 고난을 감당한 목자들에게는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다고 약속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얻고 믿음의 경주를 다 달린 사명자는 의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영광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이는 목자의 삶에는 그만큼 많은 고난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생명을 잉태하는 고통은 큽니다. 영적인 생명을 잉태하는 일과 양육하는 일도 그에 못지 않게 큽니다. 그래서 바울은 해산의 수고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많이 겪은 목자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것이 가장 큰 상급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최고의 상급입니다. 목자장 되시는 주님께서 주실 면류관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5-11)

베드로는 "젊은 자들아," 하면서 이제 젊은이들에게 부탁합니다. 베드로는 젊은이들에 필요한 덕목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장로들에게 순복하라(5).

"젊은 자들아, 이와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장로들이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않고 본을 보이는 반면에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장로들을 elder라고 하지 않고 older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안수 받은 장로가 아니라 믿음의 선배들을 가리킵니다. 젊은이들은 혈기가 많습니다. 의욕이 강합니다. 이론적인 것은 많이 알고 있으나 경험이 부족합니다. 이상주의적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이해하는 깊이가 부족합니다. 이런 눈으로 선배들을 보면 믿음이 없는 것 같고, 하는 일이 다 시원찮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선배들을 무시하고 자기가 하면 몇 배 더 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믿음의 선배들에게 순종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진리에 근본적으로 어긋나지 않는다면 선배들의 경험과 지혜를 인정하고 순복해야 합니다.

둘째,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5b,6)

5b절을 보십시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당시 이방 세계에서는 겸손은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곧 무능과 비굴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미덕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겸손이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대적하십니다.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그렇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디를 가나 겉으로는 무시를 당하나 속으로는 존경을 받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반면에 젊은이들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작은 일을 해 놓고도 마음이 하늘처럼 높아집니다. 조금 알면서도 다 아는 것처럼 큰소리칩니다. 아래위도 없이 자기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또 젊은이들은 서로 잘났다고 합니다.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그 길에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고 심히 다투었습니다. 경쟁심에 사로잡혀 누가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을 건지 서열을 따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가 으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겸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6)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권능의 손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을 믿고 그 아래에서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못한다면 겸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때가 되면 반드시 높여 주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끝까지 인내하며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보장이 없다면 억울한 대우를 받으면서 겸손하기 어렵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 아래에서 겸손했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갔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권능의 팔을 의지하여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보디발의 처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높이셨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온갖 쓰라린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겸손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높아지려고 하면 낮추시고 낮아지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높여 주십니다. 올해는 마음에 돋아나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의 키를 잡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운명이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달려 있음을 믿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염려를 주께 맡기라(7).

7절을 보십시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젊은이들에게는 염려가 많습니다. 염려라는 말은 마음이 갈라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염려하면 우리 마음이 갈라져서 한 곳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특히 염려는 우리의 신앙을 갉아먹는 생쥐와 같습니다. 젊은이들 중에는 장래에 대한 염려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염려하기 시작하면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의 염려가 해결되면 또 다른 염려가 생깁니다. 성적으로 염려하고, 구직으로 염려하고, 결혼문제로 염려하고, 직장 생활 문제로 염려합니다. 자녀 양육 문제로 염려합니다. 그러므로 염려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던져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염려한다고 키를 한 자나 키울 수 있습니까? 염려한다고 안 될 일이 되겠습니까? 염려하면 될 일도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고 했습니다. 염려할 일이 생기더라도 아무 일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넷째, 근신하라 깨어라(8-11).

8절을 보십시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근신하라는 말은 절제하라(be self controlled)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혈기가 왕성해서 절제하기 어렵습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절제할 수 없습니다. 먹는 것을 절제하고 노는 것을 절제하고 말하는 것도 절제해야 합니다. 또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자기 힘을 의지하여 신앙 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또 자기를 믿기 때문에 방심하기 쉽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여 마귀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까?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쉴 줄을 모릅니다. 우는 사자는 배고픈 사자입니다. 사자는 수풀 속에 자기 모습을 감추고 먹이감에게 최대한으로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리고 갑자기 공격합니다. 특히 짐승의 목을 물고 늘어져 놓지 않습니다. 짐승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의 공격을 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수 대적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 없이 조용히 접근하여 치명적인 약점을 물고 늘어집니다. 그래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숨통이 막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깨어있지 못했을 때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한 뼈아픈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베드로에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눅 22:3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베드로는 깨어서 기도해야 할 때 졸고 방심하다가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나온 후에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평생 동안 새벽마다 일어나 눈물로 그리스도를 배반한 죄를 회개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의 가장 큰 무기는 의심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고, 하나님의 종의 사랑을 의심케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에게 양보하거나 타협해서 안됩니다. 마귀는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믿음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자 할 때 현실적으로 많은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은 세상에 있는 형제들이 함께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고 있는 이 고난은 잠깐 동안만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필요를 넘치게 채워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잠깐 고난을 받은 우리를 친히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을 온전하게 해 주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반석과 같이 굳게 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강하게 연단하십니다. 기초를 튼튼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잠깐 동안 고난을 받을 뿐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기쁨으로 고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선배들은 후배들의 신앙적인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삶의 영역 속에 본을 보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양 무리를 치되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움으로 치고 범사에 양 무리의 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젊은이들은 선배들에게 순복하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함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갈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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