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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건강하고 균형잡힌 교회를 위해서(3) : 열정적으로 살라 (마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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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으로 살라(마태복음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오늘은 건강한 그리스도인, 건강한 교회의 세번째 주제 "열정적 영성으로 살라." 입니다. 우리에게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있는 사람 주위에는 열정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열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열정적 영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본 뱀장사, 약장사들은 그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이단 종교 지도자, 이단 종교에 헌신한 사람들은 얼마나 뜨거운 열정으로 봉사하는지 모릅니다. 세일즈맨, 또는 세일즈우먼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서 얼마나 뜨거운 열정으로 방문하고 인내심을 갖고 설득하는 줄 모릅니다. 한결같이 열정이 뜨겁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주위에 가짜, 또는 사이비, 또는 어떤 물건, 또는 다른 동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열정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열정을 비교해봅시다. 우리는 얼마큼 열정적으로 삽니까? 우리의 영성은 얼마큼 열정적입니까?

열정은 영어로 "passion"이라고 하는데, 패션 속에는 고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고통을 느낄 정도로 일할 때 열정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낄 때 열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덜 가진 분들, 연약 분들을 위해서 적은 물질로라도 구제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고난을 이해하면서 같이 아파할 때 열정을 갖고 구제사역에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픔이 없이 다른 동기 때문에 한다면, 그것은 열정이 아니라 탐욕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생명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픔을 느낀다면 복음 전도의 열정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에 대해서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전도는 또다른 탐욕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상급을 받기 위해서 전도한다거나, 또는 벌받기 싫어서 전도하게 되는 이기적 동기가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것은 열정이 아니고, 탐욕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픔을 느낄 때 열정이 생깁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와 직장에 있는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패션, 열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지 않고 무정하게 일을 한다면 열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열정은 "in God", "하나님 안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열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열정은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통해서 일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일하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된 것, 거기에서 열정이 나옵니다. 그래서 열정은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성을 이야기할 때, 종교개혁가의 영성, 칼빈의 영성, 또는 에라스무스의 영성, 또는 신학자 칼 바르트의 영성, 또는 헨리 나우웬의 영성, 또는 한국 교회사에서 한경직 목사의 영성 등등,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참된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성령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 들어갈 때 참된 열정과 헌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헌신입니다. 전폭적인 헌신입니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것이 열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열정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뿐만 아니고, 직장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어느 곳에서 일하든지간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일하는 그 열정이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에서는 열심히 봉사하는데 가정과 사회에서는 냉냉하다, 또는 열정적이지 않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가정에서는 열심히 하는데 교회와 직장에서 열정적이지 않고, 직장에서는 열심히 하는데 가정과 교회에서 열정적이지 않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열정은 교회와 직장과 가정에서 골고루 실천되어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정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나의 몸을 바치겠다는 헌신이 바로 열정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생명의 제물로 드리라, 생활의 제물로 드리라. 너희 생활 가운데서 너희 몸을 드리라, 전폭적으로 너희 목숨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온 몸으로, 열정적으로 예배할 때 그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과 뜻이 구별되어지거나 분리되어져서 따로따로 예배 드려진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예배요 육체적인 예배입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어 전폭적으로 열정적으로 하나님께 드릴 때,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열정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열정적 영성은 내가 만들어 내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부어주시는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바로 건강한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으로, 그 열정으로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그런 열정이 우리 속에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열정이 있는 곳에는 감격이 있고, 열정이 있는 곳에는 뜨거운 눈물이 있습니다. 열정이 있는 곳에는 감동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이 우리의 가정과 직장, 교회에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감동이 가정에서만 있다면, 이런 감동이 직장에서만 있다면, 이런 감동이 교회에서만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도 이러한 뜨거운 감동과 눈물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정, 직장, 교회는 이런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 열정이 바로 영성이고, 영성이 바로 열정입니다.

우리의 열정, 우리의 헌신은 바리새인의 열정보다 더 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의였습니다. 그들은 상과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하여 율법을 철저하고도 꼼꼼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의는, 그리스도인의 열정은 그들의 의보다, 그들의 열정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열정이 그들의 열정보다 못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정 또는 열심, 믿음의 분량을 측량할 때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척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바리새인의 척도와 비슷합니다. 예를 든다면, 예수님을 얼마나 오랫 동안 믿었는가, 즉 시간의 길이에 따라서 믿음의 분량을 이야기합니다. 전통적으로 오래 믿은 사람의 믿음이 크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지식의 양이 믿음의 분량을 재는 척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예배에 얼마나 많이 참석하는가, 출석의 횟수로 믿음을 계산할 수도 있습니다. 또 교회 활동에 얼마나 자주 참여하는가, 얼마나 바쁜가, 이것이 믿음의 척도일 수도 있습니다. 담임 목사에게 얼마큼 잘 복종하는가, 복종이 믿음의 척도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또 신앙체험을 얼마큼 많이 했는가, 영적인 체험을 얼마나 많이 자주 했는가, 또는 사역을 얼마큼 잘하는가, 영적 재능, 또는 영적 기술이 많은가, 또는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헌금의 액수가 믿음의 액수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척도는 외형적인 척도일 뿐입니다. 이러한 척도는 나무의 잎사귀에 불과합니다.

건강한 나무가 건강한 열매를 맺습니다. 뿌리와 줄기가 썩었음에도 불구하고 잎사귀가 무성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나무는 죽은 나무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진실하며, 우리의 영성이 열정적이며, 우리의 영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님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 건강한 열매를 맺는다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은 없는데 겉만 무성하면 죽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본질입니다. 영성의 뿌리요 영성의 줄기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신실하게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영적 성숙, 진정한 의미의 열정적 영성을 측량하는 몇가지 척도가 있습니다.

첫째,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얼마나 미워하는가", 악을 미워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우리가 외적인 잎사귀에 해당되는 것은 무성하지만, 속에, 보이지 않은 곳에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악과 동조하고 악을 사랑한다면 그 영성은 죽은 것입니다. 악한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열정적 영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거짓입니다. 율법적이요 위선적인 믿음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영성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잘 전하는가, 이것도 영성입니다. 우리는 백화점과 시장에서 좋은 물건을 찾았을 때,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 합니다. "어느 시장에 가서 좋은 물건 하나 샀어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열정이 없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열정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저도 듣기에 부담스런 질문이지만, 우리의 영성 회복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복음을 얼마나 전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몇번 소개했습니까?" "지난 주간에 백화점과 시장에서 구입한 좋은 물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주 소개했습니까? 자랑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자랑하고 있는 물건 중 어떤 것이 더 귀합니까?" 귀한 것을 소개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열정적 영성을 측량하는 척도가 됩니다.

넷째, "새로운 것을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영성입니다. "나는 배우지 않겠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지만 배우지는 않겠다는 마음"은 바리새인적 마음입니다. 바리새인의 영성입니다. 바리새인은 배우기를 거부합니다. 오직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배우기를 거부하고 가르치려고만 한다면 우리의 영성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에 활력이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점점 화석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배우는 마음은 겸손입니다.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유연한가, 얼마나 마음이 평화로운가, 얼마나 만족하는가, 얼마나 단순하게 사는가, 얼마나 기쁜가, 그것이 바로 열정적 영성의 척도입니다.

우리가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본질을 회복할 때, 그 본질 속에서 나오는 결과와 열매가 건강합니다. 우리가 건강한 그리스도인,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런 믿음의 영성, 영성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배출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캠퍼스에서 건강한 활동을 할 때 캠퍼스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건강한 활동을 할 때 사회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교회는 캠퍼스의 희망이요, 직장의 희망이요, 가정의 희망이요, 사회의 희망이요, 나라의 희망이요, 이 세상의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열정적 영성을 보는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바울의 자기 고백입니다. 바울은 사역 초기에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나오듯이 자기의 사도권을 변증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배우지 못했습니다. 단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도들, 또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역 초기에는 자기의 사도권을 변증하는 표현이 많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이렇게 자기의 사도권을 주장합니다. 그로부터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서 자기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에 내가 사도로 부름받는 것이 부담스럽다,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로부터 8년 후, 바울은 에베소서 3장 8절에서 자기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모든 성도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중에, 그 보다도 더 작은 나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은 풍성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성도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합니다. 또 그로부터 몇년 후 바울의 생애가 끝마칠 무렵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왕괴수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의 영성을 객관적으로 봅시다. 실제적으로 바울이 처음에는 사도 중에 사도요 일등 사도였다가, 7년 후에 사도 중에 꼴찌 사도가 되었다가, 또 8년 후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성도보다 더 못난 성도가 되었다가, 죽을 때쯤 되어서는 죄인 중의 왕괴수로 타락하고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바울은 더 거룩해졌습니다. 더 그리스도와 가까워졌습니다. 더 성령님의 능력 안에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보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의 성품을 더 닮아가려고 애썼습니다. 더욱더 하나님 안에, 더욱더 예수님 안에, 더욱더 성령님 안에 거했습니다. 그럴수록 자기 자신을 바라보니, 처음에는 사도 중에 사도였다가, 나중에 "아,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로구나."는 자기 발견을 하게 되고, 또 한참 후에 "아, 나는 모든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성도구나."라는 자기 발견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아, 사실 내가 괴수요 죄인 중에 내가 왕 괴수구나."라는 자기 발견을 하고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바울의 고백이 반대로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음에 교회에 출석한 다음에 "아,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못났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몇년 후에 "아, 나는 거룩한 성도입니다. 의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또 몇년 후에 "나, 서리집사 되었습니다.", 또 몇년 후에 "나, 안수집사 되었습니다." 또 몇년 후에 "나, 장립집사 되었습니다. 또 몇년 후에 "나, 권사요 장로입니다."라고 했다가, 얼마 지나서는 "나, 나야말로 우리 교회의 일등 성도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우리 교회에 나 같은 사도 어디 있습니까?" 그러다가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야 말로 바리새적 영성입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 갈수록 성장이 멈추고 시간이 갈수록 전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성을 훼손시킵니다.

고든 맥도날드라는 신학자요, 작가요,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이 "열정적 영성의 불을 끄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행동없는 말입니다. 행동은 없고 말이 많은 것입니다. 이것이 열정적 영성의 불꽃을 끈다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목적 없이 바쁜 삶입니다. 의미 없이 목적 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 일 중독, 일 그 자체를 위해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 이것도 열정적 영성의 불을 끕니다. 세번째는 안식일이 없는 달력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안식하지 않고, 그저 살기에 급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람도 열정적 영성의 불꽃을 끕니다. 네번째는 서로 양육하지 않은 관계입니다. 인간관계, 성도관계, 친구관계에서 서로 양육이 없는 경우입니다. 서로 이용하거나 서로 가르치려 하고 서로 영적인 양육이 없을 때 영적인 불을 끄게 됩니다. 그리고 다섯번째는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남만 돌보는 생활입니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남만 돌보는 것도 자기 의일 수 있습니다. 또는 문제를 회피하는 겁니다. 자기에게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보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남만 돌볼 때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탈진하게 됩니다. 이것이 열정적 영성의 불꽃을 끄는 행위가 됩니다. 그리고 여섯번째는 영적 은사가 없는 재능입니다. 재능과 기술은 있지만, 영적인 은사를 사용하지 않은 경우, 이것도 열정적 영성의 불꽃을 끄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일곱번째는 영성없는 신학입니다. 신학은 있지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영성이 없을 때 그 신학이 교회를 살리지 못합니다. 교회를 죽이게 됩니다. 영성없는 신학도 열정적 영성의 불을 끕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열정적 영성의 불꽃을 끄트리는 생활을 해왔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서도 계속 열정적 영성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바리새인의 영성에 빠지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크고 더 나아야 합니다.

열정적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열정적 영성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스스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 묵상입니다. "나는 이번 주 말씀 묵상했는가, 기도했는가, 묵상하며 어떤 체험을 했는가, 나는 말씀 속에서 기쁨과 희망과 만족을 누렸는가,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깨우쳐 주시며, 지시하시며 꾸중하시는 것을 들었는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가"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하십시오. 이것이 영성의 기초입니다. 영성의 샘물입니다. 이 영성이 없이 껍데기만 있게 되면 곤란합니다.

두번째는 거룩입니다. "나는 이번 주 어떤 유혹을 받았는가, 그 유혹을 어떻게 이겼는가, 내가 그 유혹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내가 얼마나 거룩해지려고 노력했는가" 질문하십시오.

세번째는 영적 은사입니다. "나는 이번 주에 영적 은사를 얼마큼 사용했는가, 성령의 열매를 얼마큼 맺었는가" 질문하십시오. "나는 오래 전에 영적 은사를 사용했다, 영적 체험을 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합시다. "나도 과거에는 참 잘 나갔지."라는 얘기도 그만합시다. 10년 전 이야기도 이제 그만 합시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번 주, 오늘, 지난 주에 내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했는가, 영적 은사를 사용했는가" 이 질문을 끊임없이 하십시오.

네번째, 사회정의도 열정적 영성에 포함됩니다. "내가 이 나라와 사회의 평화를 위하여 무슨 일을 했는가, 사회 현장 속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가" 그것도 열정적 영성입니다.

다섯번째, 복음 전도입니다. "나는 지난 주일에, 이번 주에 누구에게 몇 명에게 몇 번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는가" 이것도 나의 열정을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질문을 자주 합시다. 질문할 때마다 부담이되고 괴로울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열정적 영성을 회복하고,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열정적 영성이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 흘러 넘쳐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모두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만 거룩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 봉사만 열심히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정과 직장에서도 거룩하며 바로 그곳에서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일은 열심히 하면서도 직장일은 지긋지긋해하면서 언제 끝나나, 이 지긋지긋한 직장생활 언제 그만두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열정에 문제가 생긴겁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 성령님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능력과 힘으로 열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동료들이 상사들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내 일처럼 한다. 열정을 갖고 직장 생활을 한다. 목숨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교회에서는 열심히 목숨을 걸고 봉사하는데, 집에서는 왜 그렇게 나태한지, 직장 생활을 왜 이렇게 게을리 하는지" 그런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열정의 균형을 상실한 것입니다. 또는 "직장에서는 열심히 하는데, 가정에서는 왜 그렇게 나태한지, 왜 교회에서는 손님처럼 살아가는지"라는 말 또한 열정적 영성의 균형 상실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열정은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함께 흘러 넘쳐야 합니다. 모든 일이 다 거룩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교회봉사도 열심히 하고, 직장생활도 열심히 하고, 가정의 봉사도 열심히 합시다. 우리 모두가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열정적으로 일한다는 말을 듣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약속하고 서로 격려합시다. "교회 생활 열정적으로 합시다!" "대학생활 열정적으로 합시다!" "직장생활 열정적으로 합시다!" "가정생활 열정적으로 합시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열정을 회복합시다. 열정으로 살아갑시다. 그래서 교회와 가정과 대학과 직장이 함께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건강은, 우리 가정의 건강은, 우리 대학의 건강은, 우리 직장의 건강은, 우리 사회의 건강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우리가 열정적으로 살 때 그만큼 큰 기쁨과 보상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열정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능력과 힘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들에게 힘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주신 힘으로 교회와 사회와 가정과 대학과 직장을 열정적으로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김아브라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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