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족하는 삶 (빌 4:10-13)

by 잡초 posted Jul 0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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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습니까?
삶의 질의 행복을 묻는 질문에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느정도 긍정적인 답을 갖고 있을까요? 2006년 3월 29일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질에 대한 통계을 발표한 기록이 있습니다. 세계경제협력개발기구 나라를 30개국 가운데 우리나라의 삶의 질은 26위로 나타났습니다. 100점을 기준했을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질은 66.88로 나타났습니다. 학점으로 말을 하면 거의 낙제점에 가까운 점수입니다.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우리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삶에 만족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답은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나의 삶 나의 인생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의 한 면모를 철을 따라 이동하는 오리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혹한을 피해 오리는 남으로 이동합니다. 모든 이동준비를 마친 오리들은 늦은 가을 저녁 파티를 합니다 큰 농장에 모여 곡식으로 잔뜩 배를 불리며 다음 날에 펼쳐질 대이동을 위해 힘을 축적합니다. 이윽고 출발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때 이미 곡식에 한창 맛이 들린 살찐 오리 한 마리가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직 맛있는 곡식들이 많이 남았으니 나는 조금 더 먹고 뒤따라 갈테야“ 이윽고 다른 동료들은 다 먼길을 떠났습니다. 그 오리는 하루만 더 머물면서 영양을 섭취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루가 지났지만 남아있는 곡식을 보면서 하루만 더,하루만 더, 결국 며칠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하루를 연기하다가 결국 어느날 눈보라가 천지를 뒤덮고 말았습니다 .오리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길을 떠나기 위해 비상을 시도하지만 불행하게도 더 이상 날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오리는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해서 날을 수 없을 정도로 살이 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오리는 한번 날아보지도 못하고 비참히 얼어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조그만 더’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아닌가? 하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본문의 사도바울은 자신의 삶에 만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지금 상황은 로마 감옥안에 있었고 많은 고난의 연속이고 장래에도 또한 죽음이 기다릴 수 있는 정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나는 자족한다” 감사의 삶 만족의 삶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1. 자족하기 위해서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자족하는 삶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먼저 내부의 영혼의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주안에서 영혼의 기쁨으로 삶에 자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의 삶에서 내가 주안에서 기쁨을 확인하는 때가 언제일까요? 바울은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한 기쁨을 경험할때였습니다.
10절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엿으나 기회가 없었으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주안에서 크게 기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빌립보성도들이 바울을 다시 생각하여 준 것에 대한 고마움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성도들은 로마감옥에 잇는 바울에게 선물을 보내주었습니다. 바울은 그 선물 때문이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준 그 마음이 너무 기뻤습니다. 빌립보 성도들과 바울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그 마음 배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신 것으로 알고 주안에서 기뻐합니다.

어떻게 보면 감옥안에서 바울이 받은 “위로”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작은 것 속에 위로를 받았고 그것으로 기뻐합니다. 그 작은 것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주님께서 역사하여 주신 것으로 믿엇기 때문입니다. 주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관계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주안에서 그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주안에서 기쁨의 삶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감사할 것들이 많습니다.
나를 기억하여 주는 사람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나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주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하여 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나를 위해서 편지를 써주는 사람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나를 위해서 전화를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나에게 좋은 위로의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우리 속에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삶이 잇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번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에 내가 어려움에 처햇졋을때 나를 기억하고 바울을 돕던 빌립보교회성도들처럼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실제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어려움에 처할 때 분명히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 안에서 마음을 나누는 좋은 친구가 있을때 얼마나 삶이 행복한지 모릅니다. 바울과 빌립보교인들간에 나눈 이 마음의 나눔 속에 갖은 좋은 우정의 관계를 보면 헌신의 희생이 있을때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자기들 생명같은 물질을 바울을 위해서 내어주었습니다. 자기들도 가난한데 고난의 바울을 위해서 기쁨을 위해서 자원하여 희생하면서 헌신하여 주었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 참행복 참 만족은 나를 위해서 희생하여 주는 사람을 만날때입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주안에서 영적인 좋은 친구로 서로에게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짜 우정 진짜 만남의 축복은 주안에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정과 사랑은 고난을 만나보면 더욱 알 수 있습니다.고난을 통과하다보면 내 곁에서 정말 나를 위하여 주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거의 결정이 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같지만 고난을 당하여보면 우리를 도와주고 함께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가까웠던 사람들도 고난을 당하면 오히려 떠나고 맙니다. 바울의 경우에도 감옥에 갇히자 많은 주변의 사람들이 바울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는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바울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여 주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감옥 안에서 이런 희생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의 배려와 도움이 없었다면 얼마나 낙심이 되고 마음이 힘들었을까요? 오늘 우리의 삶에 물질보다도 정말 비극은 내 곁에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는 것처럼 비극이 없고 아름다운 신앙을 나눌 친구가 없는 것이 비극입니다. 바울은 주안에서 이런 관계의 기쁨을 감사하면서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 있었지만 주님 안에서 사랑의 나눔을 하는 교회가 있기에 감사했습니다. 자기를 기억하여 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눈물대신 기쁨을 절망대신에 감사하였습니다. 바울같이 영적인 교제와 나눔이 있는 좋은 믿음의 관계가 있는 만남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났던 실화입니다.
미국의 어떤 마을에서 두 친구가 같은 날 전쟁에 징집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친구가 같은 부대에 배치되어 같은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수색정찰을 나갔던 한 친구가 적진에서 고립되어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아군 참호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친구는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참호에서 빠져 나와 친구에게 달려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부대원들과 분대장을 그를 말렸습니다. “ 가면 안돼 이미 때는 늦었어 너가지 죽어”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분대장의 눈의 피해서 참호를 빠져나와 그 친구가 쓰러져 있는 곳을 향해 갔습니다. 그리고 쓰러진 친구를 들쳐업고 참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친구를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분대장이 그에게 화를 내면서 “그것보라고 내가 늦었다고 말하지 않앗나” 자네까지 죽을 뻔했잖아“ 라고 하자 그는 분대장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분대장님 그렇지만 제가 이 친구에게 다가갔을때 이 친구는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제 친구가 저에게 뭐라고 그랫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그랫나”
"내친구는 헐떡이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친구야 나는 네가 올줄 알았어“
오늘 우리 인생길에 이런 좋은 친구를 만나고 교제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 속에서 이런 좋은 만남의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나는 이런 친구가 없어요 라고 하시는 분들은 먼저 우리의 영원한 친구되신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족의 삶 오직 주 님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자족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에 올바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바울이 당한 환경은 너무나도 힘든 환경입니다.
만약에 환경만을 바라보았다면 바울은 자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환경은 조금도 감사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12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이 환경을 어떻게 대하고 해석합니까?
비천의 환경에 처할때에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풍부의 환경에 처할때에는 풍부에 처할 줄로 알았습니다.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라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때에 다양한 환경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매사가 순풍에 돛달 듯이 좋은 환경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당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비천의 환경 궁핍한 환경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업이 망할수 있고 질병으로 큰 어려움도 당하는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어려움 환경에 처할 때가 문제입니다.
이런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족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어려운 환경을 바라보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그 힘든 환경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40년동안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환경을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길이 왜 이렇게 험하느냐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으면서도 왜 이렇게 맛이 없느냐고 원망했습니다. 왜 고기를 주지 않느냐고 원망했습니다. 매사에 환경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지도자 모세는 백성들과 달리 원망하면서 불평하면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음식 먹었습니다. 같이 목마르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하엿고 불평하였고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믿음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다수를 하나님은 광야에서 죽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경을 말씀합니다.고전10:11에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합니다.

오늘 바울이 당한 환경을 바라본다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어렵고 힘이 듭니다. 지금 바울은 숱한 고생을 하다가 지금 감옥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환경 가운데 자족하고 감사합니다 .
오늘 여러분이 당한 환경은 어떻습니까?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환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억울을 만나서 남모르는 마음에 상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삶의 환경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바울처럼 부정적이고 어려운 환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이 환경 앞에서 우리가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은 부정적인 환경인 비천의 환경이든 궁핍한 환경이든 그 환경 앞에서 자족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바울이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환경을 통해서 자족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환경을 통해서도 가르치십니다. 고난의 환경을 통해서 고난을 가르치십니다. 비천한 환경을 통해서 비천을 가르치십니다. 순종의 환경을 통해서 순종을 가르치십니다. 바울은 환경을 통해서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한 환경에서는 비천한 삶을 배웠습니다. 억울한 환경에서는 억울한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순종의 환경에서는 순종하는 삶을 배웠습니다.

종종 우리 주변에 보면 자족하는 것을 배우지 못해서 낭패를 당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새로운 꿈을 갖고 도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어진 삶의 현실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많은 경우에 자족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있다면 바로 우리들의 욕심과 탐욕입니다.
제가 요즘 강릉시내를 다니다보면 좋은 건물들이 법원딱지가 붙어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아마도 대부분 무리하게 투자하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입니다. 자기 돈없이 남의 돈으로 자기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자기 것없이 남의 것을 쉽게 벌려고 하는 것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보면 욕심장이 강아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욕심이 아주 많은 강아지 한 마리가 맛있는 뼈다귀를 입에 물고 시냇물 나무다리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다리 중간 정도를 지나가다가 문득 물아래를 보았는데 거기에 강아지 한 마리가 먹음직스러운 뼈다귀를 입에 물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강아지는 순간 물속에 비친 그 강아지의 뼈다귀가 욕심이 나서 빼앗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지르며 물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멍멍 위협하였습니다. 그런데 순간 입에 물고 있던 자기 뼈다귀는 물속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물속에 비친 강아지는 바로 자기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강아지처럼 우리 인간들은 내가 가진 것에 자족하고 감사하기보다는 자꾸 남이 가진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족하지 못하고 더 더 갖기를 욕심을 부립니다.

얼마전에 제자훈련20주년 기념페스티발에 참석하여 간증을 한 이랜드 회장인 박성수 장로님의 간증이 기억이 납니다. 자기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닮은 제자 50명을 키우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어차피 돈은 이땅 떠날 때 가지고 가지 못하지만 이땅에서 남긴 주님의 귀한 사람을 남기면 천국에서 만나고 주님께 참된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역사 중에 모든 미국인들의 생활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1923년 어느날 시카고에 있는 에드워드 비치호텔에서 그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라고 하던 7명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어느 정도 부자였는가 하면 그들의 모든 재산을 합치면 미국 전체의 국고를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 기자가 시카고에 모였던 그날로 시작해서 정확히 25년이 지난 후의 그들의 생애가 어떻게 되었는가 추적하여 발표를 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던 강철회사 사장 챨스 슈업은 25년 후에 무일푼의 거지가 되어 죽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인 알써카튼은 밀농사로 거부가 되었는데 그 역시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쓸쓸하게 고독한 가운데 혼자 임종을 맞이하고 죽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인 리챠트 휘트니는 뉴욕은행의 총재엿지만 자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이 잘못되어서 감옥에서 고독하게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네 번째 사람인 앨버트 홀이라는 사람은 미국의 재무장관까지 지냇지만 감옥에서 풀려나와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사람 웰스프리트의 회장이던 J.C 리버모아는 인생의 끝을 자살로 마쳤다고 합니다.
여섯 번째 국제은행 총재이던 리온프레이져 역시 자살로 인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일곱 번째 이반 크루컬은 자살 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부가 허무한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삶에서 땅에 것들을 너무 욕심부리자 말고 자족하시고 하늘의 것을 더욱 구하고 찾으며 살아가시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자족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의 삶은 자족의 삶이었습니다. 감사의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기쁨의 삶 인내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족할 수 없는 가운데 자족했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 가운데 감사했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데 기뻐했습니다. 인내할 수 없는데서 인내했습니다. 어떻데 보면 바울의 삶은 초인간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바울에게 능력을 주신 분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바울에게 능력을 주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인격적인 영이십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승리할 수있도록 도우시는 우리의 보혜사이십니다.
바울에게 능력을 주신 그 성령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님이 능력을 주시면 환경을 이깁니다. 성령님이 능력을 주시면 궁핍한 환경에서도 승리하는 삶을 삽니다. 성령님이 능력을 주시면 감옥 안에서도 기뻐하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의지를 붙잡아주시고 감정을 지켜주시고 그 생각을 붙들어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이땅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한계가 있는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가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써야 할 많은 땅의 것들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성령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의 승리를 위해서 먼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성령의 능력을 받는 시작은 먼저 성령님께 자족에 대한 자원하는 마음을 사모하고 소원해야 합니다.바울을 보십시오. 고전9장에 가보면 복음을 위하여 그는 자원하여 자족하는 삶을 살기로 복종하면서 자기를 내려놓습니다. 사도로서 바울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자족하기로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됩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합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약하게 됩니다. 약한 사람들을 얻고자 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상황에 따라서 약한 자도 되고 율법아래 있는 자들같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모든 삶에 자족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땅의 삶에서 자족하면서 사는 것은 오직 하늘에 만족을 두고 하나님을 만족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중세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 가운데는 두 종류의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그분의 복을 경험했고 신앙을 갖는 것이기에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동기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의 신앙이 그 차원에서 머무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그런 조건적인 차원에서 시작되었더라도 하나님을 조건없이 사랑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여자를 사귈때에는 조건을 따집니다. “저 여자와 내가 결혼하면 행복할 수 잇을 것”이라고 하는 판단하면서 조건을 따집니다. 그때는 학력도 따지고 외모도 따지고 돈도 따지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살다보면 조건이 없는 인격적인 사랑이 싹떠갑니다. 어느 정도 살다보면 상대방의 단점도 문제도 그냥 수용하고 넘어갑니다. ‘그냥 모든 것을 수용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 자족하는 곳에 감사와 자유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 매일의 삶의 환경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역사를 나타내시면서 승리하시면서 살아가시를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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