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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구할 것인가? (눅 1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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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주일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기도 잘하라 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면 잘하는 겁니까. 그랬더니 골로새서에 딱 두 가지를 요약해서 우리한테 얘기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주시는데 첫째로 간구하는 것을 받을 기도를 하려면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그렇게 돼있습니다. 감사 없는 기도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 할 때는 깨어있어라. 깨어있는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신다.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두 가지를 우리가 지키고 나면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으려고 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찾고 얻을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부모님께 뭔가 간구할 때 부모님의 은덕에 감사하며 간구합니까? 아니면 많이 베푼데 불구하고 감사 없이 그냥 칭얼거리며 간구합니까? 어느 쪽이 좋습니까. 인지상정으로 베품이 적었던지 컸던지 진실로 감사하여 간구하면 어느 부모인들 그 간구에 대해서 거부할 부모가 있겠습니까? 

오늘 이 뜻 가지고 구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지금 호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돌판 두 개를 얻었습니다. 한쪽에는 일 계명부터 사계명까지 쓴 십계명. 또한 돌 판에는 오 계명부터 십계명까지 쓴 계명 두 개를 얻어가지고 내려가려고 하는데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너희 백성을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식민지를 끝내고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땅까지 인도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출애굽을 시켜서 감사가 하늘을 충천했는데 지금 광야에서 목이 좀 마르다고, 낮에 너무 뜨겁다고 밤에는 너무 춥다고, 불평불만이 많아서 감사한 마음은 고사하고 나 하나님을 뒤로 버리고 하나님 대신 금붙이를 모아다가 금송아지를 만들고 금송아지를 예배하고 섬기고 있으니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이 백성은 쓸모가 없음으로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얼마나 진노가 컸는지 모세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청원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이런 약속을 주셨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모든 후손들에게 축복하여 자손의 축복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약속된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겠다는 약속은 어쩌시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 감사하고 깨어있는 상태로 간구를 하였습니다. 약속을 하고 하나님한테 답을 얻어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시는 이런 진노를 내리지 않겠다. 나한테 감사하고 깨어있어 간구 하는 한.’ 그리고 하나님이 재앙을 거두시고 진노를 바라던 뜻을 돌이키셔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다고 모세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 재밌는 사실은 모세의 직접 단판식의 간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가슴을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나도 감사하여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감격은 하늘을 진동 시켰을 겁니다. 그 감사의 진동이 제가 보기에는 홍해바다를 갈라 놨다고 생각합니다. 감사가 하늘에 충천하고 바다를 가르고 땅을 적시면 감사에 대한 대응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은혜를 풍족히 부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주십니다.

지금도 그렇게 합니다. 인간에게서 감사가 없으면 감사대신 분노. 분노가 가득하면 하나님 대신 우리가 필요한 하나님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 속에 있는 이기주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들면 하나님은 상품이 됩니다. 우리의 허한 감정 때문에 우리의 허를 채우려고 신을 만들면 그 신은 우상이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저희들을 만드신 하나님이신데 거꾸로 감사 없는 분노는 반드시 우리 스스로 신을 만들게 되어있습니다. 수많은 우리의 사상의 역사, 이념의 역사 가운데 신이 누구냐? 하면 사람이 만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신을 만들자,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우리가 만든 금송아지한테 절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없는 자식들은 부모가 살아있지만 부모대신 자기의 일상적 직업적 필요에 의해서 부모 비슷한 또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부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또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부모인양 때로는 절 할 수 있습니다. 왜 자식과 부모간의 사이가 나쁘고 갈등이 생깁니까? 기본적인 감사가 부모와 자식을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없는 분노가 쌓이면 자식들은 분명히 또 다른 부모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때 감사가 없을 때는 부모님께 간구 할 때도 깨어서 합리적으로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부모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깨어있지 않는 상태에서 뭘 말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간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한테 기도를 들으실 때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란 말씀은 나한테 진실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라. 우상을 만들고 우상에 기도하듯이 나한테 하지마라 나는 그런 우상이 아니니라. 깨어 있어라. 깨어있어서 아프면 아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있는 그대로 고백하여라. 네 있는 모습 그대로 간구 하여라. 그러면 내가 듣고 싶다. 감사의 마음을 듣고 싶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감사가 없었습니다. 오늘 모세는 감사가 없는 이스라엘에 우상이 만들어진걸 보았습니다. 산에서 내려와서 우상을 다 불에 태우고 완전히 녹인 다음 금가루를 물에 섞어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마시게 했다고 출애굽기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어찌되었던 간에 감사가 없으면 우상이 생깁니다. 그래 놓고 그 우상에게 절한들 간구한들 들어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기도는 그런 우상에게 하지 말고 살아있는 하나님께 하라. 살아있다는 말은 항상 감사가 넘쳐야 된다. 감사를 찾는 자식에게 감사를 찾는 우리 인간에게 부모와 하나님은 분명히 또 다른 응답을 해주십니다. 저는 가정의 달, 가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고 싶을 때는 깨어 있을 때, 감사 하는 일 우리 해 봅시다. 언젠가 제가 이런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 사람들이 오는데 공항에 내리면서 부터 제일 먼저 보이는 게 뭐냐니까 한국사람 너무 부지런하다. 빠르다. 바쁘다. 눈알이 총총하다. 세상의 무한 경쟁에 가장 익숙한 백성 중에 하나가 한국 사람이다. 참 기분 좋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경쟁이 심합니다. 입시경쟁, 집안 가꾸는 경쟁, 운전부터 걷는 것부터, 심지어 쉬는 것도 경쟁하듯 쉰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의 얼굴에 비친 또 하나의 특징은 너무 경쟁이 심하다보니 얼굴마다 웃음은 없고 여유는 없고 분노가 가득 찬 얼굴들, 분노를 띄고 막 걸어 다닙니다. 이것이 너무 잘 못 봤는지 모르지만 남들에게 그렇게 보였다면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 속에는 감사가 모자랍니다. 분노를 어떻게 발산 하느냐. 분노를 웃음으로 발산하느냐 그게 아니고 분노는 분노대로 발산 합니다. 작은 폭력, 큰 폭력 첨단예의 대결 화해와 대화가 없는 대결, 극과 극의 대결. 이것은 분노의 표출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학교도 엉망이었던 시절 분위기가 나빴던 시절 대학캠퍼스마다 학생의 분노, 당국의 분노가 겹쳐가지고 총장실, 학장실, 이사장실 등을 점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분노의 계절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대학 캠퍼스, 직장마다 옛날과 다름없이 분노의 표출이 있습니다. 감사가 빠진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택에서 미군기지 이전 문제 가지고 집단적 분노의 표출이 되고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우리도 강해졌는데 우리도 세계를 끌어안고 살만한데 과거의 상념이나 이념이나 체제 때문에 우린 여전히 똑같은 언어로 똑같은 폭력의 악순환으로 똑같은 극한적 대결로 오늘 우리의 사회를 눈앞에서 보고가고 있습니다. 분노의 계절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예루살렘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예루살렘 성밖에 죽으신 다음 부활하셔서 복음을 전하시던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한테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온 유대 지방에 다니면서 내 복음이 전파하게 하여라. 거기서 증인이 되어라. 내 약속이 있는 명령이니라. 동시에 이 복음은 죽었다가 부활하여 새로운 생애를 만드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만드신 예루살렘 사마리아 온 유대 땅에 묶일 수는 없다. 세상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고 부활의 복음이 전파하게 하여라. 그 덕분에 오늘 경동 교회가 생겼습니다. 지금 지나고 나니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예루살렘 온 유대 땅, 하나님의 선민이 사는 유대 땅. 왜 그 땅에서 복음이 세계각지로 뻗어나게 하지 않으시고 그 땅은 달랑 묶어 두시고 모든 선교사와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루살렘 유대 땅을 벗어나서 이방지역이라 이름 하는 딴 데로 향했으며 당시 이방지역 중에 전 세계를 감싸고 있던 당시 지방권에 속했던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까? 우연의 일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복음을 전 세계 만방에 펼쳐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고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모세와 한 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들만 선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만의 여호와 하나님이고 다른 민족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만 선민입니다.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백성인건 확실하나, 우리 만, 나만, 폐쇄 된 민족주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끼리는 문제가 없었으나 만민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그런 폐쇄 된 공간에 묶일 수 없습니다. 그 공간을 놔두고 다른 매체를 하나님이 활용 하셨습니다. 그 매체가 로마입니다.

혹시 우리 가정이 폐쇄된 공간이면 하나님의 복음은 저희 공간을 뛰어 넘습니다. 나만 구원받겠다고 하면 저는 구원 받을 수 있으나 가족은 구원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 공간을 넘어섭니다. 우리 가정만이 성도의 가정이라고 생각하시면 하나님은 그 가정은 버리지는 않으나 그 가정의 테두리를 넘어서 다른 가정으로 옮아갑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저도 구원하지만 이스라엘도 구원하지만 온 백성을 구원하는 세계적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은 그래서 이스라엘을 자기의 복음에 전파 도구로 삼는 것을 포기하시고 로마라는 도구를 새롭게 사용하셨습니다. 로마가 얼마나 좋으냐를 말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복음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를 그때그때 쓰십니다.

저는 오늘 21세기에 우리가 왜 하나님께서 강한 이스라엘을 벗어나서 대국을 통해서 복음을 통했는지 잘 살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복음 전파의 도구로 개방적이고 포괄성을 보였던들 여전히 예루살렘이 복음전파의 센터였을 겁니다. 오늘 이 땅에 로마제국이 누구냐고 물으면 역사적으로는 북미대륙이나 유럽이나 우리도 그중 하나에 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강한 나라, 지혜가 넘치는 나라, 생명의 축복이 넘치는 나라라고 생각하면 전 세계를 끌어안고 때로는 갈등하지만 화해하고 함께 사는 지혜를 발휘하는 나라이어야 합니다. 이런 눈으로 한번 대학의 문제, 노사의 문제, 평택의 문제 다 바라봅시다. 진실로 강하게 사는 방법은 함께 어울려 사는 것입니다. 세월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면 변한대로 우리는 분노를 분노로 폭발시키는 악순환이 아니라 분노를 관용과 생명과 강함으로 삼켜 버릴 줄 아는 지혜와 용기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대로 우리는 강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강할 수 있습니까? 오늘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계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는 부모가 있느냐? 사랑하는 자식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없지 않느냐? 하물며 하나님이 달라고 하는 것과 정반대의 독약이 든 선물을 줄 리가 있느냐? 하나님은 절대 그런 하나님 아니다. 믿어라.

오늘 마지막 말씀입니다. 여러 사랑하는 부모 여러분 가정에서 자식들이 무언가 간구할 때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서 주듯이, 하나님도 간구할 때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서 주십니다.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장 좋은 것은 ‘성령‘ 이랬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성령받기를 원하는 데요 성령 진심으로 받으십시오. 사랑하는 자식들이 보기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 중 가장 중요한게 뭔지 아십니까? 제가 제 힘으로 설 수 있게 해주신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은혜 그게 부모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식 기를 때 무슨 선물을 주시려고 합니까.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라. 그걸 위해서 투자도하고 격려도하고 위로도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 이렇게 말하십니다. 오늘 저희들은 최고의 능력을 갖고 싶습니다. 자식들이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능력을 부여 받으면 감사하다고 얘기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그렇고 우리 자신도 그렇고 이젠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한 가지만 간구합시다. 능력을 주십시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때론 얻던지 못 얻던지 스스로 설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우리 가정도 그렇게 주십시오. 이 나라도 제발 편협한 이데올로기와 체제에 빠져서 고로한 민족 얘기하지 말고 세계를 끌어안는 민족이 되게 능력을 좀 부어 주십시오. 만물에게 줄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면 이 나라도 강한 나라가 되겠습니다. 저도 강한 사람 되겠습니다. 하나님 저의 강한 지혜와 강한 신앙과 강한 희망을 갖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의 성령. 그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 성령. 사랑하는 여러분 풍만하게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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