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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청해야 할 주님의 말씀 (눅 16: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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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비유를 통해서 의미 있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결산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그러자 청지기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이 뭔지를 알았다. 이렇게 하면 내가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겠지."  그리고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일일이 불러서는 기름 백 말 빚진 자에게는 채무증서에 오십 말이라고 쓰게 하고, 밀 백 석 빚진 자에게는 팔십 석이라 쓰게 하는 식으로 빚을 다 깎아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의 재산을 축내가면서 자기가 인심 쓰고는 자기가 주인집에서 쫓겨났을 때에 자기의 덕을 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하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 청지기가 비록 불의한 방법이긴 하지만 어려워질 자기의 앞날을 대비함에 있어서는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고 칭찬했다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9-13).

  우리는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으로부터 재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 어떤 재물에 대해서도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있는 재물이나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의 참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저 그 관리를 위탁받은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크든 작든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을 하나님을 향하여 의롭고 정직하게 관리하며, 사람들을 향하여 선하고 유익하고 덕스럽게 사용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재물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실상 그 가치와 의미가 그다지 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이야기 속에서 재물은 "큰 것", "참된 것"에 대비되어 "지극히 작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정말 크고 중요한 것, 재물의 사용과 관리를 통해서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은 "영원한 처소"이며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짧은 이 세상에서 헛되고 분수에 넘치는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영원히 복된 하나님의 나라를 잊어버리는 어리석은 청지기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치질서의 혼돈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일 뿐인 재물을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 인생의 전부인양 착각함으로써 재물을 하나님만큼이나 사랑하여 두 주인을 섬기려한다거나,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여 주인에게 해고당하고 쫓겨나는 청지기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직전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하나님 섬김에 사용해야할 터인데, 하나님을 재물 섬김에 이용하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재물이 신앙인의 영적 삶 속에서 비록 지극히 작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소홀히 하거나 무시해버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눅16:10)고 했듯이 재물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벌며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신앙의 한 면모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충성됨의 잣대이며, 보다 더 큰 하나님나라 일꾼으로서의 가능성의 척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반드시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결산을 해야 할 때가 있으며, 그 때는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의 청지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며 지내다가 갑자기 주인으로부터 결산을 요구받고 그 직책과 권리를 빼앗기고 빈손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지위나 재물이나 생명은 언제 우리에게서 사라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일순간에 빼앗길 수 있는 그 덧없는 것들을 위해 그토록 꾀를 부리고 부정을 저지르며, 그것도 선량한 타인에게 피해와 고통과 희생을 안겨주면서, 삶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러한 모든 가르침이 담긴 예수님의 비유말씀을 다 들은 바리새인들이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오늘 본문 첫 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것 자체를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기 위해서 돈을 좋아한다면 나쁠 것 없습니다.  돈을 좋아하기는 해도 돈이라는 것이 언제든지 바람처럼, 안개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임을 알고, 돈을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잘 알아서, 있을 때 선한 일에 아낌없이 쓸 줄 안다면 조금도 탓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돈을 좋아한다면 오히려 칭찬받을 일입니다.  돈을 좋아하되 그 돈으로 자기가 영원히 거할 하늘나라의 처소를 확실히 예비하게 된다면 슬기로운 자라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돈을 좋아해도 결코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지는 않으며 허락된 돈으로 교회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 충성된 청지기가 될 수 있다면 훌륭한 사람인 것입니다.  무작정 돈을 탐하지 않으며, 돈이 적으나 많으나 인색하지도 않고 낭비하지도 않으며 언제나 적절히 다스리고 사용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 돈을 좋아한다면 의로운 사람이라 불릴만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비웃었다면 그들은 아주 잘못된 물질관을 가진 자들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대꾸가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15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며 높임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들어다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은 거짓된 자들이며, 따라서 거짓되면서 사람 중에 높임을 받으려는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부(富)를 율법을 잘 지키는 데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잘 지키는 자라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부해 보여야 했을 것입니다.  또 부한 티를 내기 위해서는 사람들 앞에서 구제하는 행위를 보여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니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고 또 맨 가난한 무리들 하고만 밀려다니는 예수님을 그들은 우습게 여기고 있었을 것이며 그가 재물에 관하여 하시는 영적인 교훈 같은 것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웃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특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하신 말씀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재물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 대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로운 보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구제를 행하며 그래서 높임을 받는 그들의 위선과 그들의 사고의 근본적인 잘못을 정면으로 비판하신 것입니다.  의로운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곧 재물이라는 생각 자체도 잘못이지만, 그들이 스스로를 의롭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도 거짓되고 위선적인 일이며, 그러기 위하여 돈을 좋아하는 것조차도 가증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비웃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은 그들의 물질관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바리새인들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셨습니다.  그 근본적인 문제란 바리새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율법이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율법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문제 삼으신 것입니다.  16절을 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사실은 제대로 지키지도 않으면서 율법만 잘 지키면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대안으로 복음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여전히 율법만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 이전까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세례 요한이 외쳤듯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언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기쁜 구원의 소식을 갖고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전하는 복음은 모든 율법과 선지서보다 더 우월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를 애썼지만 이제는 사람마다 새 구원의 길인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복음의 시대인데 죽이는 문자로서의 율법을 붙들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비웃고 있다니 될 법이나 한 일이냐는 질책인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과의 관계에 있어서 율법의 참 의미를 가르쳐주시고 거짓과 위선으로 그 율법의 문자에 매달려 있는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신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곧바로 율법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게 될지 모르는 오해를 예방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잘못되었다거나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이해와 해석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17절의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하신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율법은 복음에 의해 조명되고 재해석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내버릴 물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오직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7-19) 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옛날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 중 한 가지를 예로 들어 복음의 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그 계명이 폐하여지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에 의해 더 온전하게 강화됨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그것이 18절 말씀입니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바리새인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들의 물질관에 있었고, 둘째는 보다 근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그들을 율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 속에 가두어놓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거짓과 위선이 깨어질 계기가 주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을 바리새들과 같이 되지 않게 해 주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안다는 것은 세례 요한까지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킨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율법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이루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하신 예언과 약속을 완성하실 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누구나 택해야 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그를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를 성경과 모든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게 해주는 열쇠로 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말씀을 우리가 경청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문제로부터 재물을 다루는 일상의 삶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순종하며 따라야 할 스승이요 주님으로 그를 굳게 믿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나 잘못된 이해 때문에도 또 천박한 물질관 때문에도 주님의 가르침을 비웃으며 사는 바리새인과 같은 불쌍한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의 말씀을 경청하며 바른 물질적 가치관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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