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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축되고 고독한 순간, 우리는 삶의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왕상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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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람들은 누구나 살다보면 어려운 순간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나를 도울 자는 아무도 없고 나만 홀로 외롭고 절대 고독 속에 처해있는 이와 같은 아픈 상처 한 가운데 놓여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때 정말 내가 처해있는 삶의 상황이 그러한가? 혹은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을 뿐인가?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진실을 바라보는 것인데 삶의 진실은 내가 느끼는 것과 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내 앞에 놓인 현상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앞에 똑같은 현상이 주어져도 그것을 기쁨이다 해석하면 기쁨일 수 있고 슬픔이다 해석하면 슬픔일 수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기쁨과 은혜로 주신 상황을 우리는 엉뚱하게 슬픔과 고통이요 고독과 좌절이라고 생각하여 그 가운데 외롭고 위축된 순간을 가질 때도 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롭고 위축되고 고독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 속에 진실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선지자 엘리야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기사입니다. 엘리야의 마지막 부분의 기사를 통해서 엘리야가 그의 삶을 바르게 판독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삶에 위축과 외소된 순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어진 삶의 진실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오랫동안 고난의 기다림 속에 갈멜산 대전투의 승리를 이루고 그 이후에 그가 원하는 모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 왕의 악한 왕 이세벨을 꺾어지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의 목숨을 취하겠다고 맹언하며 사람들에게 그 모든 소리를 전달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가 전달되어서 엘리야의 귀에 들어왔을 때 엘리야는 좌절하고 맙니다. 갈멜산 대승리의 큰 역사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기승하여 자신의 생명을 노린다고 생각을 할 때 엘리야는 그만 그 가운데서 낙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이세벨이 하나님의 은혜의 진노 앞에 무너지기를 간구하고 그 역사를 위해서 수고했으면 좋으련만 엘리야의 마음에 들었던 생각은 좌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도망치다 나중에는 도망치는 것조차 지치고 지쳐 로뎀나무 밑을 찾아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더 이상 도망치는 것도 내가 지치오니 주께서 나의 생명을 거두어 주셔서 더 이상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엘리야에 대해서 그 자리에서 징책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멜산 대전투의 승리를 이루었고 하나님의 이름을 만방에 떨쳤던 엘리야가 이와 같이 도망쳐 다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누추하게 하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천사를 보내서 물과 떡을 주셔서 그를 광야로 들어가게 하시고 호렙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호렙에 이르렀을 때 동굴 앞에 이르러 그를 산에 세우시고 하나님께서는 산에 하나님의 바람으로 지나가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바람, 지진, 불,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야 도대체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네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이 무슨 이유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자기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한탄합니다. "내가 열심히 특심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변심하여 하나님의 단을 훼파하고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는데 그 가운데 오직 나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들은 나까지 찾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한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합니다. "내가 너에게 사명을 주니 아람 왕을 세우고 이스라엘 왕을 세우고 네 후계선지자를 세워서 마침내 너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은 그들의 손에 죽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도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고 입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은 너 엘리야 하나만 이 시대 가운데 의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이 시대를 살고 있음으로 이런 어려움에 광풍이 지나간 후에도 칠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깨끗이 보존되어 살게 되리라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장면을 보면서 엘리야는 자기의 삶을 오판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진 어려움은 극복되어져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야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쫓기는 가운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이 큰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이와 같이 자기 연민에 빠져 슬픔가운데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내용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때로 삶에 진정한 판단과 분석과는 상관없이 마음이 무너져 위축되고 외롭고 고독한 삶의 수렁에 빠질 때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대단한 능력을 행했던 선지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야는 인내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인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을 참고 견딜 수 있고 무엇이든지 자기의 때가 될 때까지 엎드러져 있다가 마침내 때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는 인내의 힘을 가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고 싶은 말 하지 않아도 참을 수 있고 하고 싶은 행동 참고 안할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인내야 말로 가장 큰 대단한 능력입니다. 엘리야는 그 인내의 능력을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무능한 시간을 보내면서 까마귀가 물어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면서 때로는 사르밧 과부 여인의 집에 식객으로 얹혀 있으면서 그는 무기력한 시대를 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열혈 불길이 있었고 마침내 때가 되매 갈멜산의 대전투에 승리를 이루었던 하나님의 영웅적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능력 있는 선지자 이스라엘의 능력을 행한 선지자중의 대표자격인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선지자의 계보를 살펴보면 우리가 두 부류로 나누게 됩니다. 주로 말씀을 기록하고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와 말씀을 기록하고 전하기도 했지만 주로 능력을 행했던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래도 말씀을 전한 선지자들 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능력을 행한 선지자들을 더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더러는 모세,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라 하더이다." 여기서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사람이요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일컬어졌던 사람이 바로 엘리야였던 것입니다. 즉 엘리야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능력을 행하는 선지자의 대표자 격으로서 많은 능력을 행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에 깊이 인각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한순간에 마음이 무너져 쫓기는 짐승처럼 스스로 처참한 지경이 되어 쫓깁니다. 이세벨의 암살 위협 한마디에 그는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10절과 14절에 그는 거듭하여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변심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제단을 훼파하고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는데 그 중에서 오직 나만 남았고 그들은 나까지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내 열심이 특심했지만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고 이와 같이 쫓기는 짐승같이 되어 내 생명하나 부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엘리야의 인식으로서 사실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현실은 엘리야의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낼 수 있는 은혜의 장면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그 현실을 자기 자신의 마지막 순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다고 생각하면 한순간에 무너져 마치 물이 산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저 계곡으로 치달아 처박히게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두려워하고 위축되고 고독해하고 아파하고 무너져가는 사람입니다.

요즘 운동경기를 한 가지 예로 들어드릴까요? 양 팀이 팽팽하게 경기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우리가 금방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월드컵 때문에 고민이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월드컵에 새벽 4시에 두게임을 하다보니까 새벽예배 때 어떻게 하나? 나오라고 할 수도 없고 안 나오라고 할 수도 없고 그것보다 문제는 목사가 직접 보고 싶으니까 그게 문제이지요. 어떻게 할까하고 고민이 많다고 합니다. 저도 역시 고민인데 인도하심은 하나님께 받기로 작정을 했으니까 결과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두 팀이 경기를 하는데 팽팽하던 두 팀이 어떤 한 정점이 되어서 갑자기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한 정점이 되어서 갑자기 한 팀이 하강하기 시작하고 한 팀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지요. 그러면 게임은 마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어떤 한순간에 무너지는 때가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내 느낌 한 가지에, 그리고 내게 주어지는 부는 바람하나에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했을 때 그렇게 아합 앞에서 담대했고 갈멜산에서 그렇게 대담한 역사를 이루었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던 엘리야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기력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역시 인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만이 하나님 앞에 능력을 행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인도하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때 인간들은 어떤 일이든 행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인간들은 이렇게 연약하고 무기력하여 널브러져 있는 것을 봅니다. 때로 어려운 면만 보았고 하나님의 역사의 이면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저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어려움은 항상 실상 이상으로 확대되어 우리에게 허상으로 다가와 우리를 위협합니다.

늘 말씀드렸습니다. 답은 문제를 가지고 출제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삶의 상황도 그 상황을 해결할만한 이와 같은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힘을 더 쏟고 시간을 더 쏟고 방법을 개선하고 더 기도하고 기도해도 안될 때는 기도의 응답을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순간에 한번하면 능력이라고 생각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구하고 마침내 그것을 이루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새로운 진보의 길을 터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들에게 어떠한 경우도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다만 내 앞에 놓인 일을 하나님 앞에 처리할 뿐이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어떤 위기 속에서 우리는 관리능력을 발휘하고 어떤 넘어진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는 복원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이 무너지면 이와 같은 모든 일을 이룰 수 없는 것을 봅니다. 어려움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위축이 됩니다. 삶의 고독과 외로움에 빠져 우리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현실 상황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내 마음의 무너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할 때조차 어려움 속에서 구조요청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과 사역에 마감을 요청했던 최악을 슬럼프에 바로 엘리야는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어려움을 극복할 힘과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내가 어려움에 빠졌고 하나님 은혜만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십시오’ 그러므로 말미암아 ‘시대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는 여호와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합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대 속에 자신의 삶의 길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삶이 마감됨을 생각하며 오히려 하나님 앞에 죽기를 요청했던 이와 같은 패배의 원인들을 하나님 앞에 오히려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누추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요청하는 순간조차 패배적인 정리의 내용을 간구하는 것은 이미 그의 기세가 꺾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간구와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의 승리를 위한 간구인가 패배의 정리를 위한 기도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패배를 정리시켜 마무리 시켜주는 정도의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승리케 하여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해야지 패배 중에도 “최소한의 것을 건지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먼저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패배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지만 그때는 그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고 결과는 하나님의 몫으로 우리는 수납하면 될 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쉬운 예로 들어봅시다. 집에서 어린아이들이 있는데 학생들인데 시험을 본다고 합니다. “어머님 아버님 이번에 학기말 고사를 치르는데 제가 시험을 잘 보면 저에게 선물하나 해주세요.” 하는 이런 아이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흐뭇하지요. 그런데 반대로 이렇게 얘기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머님 아버님 이번에 기말고사를 치르는데 제가 시험 잘 못 봐도 절대 저를 때리지 말아주세요.” 여러분 어떤 아이가 마음에 들겠습니까? 어떻게 소원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합당한 기도라고 생각합니까? 내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 이 어려움을 극복할 힘과 은혜와 능력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 내게 어려움이 닥쳤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망하게 됩니다. 망하는 순간가운데 나는 고통이나 당하지 않고 망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과 도대체 우리는 어떤 기도를 선택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우리가 놓여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뜻과 기대와 능력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무엘하 12장 13절 이하를 보면 우리들에게 아주 범상치 않은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범죄한 이후의 장면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더불어 통간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속에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그 우리야의 장군을 최전선으로 몰아서 결국은 죽게 만듭니다. 이제 자기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마음대로 취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결국 이 둘 사이에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이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서 우리야를 죽게 한 것을 보고 선지자 나단이 와서 통렬하게 그를 징책합니다. 그때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구푸리고 하나님 앞에 옷을 찢으며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통책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낳은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죽을 병에 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범죄의 결과로 치신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금식을 하며 땅바닥에 엎드려서 얼굴을 땅에 대고 허리를 펴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금식을 하며 통곡하며 밖에 나오지도 않고 기도할 때 그 신복들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다윗의 모든 행적은 알지만 다윗의 모든 면모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다윗의 좋은 점 나쁜 점을 다 알고 있는 이들이 통합하여 볼 때 다윗은 괜찮았던 사람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간구합니다. “왕이여 왕은 이 슬픔에서 벗어나 국사를 다스리고 슬픔에서 벗어나 왕은 정상적인 삶을 사소서.”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다 물리치고 통곡하고 기도하며 땅에 엎드러져 일어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레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감히 다윗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는 사이 이레가 흘러갔을 때 아프던 아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감히 말을 못합니다. 그 아들이 아파서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뿌리며 호소하던 다윗이 일곱째 날이 되어서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저렇게 눈물로 간구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들이 죽었는데 우리가 어찌 그 소식을 전할꼬 그런데 여러 가지 기색을 다윗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느냐?” “죽었습니다.” 다윗은 거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금식을 거두어들이고 얼굴에 기름을 바르고 채색 옷을 입고 그의 집무를 정상적으로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의아해 합니다. 그 아들이 그렇게 아파 죽게 될 지경일 때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통곡하여 구했는데 그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의연히 일을 하는 모습을 볼 때 너무나 의아했습니다. 도무지 이 다윗의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 소식을 전할 수도 없었던 이들에게 다윗의 모습은 너무나 의외입니다. 신하들이 묻습니다. “왕이여 어떻게 아들이 아파서 죽게 될 지경에는 그렇게 슬퍼하더니 아들이 죽었을 때 고정하고 국사를 집무합니까?” 다윗이 말합니다. “내 아들이 살아있을 때는 혹시라도 하나님이 내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그 아들을 살려주실지 몰라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했지만 이제 하나님의 뜻이 정해져서 내 아들을 취해가셨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내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 일이다. 하나님이 내 아들을 취해 가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나는 이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내 일을 해야 한다.” 라고 그의 신하들에게 말했던 내용이 바로 사무엘하 12장 13절 이하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진노 중에 긍휼을 바랬지만 하나님께서 어떠한 결정을 하여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다윗은 인생의 바닥, 영적인 최하의 순간까지도 내려갔었고 하나님 앞에 최고의 높은 자리도 갔었던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모든 것을 통괄하여 볼 때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지 이와 같은 단점도 약점도 장점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마음이 있었고, 육신의 생각 때문에 넘어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과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 진노 중에도 긍휼을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실수를 했지만 하나님 앞에 돌이킬 줄 알았고 그의 마음에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인생의 곤고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여 ‘나에게 기회를 주시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간구하지 못했고 그는 무너져가는 마음을 부여안고 하나님 앞에 고독하게 절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내 목숨을 취하여 나로 이 곤고를 보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물과 떡을 주셔서 그를 호렙으로 들어가게 하셨을 때도 그는 하나님께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열심이 특심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단을 훼파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나 하나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그릇된 상황인식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오직 엘리야 하나만 남아있지 않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살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자기연민에 빠져 마치 자기 혼자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야는 저 깊은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어려운 순간에 나타나셔서 자신의 힘과 위엄을 보여주시며 자신감과 용기를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은 바람 속에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니 하나님은 엘리야를 산에 서게 하시고 그 앞을 지나가십니다. 바람이 지나가 바위를 부수고 산을 가르십니다. 지진을 일으키시고 불을 일으키시고 그 후에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야 네가 있는 곳이 어디냐? 엘리야야 네가 어디 서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어찌하여 네가 여기 있느냐? 지금이 너의 자리냐?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느냐? 지금 있는 네 위치가 맞느냐? 너는 내 백성을 구해야할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너는 네 목숨 하나 괴롭다고 버리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니냐? 그때 엘리야는 또 약한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 내 열심이 극심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하나님의 단을 훼파하고 주의 선지자를 죽였으며 또 나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고 하나이다.” 엘리야의 비극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이나 만난 후나 말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때의 마지막이 온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났으면 마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마음을 먹었으나 하나님께서 새로운 은혜를 주시면 이제는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왜 능력의 하나님께 해결을 구하지 않고 작은 미봉책을 구하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보이시며 그의 사람에게 용기와 은혜를 주십니다. 사람은 좋아하다가 싫어하면 버리기도 하고 좋아하다가 싫어하면 오히려 그에게 해코지를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택한 사람에게 끝까지 자비와 은총을 베푸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신의 사람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봅니다. 능력의 역사와 자신의 사람에게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세미한 음성으로 그 백성을 깨우치는 하나님의 그 음성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종 엘리야에게 단호하게 하나님의 의지의 역사를 말씀합니다. “너는 왕과 선지자를 세울 것이다. 너는 왕과 선지자를 세울 것이다. 이제 너는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기름부어라. 그리고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라. 그리고 너는 기름 부어 엘리사를 너의 후계자로 세우라. 하사엘이 그들을 죽일 것이요, 그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그 칼을 피하면 엘리사가 마지막까지 죽일 것이다. 그러니 너를 좇는 자는 모두 멸절되리라.”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그들을 세우는 일에 너를 사용하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이루시는데도 하나님은 도망쳤던 엘리야를 사용하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은 실패의 순간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와 큰마음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우리의 기준에서 삶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우리 수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수준에서 우리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수준에서 상황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을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엘리야가 두려움을 피해 죽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실패했거나 낙심했거나 내 모든 일을 망쳤다하는 순간 나는 이것으로 내 인생이 끝나 더 이상 곤고한 순간을 보지 않기 위하여 여러 상황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 내가 넘어졌던 그 장면을 향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언제나 곤고함을 피하여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우리 삶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를 발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부르실 일을 가지고 마치 우리가 마지막 날을 하나님께 자칭하여 곤고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패배주의의 발상입니다. 차라리 그 때 우리는 장렬히 마지막 한 순간까지 주를 위하여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의 품 안에 안기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군인의 최후의 영광은 전쟁터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처럼 성도의 최후의 영광은 주를 위해 살다 우리의 호흡이 주를 위해 사는 순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우리가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 순간에 진실된 모습과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순간의 모습을 잊지 않고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순간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삶의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겠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아니한 자라.” 하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렵고 모든 사람이 굴절되어 바알에게 입 맞추고 무릎을 꿇는 것 같아도 이 시대가 마쳐질 때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아니한 자 칠천 명을 내가 남기겠다 하십니다. 그러면 이 순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얼마라는 것입니까? 자기연민은 사단의 전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어려운 계곡입니다. 우리가 자기연민에 빠져 두려워하고 고독해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이제까지 행하셨던 역사를 보고 오히려 힘을 더 얻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 40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발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16절을 보면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합니다. 주님을 찾는 자는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은 광대 하시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들 되게 하시는데 왜 우리가 영광의 찬송을 돌릴 몫을 잊어버리고 삶의 저 나락 속으로 떨어져 가는가 생각을 합니다. 우리 삶의 상황을 실제로 다시 바라보게 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승리가 이미 임했음을 봅니다. 내 실망되었던 삶의 상황과 삶의 실제적인 상황의 진실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눈 앞에 있는 현상과 상황의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마음에 있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버렸다, 이 상황은 나를 버린 상황이라고 오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현상판독을 잘해야 합니다. 상황분석을 잘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여건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뜻이 무엇인가를 판독해야 하는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영화를 보면 유다 벤허가 로마로 팔려갑니다. 그래서 해군전함, 배 아래에서 노를 젓습니다. 그의 이름은 44번입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로마의 해군과 다른 나라의 해군이 전투를 벌입니다. 벤허가 노를 젓던 배가 사령관이 탄 배였습니다. 전투가 한참 이루어지고 시간이 흘러서 벤허가 탄 배가 부서져 벤허는 나무 조각 뗏목을 타고 살아납니다. 벤허는 떠내려가던 사령관을 널빤지 위로 건져 올립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옵니다. 사령관이 눈을 떠보니 자신이 탔던 배는 난파되어서 웬 나무 조각이 떠있고 노예가 자신을 구해 뗏목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생각해보니 모든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져서 배는 깨어지고 내 모든 전대는 다 훼파되었고 이제 내가 이 노예에 의해서 목숨을 구함 받아서 이 나무 널빤지에서 살아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너무 처참했습니다. 그래서 칼을 들어 자신을 찔러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벤허가 그것을 말립니다. 시간이 지나보니 엉뚱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로마의 군대가 대패한 게 아니라 대승한 것입니다. 이 사령관의 배는 깨어졌지만 모든 로마의 군대들은 아직 건재하고 상대방은 멸망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개선장군으로 개선하게 됩니다. 개선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벤허를 수양아들로 삼고 로마의 경기장에서 마차를 달리는 선수로서 양성을 해나갑니다.
잠시 생각해봅시다. 만약 그 장군이 상황을 오판해서 전쟁에서 진 줄 알고 죽었다면 그것은 정말 엉뚱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좀 더 면밀히 살펴보고 멀리까지 바라보았다면 자신이 이긴 것입니다. 만약 벤허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죽고 말았습니다. 이기고서 죽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엉뚱한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는데 내 눈 앞을 보고 “망했어 나는 죽어야 해”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그 모든 것을 누려라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나는 망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 앞에 울며불며 기도만합니다. 왜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는데 너는 누리지 못하느냐? 왜 너는 승리하게 되었는데 기뻐하지 못하느냐? 하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우리는 눈앞의 몇 가지 사실을 보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생각하고 그저 우리는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고독해하며 절대고독 가운데 빠져서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실제와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실망대신 지금의 상황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아람이라는 나라에서 군대 회의를 합니다. 그런데 군대 막사에서 회의를 하면 이스라엘에서는 그 일을 다 압니다. 그래서 전쟁할 때마다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우리 가운데 스파이가 있구나, 첩자가 있다라고 왕이 이야기하니 신하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중에 첩자가 있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도단성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엘리사는 우리가 이곳에서 말해도 다 압니다.” 그러자 아람왕이 도단성을 둘러싸라고 말합니다. 압박해서 그를 처단하라고 말하자 구름떼처럼 몰려가서 도단성을 다 에워쌉니다. 그리고 점점 압박해 들어가서 엘리사의 목숨을 취하려고 합니다. 엘리사는 태평입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사환이 벌벌 떱니다. 아람의 군사들이 도단성을 에워싸고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벌벌 떠니 엘리사가 말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두려워하지 말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사환의 눈이 열립니다. 깜짝 놀랍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아람군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사환의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지켜주고 있는데 저 아람의 군대들은 우리를 하나도 상치 못하리라.” 상황판단이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사환의 상황판단은 내 눈 앞에 보이는 아람의 군사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사에게는 아람군대를 능가하는 천군천사들을 보고 그 가운데 상황을 판단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보고 판단하시겠습니까? 우리 삶의 무엇을 보고 판단하시렵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몇 가지를 보고 판단하시렵니까? 내 삶의 전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루어갈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하고 원대한 뜻을 바라보고 우리의 삶을 판단할 것입니까?
엘리야는 로뎀나무 밑을 찾아서 하나님 앞에 엄살을 부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설득하셨습니다. 그를 버리지 않고 천사를 통해 물과 떡을 주셔서 호렙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호렙에서 그에게 또 다른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셨고, 마침내 그에게 마지막 일을 이루게 하셨고 그를 승천시켜주셨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불러올리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것으로서 엘리야의 공적인 사역은 마감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더 일어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지 못하고 그의 마지막 사역을 이루고 끝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가 여기까지 끝이다라고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하나님 나는 낙심하고 위축되지 않고 나 홀로가 아니오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나로 하여금 이 곤고함을 해결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마음이고, 믿음이고, 상황을 분석하는 믿음의 백성의 해석이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할 때 지금의 상황이 정말 그런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오히려 어렵다면 이 기회에 모두가 어려울 때 나로 하여금 이 난관을 극복하여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나를 우뚝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는 것을 우리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이 나를 돕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시다면 차라리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의 역사를 간구함을 감사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간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 상태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하대하고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순간도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실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인정하고 파악하여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내 삶의 호흡이 있는 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기대하고 기회를 가지고 있고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두 호흡하고 계십니까? 이 자리에 다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직은 우리에게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이 있고 우리가 극복해야할 난관이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의 장소인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어렵고 외롭고 고독하고 우리 마음이 위축될 때
삶의 현장 가운데 주어진 하나님의 진실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승리를 간구하며 은혜의 역사를 이루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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