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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메섹 도상 위의 만남 (행 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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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여러 가지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남 중에서 최고의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그 만남의 참 가치는 변화된 삶에 있다. 사울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바울이 되고 변화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핍박자였던 사울이 전도자 바울이 되고 율법의 의를 자랑하던 사울이 복음의 은혜를 자랑하는 바울로 변화되었으니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생의 존재 자체, 근원 자체를 흔들어 놓는 것이 되었다. 사실 이 변화를 가져오는 만남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사건이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역사적 사건을 많이 기다리며 갈망해야 된다.
그러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첫째, 홀연히 빛이 비추어진 만남 (행9:3)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만남은 하나님 편에서 찾아오시는 계시다. 빛으로 비추는 계시가 있으므로 인생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빛은 자유와 해방과 안전과 생명의 개념이다. 변화되지 못한 사울에게 빛이 비추었다는 것은 사울의 삶이 어두움이었음을 뜻한다.
행9:1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사울의 영혼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보여주는 이 말씀은 분노와 적대감이 가득한 사울에게 참된 빛이 필요로 하였음을 암시해준다. 그런데 그 하늘로서 비추는 그 빛은 홀연히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뜻하지 않은 어느 순간에 시작된다. 돌발적으로 계시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만남과 변화, 회심의 사건은 대개 갑자기 이루어진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채 은혜 받는 일에 목말라 하였다. 어느 날 기도하던 한밤 중, 기도실에 찾아온 목사님께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자네, 공부 좀 하지 않을래?"라며 신학교에 가면 장학금을 준다는 이 말 한마디에 나는 변화되어 책을 붙잡고 씨름하였다. 그때 삶을 변화시킨 그 밤, "공부하지 않을래?"라는 제안을 듣는 순간 나는 홀연히 빛을 보는 것 같았다. 새로운 빛, 밝고 환하고 어두움을 끝내는 광명한 빛, 그 빛이 가슴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빛이 비추이는 것같은 이 만남이 나를 목회자로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계획이었기에 홀연히 빛을 비춘 만남이었다.
지금도 당신을 새롭게 하는 빛이 비춰올 수 있다. 홀연히 비쳐지는 빛의 계시를 믿으라.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불빛이 갑자기 내게 비치는 것 같았어요."라는 말을 고백하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믿으라.

둘째, 겸손히 엎드리는 만남 (행9:4)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의 사건 앞에서 사람은 어떤 포즈를 취하는가?
행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라고 하였다. 계시의 소리가 들려올 때 고개를 세우고 교만하게 주님을 대면할 자는 없다. 만남의 사건에는 엎드림만 있을 뿐이다. 그발 강변에서 이상을 본 에스겔은 엎드러져 있었다. 에스겔 2장 1절을 보면 "인자야 일어서라 내게 네게 말하리라." 하였고 2장 2절에도 말씀하실 때에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의 요한도 환상을 볼 때 계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라고 하였다. 계시와 환상을 통해 일어나는 만남의 사건 앞에 사람이 취한 자세는 오직 엎드리는 겸손뿐이다.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흘러간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대적한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하며 오직 엎드림이 있는 성도가 되자. 그러면 하나님이 와서 위로하시며 은혜 주시고 당신에게 사랑을 보이신다.

셋째, 예수를 대면한 만남 (행9:5)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 앞에서 사울을 대답을 한다.
행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은 예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바로 너에게 핍박받는 예수라는 피할 수 없는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는 미래의 삶을 인도함 받았다.
예수! 죽은 줄 알았던 예수, 유대교의 이단으로 생각했던 예수, 율법과 전통으로 난도질했던 예수, 그 예수가 바울의 얼굴 앞에서 살아있는 예수, 진리의 예수로 나타났다. 생생하게 핍박받는 예수로 나타났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만나면 인생의 방황은 끝이난다. 지금까지 살아온 어리석은 삶도 끝이 난다. 인생에 대한 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그것마저 끝이 난다. 인생에 대한 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그것마저 끝난다. 무의미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죄에 대한 공포가 끝난다.
사울은 예수를 보았다. 예수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대면하였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으나 사울은 들었고 보는 자가 되었다. 예수를 만나면 기쁘다. 행복하다.

넷째, 육체로는 가장 약해지는 만남 (행9:8∼9)
사울은 예수를 만난 이후 땅에서 일어났다. 눈을 떴다. 그러나 그 스스로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혈기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가던 사울은 무능해졌다. 연약해졌다. 아니 지금까지 몰두했던 일들은 사울이 알고보니 해야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행9:8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행9: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거룩한 주님 앞에서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 자신을 위해 피 흘린 예수 앞에서 예수를 핍박하였던 죄인의 괴수의 모습, 그 자신의 불의를 발견하게 될 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죄를 발견할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는 고통 속에 머물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해야할 일이 아닌 것을 쫓아가는 것은 아닌가? 아! 주님을 만나는 만남은 변화에 따르는 고통과 아픔과 연약함의 몸부림도 있다. 이렇게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 진작 주를 따르지 못한 것에 대한 몸부림이 가장 무력하고 연약한 과정을 지나게 한다. 거듭나는데는 밥과 음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육체를 위한 의식주는 거듭남에 있어서 무관한 것이 된다. 오직 마음은 기도에 몰입할 뿐이다. 영이 살아야 하고 영이 소생해야 할 것이 우선이다. 영적 체험이 우선이다. 영으로는 새로워지나 육적으로는 약하게 되고 무능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사랑이 부어진 만남 (행9:17)
다메섹에 들어가 식음을 전폐한 사울에게 주님은 아나니아를 보냈다. 다소 사람 사울이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기도하는 중이라고 알려 주신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안수하도록 지시하였다. 아나니아는 거리끼는 마음을 가졌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가진 사울에게 찾아간다는 것은 원수에게 가는 것이다. 친구, 형제, 동료를 핍박한 대적자에게 가는 것이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멈칫거리지만 사울이 택한 하나님의 그릇이라는 주님 말씀 앞에 순종하고 간다. 가서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손을 내민다.

행9:17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이 기도와 함께 사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게 되고 일어나 세례를 받게 되고 음식을 먹으며 강건하여졌다. 사울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리스도인 형제 아나니아를 통해 사랑이 부어진 만남이었다. 핍박하던 예수님도 자기를 만나주시고 핍박하던 그리스도인도 자기를 찾아와 손을 내밀어 기도해주는 사랑의 만남이었다. 사울의 변화의 끝자락에는 사랑이 부어졌다. 그 사랑은 물론 주님에게 배운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사울을 강권하고 사울을 전도자의 삶으로 변화시켰다.
사랑은 위대하다 대적자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형제라고 부르는 사랑, 손을 내밀어 안수하는 사랑,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 충만을 빌어주는 사랑, 하나님이 사울을 위해 아나니아를 보내셨다는 사랑, 사랑은 감동의 힘이 있다. 사랑은 새로운 창조와 기적의 인생을 만들어낸다. 사울은 더 이상 율법의 사람으로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그의 인생관, 그의 가치관, 그의 삶의 비젼, 그의 붙잡고 있는 소망이 새롭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의 육체는 다시 강건해졌다.

레미제라블 장발장, 그는 어떻게 하여 새 사람이 되었는가? 바로 사랑이다. 재워주고 먹여준 사제관에서 금촛대를 훔친 그를 신부가 용서하고 사랑해준다. 형사에게 붙잡혀온 장발장을 사제는 도둑놈이라고 하지 않고 촛대를 선물했다고 한다. 사랑은 기적이다. 사울도 사랑을 만났다.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을 만났다. 그 만남에서 온 변화가 그의 생애를 새 출발 시켰고 또한 오늘의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인생을 바꾸었다. 민족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었다. 결국 바울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 열방을 바꾸었다. 한 사람에게 일어난 하나님과의 만남, 회심과 변화를 일으키는 다메섹 영적 체험이 우리 교회에 일어나야 한다.

기독교사를 보면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사울같은 영적 만남, 회심의 사건을 경험하였다. 무디, 찰스피니, 토레이, 위로 올라가서 루터, 웨슬리, 진젠돌프, 요한훗스, 어거스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나는 우리 교회가 쓰여지기를 기도한다. 그렇게 되려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이 나타나야 한다. 복음의 영광을 위해 성령께만 이끌리는 이들이 나타나야 한다. 그 해답의 길은 교회가 다메섹 체험의 장소가 되는데 있다. 오직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회심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데 있다.
한때 변화받았던 피니의 체험을 보자. 그는 집 근처 숲 속에서 은혜를 받았고 그 주간 사무실에서 그리스도를 대면하였다. 그의 기록은 이렇다.

"내 영혼을 하나님께 전부 쏟아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예수님을 대면하고 있는 듯 하였다. 그분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만 그윽히 바라보는 눈빛에 나는 그만 그분 발 앞에 엎드리고 말았다. 나는 그분 발아래 엎드려 내 영혼을 쏟아놓았다.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고백했다. 내 눈물로 그의 발을 다 적신 것 같았다. 나는 성령의 강한 세례를 받았다. 그런 것이 있는 줄 전혀 생각조차 해본 일도 없었다. 그런데 성령님은 내 몸과 영혼을 관통하는 것처럼 내게 임하였다. 그 감화는 나를 뚫고 가는 전기 파도처럼 느껴졌다. 사랑의 물결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호흡 자체 같았다. 나는 기쁨과 사랑으로 목놓아 울었다. 그 물결이 쉬지 않고 덮쳐왔을 때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 물결이 계속 덮치면 죽을 것 같아요, 주님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어요' 그래도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변화를 가져온 이 만남의 체험을 통해 피니는 예수님께만 순종하며 성령께 자기를 위탁하였다. 그리고는 위대한 부흥을 일으키는 자가 되었다.

우리 교회가 이제부터 다메섹 체험이 일어난 거룩한 장소가 되기를 갈망하자. 가장 소중한 만남, 가장 귀중한 만남, 무엇보다 시급한 주님과의 만남, 그 회심의 만남이 있는 교회, 10사람, 100사람이 삶의 변화를 간증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자. 거기엔 확신과 사명, 기쁨과 감격, 담대한 용기와 열정이 동반될 것이다. 이 변화는 오직 다메섹의 신앙 체험 다섯 가지의 만남이 있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는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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