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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과 영광 (롬 8:1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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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란 현재를 특징하는 말씀이고, 영광은 미래를 특징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 고난과 영광을 비교하기를, 고난이 잉크 방울이라면 영광은 태평양 바닷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비교 자체가 안된다고 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성도여러분은 어떤 것들이 고난이라고 여겨지십니까?

사람이 살면서 제일 먼저 피부로 느끼는 고난 중에 하나는 물질적인 것입니다. 즉 돈이 없어서 살기 힘든 경우입니다. 쌀독이 비어가지만 돈이 없어서 준비하지 못할 때의 심정은 참담함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어떤 때는 헌금할 천원이 없어서 주일이 무척 힘든 그런 경험도 있으실 것입니다. 저희도 개척 초기에는 그런 경험을 자주 하였었습니다. 천원이 준비되지 못할 때 애꿋은 아이들 저금통장만 축 냈었지요.

경제적으로 겪는 그런 어려움들은 우리의 체면이 서지 않게 만들기에 무척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말라고 어느 철학자는 이야기했었지요. 먹을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을 때에 오는 마음의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큰 것이 사실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건강문제로 인하여 고통을 받습니다. 말할 수 없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고통이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물질이 지출되고 많은 사람들의 시간적인 수고가 따르지만 차도는 없고 호전될 기약이 없을 경우 그 고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듯 물질적인 문제나 질병의 문제등으로 인하여 오는 고통이 우리 인생에게는 가장 대표적인 고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고난은 그런 종류와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서,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오는 고통의 문제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고난 이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로 겪는 고난을 겪어 보셨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겪지 않아도 될 고난이지만, 내가 예수의 사람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들을 보통 사람들은 아마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일들을 남편으로부터 겪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내로부터, 어떤 이들은 부모로부터 겪거나 심지어는 직장 동료나 이웃으로부터 겪기도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교패를 집에 붙이는 것 조차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신앙적인 이유로 말미암은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도 신앙적인 이유로 과거 고난을 겪었거나 현재 겪고 있는 분들은 이러한 종류의 고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를 실감하실 것입니다. 날마다 눈물로 상담받고 다시금 위로받고 돌아가지만 또 다시 반복되어지는 그런 고난으로 인하여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지금 로마의 성도들에게 말씀하기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성도들이 겪었던 고통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네로시대나 도미시안 황제 시대에는 신앙인들을 향한 핍박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산 채로 껍질을 벗겨 죽인다든지, 아니면 살아있는 사람을 나무 기둥에 매어놓고 굶은 짐승을 풀어 짐승의 먹이로 삼게 한다던지, 산채로 사람을 묶어놓고 도끼로 머리를 내리친다든지 하는 이런 일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신앙적인 고난입니다만 사도들이나 바울이 겪었던 핍박의 내용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로마를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콜로세움은 현재는 로마 관광의 상징물이 되어 있지만, 바로 그 곳은 여러가지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 세워진 스타디움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핍박자들은 그곳을 기독교인들을 공개적으로 핍박하는 장소로 악용했습니다. 크리스찬이라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온 그들을 어른과 어린이 할 것 없이 나무 기둥에 매어 놓거나 한 구석에 몰아 놓고서 며칠씩 굶겨 놓은 짐승들을 풀어 그들의 밥이 되게 하는 장면을 시민들로 관람하게 하는등 상상도 못할 야만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곳입니다. 지금 그곳에 가면 원형 경기장 중앙에 커다란 십자가가 하나 세워져 있어 그 때의 성도들의 신앙과 용기를 대변해 주는 듯 하고 있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그들을 떠나서 압비아가도로 되돌아 돌아갑니다. 자기는 더 이상 저런 고난의 자리에 함께 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럴때 베드로 앞에 주님께서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쿼바디스 도미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라는 의미의 이 물음에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버리고 간 십자가를 다시 지려고 간다"고 하셨고 이에 베드로는 정신이 들어 "한 번 십자가 지신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또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할 순 없습니다"며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콜로세움 고난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지요. 그리고 그 높은 관중석에서 그 죽음에 직면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성도들에게 외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아, 두려워 하지 말라." 베드로 전, 후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담고 있는 말씀이기도합니다. 그 때에 짐승의 습격에 두려워 하고 있던 많은 성도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용기를 얻었겠습니까? 베드로 역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순교하는 일을 스스로 자처한줄로 믿습니다.

바울사도 역시 도끼로 목을 침을 당했습니다. 로마에서 도망치지 않고 순교를 자처했습니다. 성도들이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사자의 밥이 되면서 그들은 부둥켜 안고 찬양하면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도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신앙인줄로 믿습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

바울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합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는 유익이라. 고난을 피해보려고 몸부림치는 연약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 고난을 오히려 기뻐하며 더 이상 고난이 고난이 되지 않는 오히려 고난이 내게 유익됨을 고백하는 진정하고도 담대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게 하는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나의 의지 같아도 성령이 도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인치심을 성령께서 보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양자의 영,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곧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외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요, 곧 하나님의 자녀로써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은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전에는 너희가 긍휼을 얻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긍휼을 입었고, 전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해서 양자의 영으로 인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되고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요한복음 1장의 말씀처럼 자녀는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자녀의 특권을 누리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권세입니다. 이제 우리는 권세를 누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지난주에 우리 경로노인복지대학은 44명이 청와대를 견학하고 왔습니다. 이름 그대로 견학입니다. 가서 구경하고 사진 한번 찍고 오는 거예요.

보름 전에 명단을 보내고, 경찰청에서 신원조회하고, 그리고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에 들어와도 이상이 없겠다고 확인이 된 사람들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주변에는 경호원들이 어떻게 할까봐 다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자녀들은 밤이고, 낮이고 관계없이 자유롭게 청와대를 드나듭니다.

자녀와 그렇지 않은 거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자녀로써의 특권을 바로 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녀됨에 특권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상속자가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많은 은혜들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상속자의 특권을 누릴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지니라. 아버지가 고난을 겪으면 엄마도 겪지요. 부모가 고난을 겪으면 자녀도 겪습니다.

자녀가 고난을 겪으면 역으로 부모도 고난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이기 때문에, 남편은 벌어서 호위호식하고, 늘 씀씀이가 헤픈데 아내는 그렇지 못하다면 불공평하지요, 여러분 최근에 가정에 있어서 사회적인 통념이 어떤 것입니까?

결혼을 한 이후에 주어진 재산은 만약 부부가 갈라선다면 오십대, 오십대 권한을 주는 거지요. 결혼 후에는 남편만 직장을 다녔더라도 그 소유의 절반은 아내 몫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부부가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쪽이 고난을 받으면 한 쪽도 고난을 받습니다. 한 쪽이 영광을 받으면 다른 한 쪽도 영광을 받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자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니까 부인이 뭐가 되요? 대통령 부인이 됩니다. 대통령만 청와대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 부인도 들어가서 삽니다. 자녀들도 따라 들어가 삽니다. 왜? 가족이라는 특권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만약에 한 사람이 잘못해서 감옥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됩니까? 나머지 사람들도 감옥생활이나 마찬가지지요.

최근에는 경제부총리를 지냈던 사람을 경찰이 추적하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권력은 참으로 무상하다. 엊그제까지 경제를 주무르던 최고 경제 책임자가 이제는 그의 계좌를 추적당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정말 세상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 정직과 진실함을 결여한다면 그것은 정말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가족이라고 한다면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17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후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19절을 보겠습니다. 피조물에 고대하던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테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굴복케 하신 이로 말미암은 것이라. 피조물이 무엇을 고대합니까? 고대한다고 하는 말은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구속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23절 후반에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에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피조물이 탄식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들을 구속할 자가 누구일까?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구속자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21절에 보면 피조물이 넘어짐에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가면서 제일 큰 삶의 화두는 건강입니다. 우리가 건강이라는 분야에 중점을 두면서 우리가 눈을 뜬 분야가 있어요.

바로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환경오염의 문제는 이제 심각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우리의 편의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환경을 오염시켜놓고, 그 오염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농산물을 먹고, 거기서 생산된 공산품들을 사용하면서 거기서 우리는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전 초등학교에 납품한 정수기에 땜을 한 부분을 실리콘으로 전부 막았는데, 그 실리콘을 공업용실리콘을 사용해서 거기서 심각한 공해물질이 거기에 섞여서 아이들이 그것을 마시면서 구토증이 생겨나고, 말할 수 없는 아이들의 건강에 해가 되었다는 것, 그것을 수없이 많이 만들어서 파는 업자를 구속하는 일까지 일어난 뉴스를 보았습니다.

잠깐 편리하게 그것을 만들어서 몇 천만원, 몇 억원 돈을 벌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고통을 받고, 결국은 그것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환경오염의 주범은 인간의 탐욕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지구가 환경이 파괴되는 것도 인간의 탐욕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결국 지구를 구하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회개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지구는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낙원의 모습으로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 성지순례를 하면서 스위스를 다 돌아보는데 알프스산 주변을 쭉 돌아보니까 계속 눈에 보이는 것은 알프스의 산이예요. 거기 산 자락에 집들도 그냥 아름답고, 산도 들도 모두가 아름다워요.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는 특권을 주셨을 때 그 때에 지구가 이와 같았을 건데,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귀한지, 그런데 그 아름다운 지구들을 인간의 탐욕이 다 망가뜨려 놨어요.

창문을 열고 다닐 수 없게 만들고. 거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는 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누구입니까?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그렇습니다. 피조물이 탄식합니다.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도 소망합니다. 구원을 소망합니다. 구속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나면 우리의 세계가 달라집니다. 욥은 늘 말씀을 귀로만 들었습니다. 말씀을 충분히 듣고,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고난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을 원망도 하고, 친구들 이웃들을 원망도 해 보고, 이렇게 저렇게 자신이 자신의 삶에 있어서 얻어지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힘들어 하다가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니다. 은혜받고 나면 눈이 열려질 줄 믿습니다. 세계가 다시 보이잖아요. 은혜 받고 나서 여러분 교회 밖을 나가 보세요. 나무가 노래하고, 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어요. 그대로 인데, 내가 은혜받고, 내가 새로워지고 나면 세상이 온통 달라져 보입니다.

여러분 저는 결혼하고 나서 여수로 신혼여행을 갔었어요. 제주도로 가고 싶었는데, 25년 전에 제주도 가는 게 만만치가 않았어요. 우리 장로님 아들, 내 친구가 제주도로 신혼여행 가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구요. 걔는 그 동네에서 제일 부잣집 아들이었어요. 그래도 신혼여행인데, 갈 때는 편도로 비행기를 타고, 올 때는 기차로 올라왔어요. 그래도 신혼여행에 비행기 한 번 타봐야지. 제주도는 못 가도 그래도 제일 가까운 여수는 한 번 가봐야지. 참 여수 가니까 음식도 맛이 있고, 그렇게 좋습디다.

첫날밤을 지나고 나서 턱 세상을 나오니까 세상이 온통 내 세상이야. 얼마나 세상이 새로워 졌는지, 마치 세상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그 때의 감격을 지금도 느낍니다. 온 세상이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어요.

야,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너무 너무 멋있었어요. 여러분 결혼하고 그 기분을 못 느껴 본 분들은 속은 것입니다. 아, 정말 멋있었어요. 세상이 달라보여요, 우리가 은혜 받으면 세상이 달라보일 줄 믿습니다.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안 보이던 것이 보입니다.

여러분, 새신자가 교회 들어오면 이 교회 시설이 잘 보이겠습니까? 저는 딱 들어오면 이 작은 등 꺼져있는 것, 일곱 개 중에 하나가 꺼져있어도 한 눈에 보입니다. 아이고, 저 등이 왜 나갔을까? 저 구석에 등 하나가 나갔어도 금방 보여요. 지난주에도 불이 나갔는데 왜 아직까지 교체를 안 했을까? 금방 알아버립니다.

그런데 처음 온 분들은 그게 안 보여요. 보이지 않습니다. 꽃꽂이를 정성껏 해 온 분들은 1주지, 2주지, 3주지 해서 딱 맞춰놨거든요. 여러분 볼 때는 그냥 아름답지만, 과학적인 공식에 따라서 해 놓은 거거든요.

그런데 누가 하느라고 움직여 놓았으면, 작은 가지 하나도 흔들어 놓았거나 뽑힌 것을 대강 다시 꼽아 놓았어도 이것 해 놓은 사범들은 아이고, 이거 잘 못 되었는데, 누가 건드렸지? 금방 알아버리는 거예요. 전문가라고 하는 것은 늘 그 일에 관심을 가지면서 알게 되는 일이예요.

지난 번에 우리 보은이가 중창단 반주를 했는데, 참 반주를 잘 했는데 들어와서 그래요. 속상해 죽겠다는 거예요. 중창단 반주하면서 틀렸다는 거예요. 우리는 전혀 틀린 지도 모르는데, 자기 혼자 속상해서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전혀 몰라, 무조건 잘 한거야, 우리가 얼마나 은혜 받았는데,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살짝 틀리면 모르는데, 본인은 아는거죠. 그리고 혼자 속상해 하는 거예요. 혼자 반주하다가 잠깐 틀렸다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라. 그거 알만한 사람 우리 교회 없어. 전문가여야만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도 받고 나면 우리도 은혜도 깊이 받고 나면 안 보이던 게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리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전도를 왜 하는 줄 아세요? 여기 보면 피조물들이 탄식한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보통 때는 안 들리는데요. 은혜 받고, 구원의 감격을 얻고 나면 예수 믿지 못해서 탄식하는 영혼들의 탄식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어야 삽니다. 예수 믿어야 합니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가는 거예요. 그거 안 들리니까 전도 할 수가 없지요. 전도하세요 해도 전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안 들리는데, 피조물의 탄식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어떻게 전도합니까?

하지만 그 세계를 아는 사람은 오늘도 저 영혼의 탄식 소리가 들리고, 오늘도 이 영혼의 탄식 소리가 들리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그냥 전도지 들고 가는 거예요. 하이타이 들고 찾아 가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귀와 눈이 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마치기를 원합니다. 고난은 현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미래의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노라고 바울사도는 로마의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합니다.

오늘 고난의 자리, 때때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혹은 건강의 문제 때문에 혹은 내가 예수의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고난의 자리에 있는 성도들이 계십니까? 그 고난이 아무리 우리에게 크게 보여도 그것은 태평양 큰 바닷물에 잉크 한 방울과 같다는 비유처럼 장차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려야 할 영광에 비교할 수 없는 줄을 믿고, 하나님께서 가장 어렵고 힘들 때에 주시는 로마서 말씀을 통하여 이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고, 이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 되어서 견디시고, 견디시되, 바라고 참음으로 기다릴 때에 우리가 소망 가운데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소망하시고, 소망 가운데 인내 하셔서, 마침내 보이는 소망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에 이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주 안에서 피조물들의 탄식소리를 듣게 하시고, 구속을 기다리며, 구원을 기다리는 그 영혼들의 탄식까지 듣게 하셔서 나아가시되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며 만방에 주의 도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전도자로써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주님, 위로하여 주시고, 붙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셔서 장차 허락하실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며 소망 가운데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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