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감옥 안의 감사 (빌 4:14-20)

  • 잡초 잡초
  • 561
  • 0

첨부 1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 김남주 시인이 쓴 시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 감옥에 가본 사람은 안다. 감옥에 독방 안에 할 일이 얼마나 없는지
독방에 앉아서 자기 몸의 일부를 붙들고 흔드는 것 밖에는 할일이 없다“
저는 이 시를 보면서 감옥에를 가보지는 않았지만 감옥안의 삶이 눈으로 보이듯이 연상이 되어집니다.
감옥안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감사한 삶을 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복수를 꿈꾸고 분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기회가 되면 탈출까지도 도모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영화 중에 감옥탈출을 그린 감동깊은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개인적으로 감동깊게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1994년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인데 실화를 근거를 한 영화라고 합니다. 하도 오래되어서 기억기 가물거리지만 기억이 남는 것은 감옥안의 많은 죄수들의 삶이 생생합니다. 매일 일정한 감방 안에서 자유가 억압된 불편한 삶을 살고 낮이면 작업장으로 끌려가서 일을 합니다. 반복되는 삶에서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가 부정과 원망입니다. 결국 억울하게 감옥에 갖힌 주인공 앤디는 망치로 토굴을 파고 19년만에 결국 감옥을 탈출하게 됩니다.

어저면 이 영화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우리중에 누구든지 감옥안의 인생을 감사하고 사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바울은 감옥 안에서 감사하면서 환경을 초월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 안에서 바울이 감사한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크고 놀라운 이적과 능력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할 수 도 있는 작은 것들을 영적으로 바라보면서 감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우리는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성숙도 그 사람의 영성을 알 수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큰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그래도 가능하고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작은 것에 감사하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작은 것은 당연히 여기고 오직 큰 것에 대해서만 감사하고 집착하기 쉽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감옥안에서 감사한 바울을 통해서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1. 빌립보 교회가 자신의 괴로움에 동참하는 민감함 때문입니다.

14절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괴로움”에 빠져 있습니다.
바울의 괴로움은 무엇입니까? 로마 감옥에서 당하는 괴로움입니다. 바울도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배가 고프고,춥고,아프고,외롭고,고통스러운 것을 우리와 같이 느끼는 사람입니다. 바울도 위로가 필요하고 섬김이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한 한 인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 선택하고 보낸 사도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나 인간 바울입니다.우리같이 괴로움을 당할 때 괴로워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괴로움의 바울을 섬겨주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냥 마음으로만 기도하는 막연한 섬김이 아니었습니다.에바브로디도를 바울이 있는 로마에 보내어 바울을 섬겼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많은 교회중에서 고난 중에 바울을 돕는 교회는 빌립보교회밖에 없었습니다. 15절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마게도냐의 첫성인 빌립보지역에 교회를 개척합니다.거기서 자주옷감을 파는 여자 루디아라는 여자가 바울의 전도를 받아 저와 그집이 다 세례를 받고 성도가 됩니다. 그러나거기서 바울은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다가 그 종의 주인들이 바울을 끌어다가 관원들에게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홀연히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는 사건이 생깁니다. 그리고 다음날 빌립보를 떠나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때부터 바울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지금의 상황은 이미 수년이 지난 상황입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빌립교 교회는 복음으로 인한 고생과 괴로움에 처해있는 사도 바울과 함께 그 괴로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렇게 빌립보 교회가 괴로움의 바울을 도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적인 교제”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4-5 “간구할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교제는 어떤 교제입니까?
따뜻한 인간관계로 맺어진 교제의 관계가 아닙니다.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교제”라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영적인 교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교제는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지속할 수 있는 교제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제와 세상의 교제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교회의 교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영적인 교제입니다.
세상의 교제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인간적인 교제입니다.
영적인 교제와 인간적인 교제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을까요? 얼마나 이기성을 극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고난에 처해졌을때에 이기성을 떠나 바울의 고난에 함께 참예하면서 교제했습니다.
종종 인간적인 교제는 상대방이 어려움에 빠지거나 자기가 좀 어렵고 힘이들면 금방 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속에서 종종 과잉 친교는 오히려 교회에 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중심의 친교는 결국 서로가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교제는 그 이기성을 극복한 교제입니다. 영적인 교제는 어려움이 있어도 괴로움이 있어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어려울때 기도하여 줍니다. 힘들때 함께 하여 줍니다. 연약할 때 힘이 되어 줍니다. 내가 받으려고 할때는 교제가 어렵습니다. 나는 약하기에 항상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먼저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먼저 나를 내려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려고 할때 교제는 가능합니다.

우리가 남의 괴로움에 동참하는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민감함입니다. 남의 필요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필요를 알고 채우는 데 앞장 섭니다. 민감함이란 촉각 미각 시각 청각 후각을 통해서 사물에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고든 맥도날드라는 목사님은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때“라는 책에서 민감함은 안을 들여다보는 기술이라고 합니다.민감한 사람은 마음의 눈을 갖고 있습니다. 민감한 사람은 귀가 열립니다. 민감한 사람은 감각이 열립니다. 그 민감함으로 상대방의 필요를 간파하여서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남의 어려운 필요를 알고 남을 돕고 이해하고 살피는 이 삶의 민감함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도 타고날때부터 민감함을 갖고 남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먼저 충분히 남을 살피고 관찰하는 관심이 있을때 가능한 것입니다. 나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남을 살피고 공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이웃과 공감하고 함깨 울 수 잇고 함께 나눌 수 있는 민감함의 기술은 하루 아침에 길러지는 법은 없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남의 아픔을 나의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이것이 성숙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괴로운 이웃 나와 다른 상대방을 향한 민감한 마음이 일어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민감함이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을 향해서 기도하다보면 그 사람을 향한 민감함이 생깁니다. 민감함이 생기면 그 사람을 향하여 마음일 열게 되고 때로눈 물질까지도 내어주게 되고 함께 삶을 공유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는 목장 교회 속에서 신령한 교제를 중심으로 나눔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목장 교회 속에서 서로 어려움 삶의 고통들을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제자훈련같은 소그룹모임 속에서 나의 삶의 어려움들을 나누고 함께 아픔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물질의 선물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16절 “데살로니가에 있을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바울은 여기서 빌립보교회가 보낸 물질의 정성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개인이 필요한 것을 보낸 것인데 그것이 바울을 감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이 물질을 밝히는 세속주의자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바울 서신 곳곳에서 자신이 물질을 포기하는 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살전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합니다.

특히 고전 9장에서는 바울은 말을 합니다. 사도로서 물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자비량으로 사역하였습니다. 그만큼 물질 때문에 오해받기 싫었고 물질 때문에 목회자로서 길을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물질로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물질을 받음으로 자신이 풍성하여 지는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빌립보 교회가 유익하고 번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20:35“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생일선물을 주는 부모의 마음이 선물을 받는 당사자보다 더욱 큽니다.폴 투르니에라는 상담학자는 “선물을 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7절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떠난 입장에서 그들에게 “물질”로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바울을 생각하고 도와준 것입니다.
왜 그렇게 물질로 도와주는 것입니까? 빌립보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복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바울도 사람이기 때문에 먹고 입고 생활해야 할 사람입니다.그러므로 그에게도 물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로 후원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는 빌립보교회가 보낸 선물은 18절 하반절에 보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빌립보교회가 드린 선물은 단순히 바울을 기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한 향기로운 제물인 것입니다. 여기 “향기”라는 것은 모두 구약성경에서 취한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제물을 드릴때 하나님은 그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빌립보교회가 선물을 바울에게 주었지만 실상은 바로 하나님께 드린 향기로운 제물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종니다. 여기 하나님의 종인 바울에게 선물한 것은 곧 주인되신 하나님께 드린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빌립보교회는 물질적으로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물질로서 남을 후원하고 도울 수 잇엇던 것은 그 것이 곧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빌립보교회를 보면 단지 물질이 있어서 나누고 베풀고 도우는 것이 아니라는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는 교회 영적으로 하나님을 진짜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어려운 가운데서 남을 돕는 삶을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은 그 물질의 후원을 받고 감사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빌립보교회가 물질로 어려운 교회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물질로서 자신을 후원하는 것에 대해서 큰 기쁨과 격려가 되었고 이렇게 감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자로서 교회를 통해서 물질을 통한 사례비를 받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꼬박 꼬박 매달 사례비를 받을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교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처음 목회지에 부임햇을때에 사례비를 받지 않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마음이 물질로 인해서 변질될까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나를 한번 시험하고 싶어서 1년에 4번 받는 보너스를 받지 않고 그것으로 학생들을 돕는 장학금으로 섬겨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3년을 하다가 제가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을때 그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기보다 문제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후임 목사님이 저와 같이 하지 않으니까 그것으로 문제가 되는 것을 보면서 제 마음에 깨달음이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이것은 좀 내가 다른 방향으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중지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교회를 통해서 물질의 후원을 받은 바울이 공개적인 서신을 통해서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바울이 겸손한 사람인가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가 먼저 감사할 수 있습니까?
깨달은 사람이 감사합니다. 감사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감사합니다. 감사를 계수할 줄 아는 사람이 감사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의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울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교회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교회와 선교단체와 같은 곳을 후원합니다. 적게는 5만원에서 수십만원에 이르기까지 매달 꼬박꼬박 후원을 합니다. 후원을 받는 대부분의 곳에서는 자신들의 기도제목과 함께 감사함을 잊지 않는 마음을 전해옵니다. 그 감사의 마음을 전달받으면서 그 교회와 그 선교기관들을 향해서 더욱 함께 하고 싶은 마음과 기도가 일어납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같지만 작은 감사의 마음을 전달받으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서울에 계신 제 동기 목사님이 한번은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강원도에 교회들을 좀 후원할테니 추천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교회 중에 두교회를 추천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매달 10만원 서울에 있는 동기 목사님 교회에서 후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는데 어느날 가을에 교회 앞에 고구마가 왔습니다. 발신지를 보았더니 후원하는 교회에서 보내 온 것입니다. 고구마 자루 안에는 감사의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기대하고 한 일은 아닌데 서로 감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가끔 헌신예배가 있으면 서울로 모셔서 설교도 하시고 여름에는 청년들이 수련회로 시골교회와서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면서 서로 교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는 1년이 지나도 감사의 편지 한 장 없고 감사의 전화 한통화 없는 것이었습니다. 후원하는 교회의 전도회에서 한번 그 교회를 방문했는데 그 입에서는 목회와 삶에서 ‘감사’의 삶의 고백보다는 ‘힘들다’‘어렵다’는 말만 듣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년 뒤에 감사가 없는 그 교회는 후원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종종 우리는 내가 약하다는 약자의식이 팽배하여서 나는 당연히 받아야 하고 그 받는 것에 길들여질 위험이 많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처음에는 감사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못된 습관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를 돕는 사람들로 인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것을 가만히 계수하다보면 정말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는 작은 것 하나라도 그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함으로 받으시고 감사함으로 나누시기 바랍니다.

3.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였습니다.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물질로 도와줄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가난하지만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남을 선대하는 자는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오른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좋아서 채워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바울이 감옥 안에서 이렇게 물질에 대해서 항상 초연하게 외치고 담대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물질은 필요하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일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물질로 인해서 하나님의 채우심을 기대하려면 바로 잘 사용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제일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길은 바로 가계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디에 돈을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희 집의 경우를 보면 1순위 헌금 하는 것 2순위 교육하는 것 3순위가 생활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의 돈 사용내용서를 보면 우리집의 관심 우리집의 가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어떻게 지출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선교하는 교회 전도하는 교회라고 하지만 선교비 전도비가 없다면 그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선교하고 전도하는데 투자를 많이 하는 교회가 바로 선교하는 교회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닌가는 어떻게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으로 몸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면 우리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청지기라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종입니다. 누구의 종입니까? 하나님의 종입니다.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깐 물질을 맡겨주셨습니다. 우리 물질의 100%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돈이 100만원이면 그 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인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청지기로 삼고 돈을 밭겨주신 이유는 바로 그 돈을 선용해서 청지기로서 주인을 대신해서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지기로서 우리가 돈을 소유하다보면 자꾸 돈에 대한 욕심을 갖게됩니다. 그래서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딤전 6장 17절에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른 청지기 의식을 갖은 사람은 돈을 소유할 때 그것으로 소망삼지 않습니다. 주인이 원하고 필요하는데로 잘 사용합니다. 빌립보교회처럼 감옥에 갇혀있는 선교사님을 위해서 쓰기도 하고 어려운 학생들을 돕기도 하고 필요한 교회당을 건축할 때 드리고 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 쉼터를 짓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있는 돈을 사용할때도 그것이 아깝거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돈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지만 필요하시면 또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필요로 하는 돈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먼저 우리가 바른동기로 구하고 바로 사용할때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공급하심을 믿고 날마다 베풀고 나누는 섬김을 실천하시는 감사의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감옥안에서 감사한 바울처럼 내삶의 현실에서 먼저 주님의 백성으로서 감사를 회복하시면서 날마다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