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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기념]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빌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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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빌립보서 1:1-11)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오늘은 6.25 5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날 새벽, 북한 공산군이 휴전선을 넘어 침략했습니다. 그때로부터 3년 동안 한반도는 죽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56년 만에 이렇게 회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평화로운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것과 북한의 굶주림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며 풀어가야 할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 숙제에 우리가 사용될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우리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남북한이 평화와 은혜로써 통일되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World Cup이나 올림픽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월드컵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응원’ 뿐이지만,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미주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할 일은 너무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분단’과 ‘분쟁’의 어두움이 끝나고, 평화의 기쁨이 넘치게 되기를 빕니다.

빌립보서는 “평화의 복음”입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슬픔의 사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평화의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오늘 그 사실을 중점으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빌립보서는 주후 61-63년,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 투옥되었을 때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 맨 마지막 부분에 바울은 로마로 호송되는데, 거기서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가만히 있지를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감옥에서 꼼짝도 못하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교회를 기억하며, 편지를 보내 목회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에게 있어서 ‘전도’는 생명 다 할 때지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었습니다.

바울의 곁에는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자주 면회 왔겠지요. 어쩌면 감옥 근처에 방을 얻어놓고 드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편지 서두에 “바울과 디모데”가 발신자라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대화하면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면, 곁에서 받아 적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팀’을 이뤄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빌립보(Philippi)는 마게도냐(Macedonia) 지방의 첫 번째 도시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아버지 빌립 2세(Philip II)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입니다.
로마의 첫 번째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가 빌립보를 로마의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빌립보는 황제도시의 축소판, 소 로마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럽 선교를 할 때, 첫 번째로 방문하여 복음을 전한 도시입니다. (행 16:11-15).

제2차 선교여행(AD 50-53) 때입니다. 사도행전 15:36-18:22에 이르는 본문이 다루는 내용입니다.

2차 선교여행의 동기는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행 15:36)는 것이었습니다.

바나바(Barnabas)와 헤어지고, 실라(Silas)를 택하여 수리아(Syria), 길리기아(Cilicia)를 거처 더베(Derbe)를 지났습니다. 드디어 루스드라(Lystra)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Timothy)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성령께서는 그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트로이(Troy)의 옛터로 생각되는 드로아(Troas)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마게도냐(Macedonia)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을 본 것은 놀라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럽에 그 첫 발을 디디게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Luke)가 바로 드로아(Troas)에서 사도 바울과 합류했습니다. 그러니까 일행은 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 이렇게 네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건너가 빌립보(Philippi)에 이르렀습니다.

이 도시에서 자주 옷(purple cloth) 장사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집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집을 오픈했습니다. 점 치는 귀신 들린 여자를 고쳐주었습니다.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과 실라는 밤새 찬양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서 그들을 묶은 것들이 풀어졌습니다. 간수는 죄수가 도망한 책임을 지고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간수를 말렸습니다. 간수가 엎드려 말했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여기서 그 유명한 선언이 나왔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이 빌립보에 세워진 교회를 기억하면서, 바울은 로마의 토굴 감옥에서 편지를 씁니다.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으로 자신을 정의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주님으로 계신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종입니다. 아멘.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와 함께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이 디모데는 그의 2차 선교여행 때 루스드라(Lystra)에서 만나 제자로 삼은 젊은 청년입니다.

그와 함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렀을 때 밤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드로아에서 배로 사모드라게로 직행하고, 이튿날 네압볼리(Neapolis)로 가서, 거기서 빌립보(Philippi)에 이른 것입니다.

유럽 사역의 첫 발걸음을 디모데와 함께 했습니다. 이제 유럽의 첫 번째 교회에 디모데와 함께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2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축복합니다. 은혜와 평강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오는 마음의 기쁨입니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평강”입니다. 기쁨입니다. 은혜입니다. 나는 금문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런 은혜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옥 안에서 쓰는 편지에서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평강을 얻기를 기도했습니다.

은혜(grace)는 신약(NT)의 주제입니다.
평강(shalom)은 구약(OT)의 주제입니다.
“은혜와 평강”을 빌어줌으로써, 온전한 성경말씀의 축복이 이뤄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강’은 현실을 무시하는 데서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의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평강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빌립보서에서 약속하는 평강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것입니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는 이렇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주여,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이런 감사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날 때마다 ‘기도’해 주는 관계입니다.

그 때, 빌립보에서의 사역 때의 아름다움이 두고두고 기억되어서일 것입니다. 빌립보에서의 목회가 위험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보람이 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할 때마다 ‘감사’입니다.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기도할 때마다 늘 기쁘다고 했습니다. 근심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중보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편안하고 기쁜 사람과는 ‘영적으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문을 열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귀합니다. 이렇게 서로 영적으로 ‘기억’되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5 .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이렇게 기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 복음을 받아들인 때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위한 일, 즉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끼리의 교제에도 한없이 기쁜 사람들은 ‘열심을 내는 사람들’ 중에 있습니다. 믿음이 마구 성장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은, 그 1. 계획과 2. 행동에 있어 모두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 6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 인생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라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감을 말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심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착한 일이란 곧 복음의 사역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 속에 녹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삶으로 가르쳐 주신 것은 1. 하나님을 정성껏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실천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이 열매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일은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그 일을 마칠 때까지 사랑의 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다.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이런 바울의 생각은 오히려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마음 속에는 빌립보 교인들이 늘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투옥된 것, 복음을 위해 사역함, 그 모든 일에 빌립보 교인들은 은혜 중에 ‘동참’했습니다. 함께 걱정하고, 함께 기뻐한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 이런 관계는 아름답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전도를 이해하고 도왔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버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돕는다는 것은 저들도 같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마음을 쓰시듯,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제 사도 바울의 기도제목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1. 너희 사랑을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사랑은 지식으로 풍성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지식이 없는 사랑은 맹목입니다. 위험합니다.

2.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무엇이 선한 것, 즉 좋은 것인지 여부를 판단해 알아야 합니다.

3.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순전함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모든 일을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의의 열매’ 곧, 하나님 말씀이 맺는 열매를 가득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가 품는 진정한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자리입니다. 모일 때마다 살아계신 우리 주 하나님께 경배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며,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우리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다윗과 사울을 비교하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범죄자였습니다. 밧세바와의 간음을 숨기기 위해 그의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계획적으로 살인했습니다. 내 후배 목사는 그 부분을 설교하다 울음을 참느라고 한 동안 설교를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죄를 묻지 않습니다. 그는 진정한 예배자였기 때문입다. 시편에 드러난 수많은 그의 시는 주로 진정한 예배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시편 51편은 용서를 비는 기도입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에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게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하여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시 51:10-12, 표준새번역개정판 

참 예배를 통해 그의 모든 죄는 다 씻겨졌습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를 정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멕베드>가 있습니다. 코더 성주 멕베드는 아내가 충동질을 해서 자기가 모시던 스코틀랜드의 왕 ‘덩컨’을 살해합니다.

왕의 심장을 찔렀던 칼을 빼는 순간에 그 피가 칼과 함께 자기 손에 뻘겋게 묻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며 돌아오자 부인은 말합니다. “멕베드!. 당신의 손을 어서 씻으십시오. 작은 물만 있어도 깨끗이 씻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샘물로 뛰어가면서 멕베드가 외칩니다.

“거대한 바다의 신 넵튠이여! 대양을 가지고도 큰 바닷물로도 내 피 묻은 손을 깨끗이 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깨끗이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 손에 묻은 피가 온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            주십시오. 주님께서 꺾으신 뼈들도 기뻐하며 춤 출 것입니다. 주님의 눈을 내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시편 51:7-9, 표준새변역개정판 

다윗의 기도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는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죄 문제는 예배를 통해서만 해결됩니다. 세상에 죄가 해결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이 없습니다.

타종교와의 대화 문제를 심심찮게 거론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정신이 큰 몫을 한다. 그러나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함께 예배드릴 수 없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전도’의 성격을 결코 넘어갈 수 없다.

왜 바울은 빌립보에 교회를 세웠습니까? 친교하라고 했습니까? 그는 예배 드리는 공동체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피로써 교회를 세우시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입니다. 죄 사함을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교회가 서야 합니다. 교회가 건강해야 합니다. 예배에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 때 모든 ‘제물’로써 죽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예배 때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북한에 교회가 서야 합니다.
그것 말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다양한 각도로 연구한 학자들은 한결같이 남북통을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지난 60년 동안의 ‘분단’으로 서로 ‘이질감’이 증폭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단순히 남한과 북한의 위정자들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위정자들은 이제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지난 주중에는 남한의 정치 지도자 한 사람이 북한을 ‘친구’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남한과 북한의 보통사람들의 이질감입니다. 이것은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서 적응할 수 없어 고통을 겪는 것으로 그 일부분을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질감 극복은 “하나님을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정신으로야 가능합니다.

교회가 바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지역에 교회가 서야 합니다. 우리는 북한 땅에 교회가 서서, 찬양과 기도와, 말씀이 전파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사역입니다.

결론
사도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깊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는 ‘평강’입니다.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십자가의 복음이 어떻게 평강의 복음이 되는지 깊이 깨달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맡아주신 것을 증거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금문교회를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참된 예배가 살아나기를 원하십니다.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깨끗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옥중에 갇혀서도 교회를 생각하는 바울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도 교회를 세우는 생각에 꽉 차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탓’하는 불평불만자가 아니라, 모든 일을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이런 담대함이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 날마다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아멘.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끝 날까지 함께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일에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종’으로 사용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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