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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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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초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웰빙은
지금도 사그라지지 않는 대형 신드룸이라고 합니다.
웰빙이 이 사회에 유행을 타게 된 이유는
그 만큼 삶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꿈꾸는 것입니다.
웰빙이 무엇인가? 일단 사전적 의미에서 보면
건강하면서 편안한 생활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전혀 낯선 말이 아니지요
우리가 누리지 못해서 그렇지 벌써 2000년 전에 사도 요한이
요한3서 2절에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가 잘되고
네가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하노라 ]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가 말하는 웰빙의 개념이
성경이 말하는 웰빙의 개념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국식 웰빙은 나와 내 가족만이 잘 살고 편안하면 된다는 웰빙입니다.
이걸 셀피시 웰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웰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사회에
웰빙이란 말이 나오기 전에 로하스(life of health and sustainbility)
란 말이 있는데 - 이건 지속가능한 건강의 삶이란 뜻인데
로하스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며 공동체적인 신체적 정신적 건강한 삶입니다.
정말 우리가 함께 웰빙을 누리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본문 말씀은 거기에 대한 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특징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이란 깨끗한 삶과 사랑의 실천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며
그 사랑이 형제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왜 우리가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하는가를
그 이유를 깨닫는 귀한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1. 왜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7-8절)

그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7절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절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2>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하나님의 속성,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 있습니다.(전지전능, 무소부재 영원불변)
공유적 속성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안 좋은 일도 있지요.
그런데 대배부분의 일들은 잊어버립니다만
어떤 일들은 잊지 못하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말이 있습니다.
한번은 아들과 함께 그것도 평생에 처음이긴 하지만
함께 드라이버를 하면서 점심도 먹고 온천도 같이 했습니다.
물론 경상도 사나이들이라서 말은 몇 마디 한 것은 없습니다.
단지 온천하면서 아버지 등 한 번 밀어줄래, 예,
그런데 그 날밤에 서울에 올라가서
그것도 역시 평생에 처음, 아들이 아버지한테 메일이 왔어요.
[ 아버지 오늘 가까이서 보니 나도 아버지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
아들이 아버지 닮은 것 지극히 정상적이지요.
그런데도 그 말이 왜 그리 잊혀지지 않을까요?
아마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그럴 것 같아요.
[ 하나님아버지, 나도 아버지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
지극히 당연한 말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 있지요.
이런 이야기 있지요.
나플레옹이 전쟁 중에 병사들 막사를 둘러보고 있는데
한 막사 안에서 병사들의 시끌벅적한 큰 소리가 들립니다.
병사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 가만히 들어보니
[ 보나파르트, 이 녀석, 죽일놈이니 살릴놈이니 ] 하고 욕을 합니다.
나플레옹의 성이 보나파르트 나플레옹입니다.
그래서 나플레옹이 이 녀석들 황제 앞에서 찍 소리도 못하면서
돌아서서는 이렇게 욕을 하는구나 싶어 막사 안에 들어갔습니다.
[ 야 이녀석들, 너희들 지금 뭐라고 말했나 ] 하고 노발을 하니
그 중에 한 병사가 하는 말이
[ 황제 각하, 고정 하시옵소서
우리 가운데 보나파르트가 있는데 그가 얼마나 개망나니인지
보나파르트 일등병을 욕하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나플레옹이 보나파르트 일병을 데리고 오라 해서 하는 말이
[ 야, 너 성을 바꾸든지 행동을 바꾸든지 하라 ] 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그래요. 오늘 본문말씀도 조금 강조한다면
[ 하나님 믿는다 하지 말든지 아니면 사랑을 베풀며 살든지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 서로 사랑할 줄 모르니
하나님이 욕을 얻어먹잖아 ]
한번은 어떤 글에 제목이
[ 불신자 목사, 불신자 장로 ] 라는 글이 있어 읽어 보았어요.
누가 가짜 목사가, 가짜 장로가 목사행세를 하고 장로 행세를 하는 모양이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고
왜 모여서는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찾으면서
왜 그렇게 싸우고, 왜 그렇게 용서를 할 줄 모르느냐? 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는 하나님 자녀임을
사랑하므로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내일의 하나님의 가족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삶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삶의 근원은 무엇입니까?(10-11절)

10절에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우리는 마치 자석에 붙은 쇠붙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사랑의 기질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질은 욕심과 안일과 교만, 이런 것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자만이 그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는데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보고 믿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롬5:8절에는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그래서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 확증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바로 이처럼 사랑하사, 어떠한 사랑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먼저 사랑을 강조합니까?
11절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으면 너희도 그와 같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요13:34절에
[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 ]

미국교회와 한국 교회와 다른 점 가운데 두 가지

1) 빨간 네온사인 십자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지붕 첨탑 위로 높이 솟은
큰 십자가가 그리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2) 새벽기도회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교회만의 특징입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복 받은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밤에 도시 밤 풍경 가운데 가장 눈에 띠는 것이
빨간 네온사인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를 통해 한국교회가 부흥된 것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것은
그렇게 빨간 십자가 표식도 유별나고 한국교회 교인들 기도도 유별난데
십자가의 정신인 사랑은 밑바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 받은 한국교회라면
그 은혜가 바로 사랑으로 나타나는 은혜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다는 것 - 신앙고백이 중요합니다만
그 신앙 고백만큼 삶을 통한 고백적인 삶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 무엇으로 나타내야 합니까?
3.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무엇으로 나타내야 합니까?(12-16절)
12절 [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
그 사람의 삶의 스타일은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입니다.
예수 스타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어색할까요?
훈련이 되지 못해서 그렇답니다. 특히 경상도 사람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이
느닷없이 포옹을 하면서 [ 수고하셨습니다 ] 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왠지 안겨드는 폼이 서투르고 어색했지만
난생 처음 아들한테 안겨보는 포옹인지라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도 기대하면서 집에 들어서니
아들이 전과 같이 본체만체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 애, 오늘은 왜 안기지 않니 ] 하니
히! 하며 어제는 선생님이 엄마 아빠를 포옹해주라는
숙제를 받았기 때문에 숙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예수 믿으면 사랑을 해야 한다 하니
사랑하는 척 하려니 어딘가 어색해요.
예수의 영이 내 안에 거하는 성도는 <5>
사랑의 실천과 훈련으로 사랑의 제스츄어가 자연스럽게 나올 줄 믿습니다.

13-16절 까지 말씀은
우리가 성령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나 또한 하나님 안에 거하므로
사랑하는 삶은 어색한 제스츄어가 아니라
몸에 베어진 삶의 스타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께 속한 자인 것을 알고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함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럼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4.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17-18절)

17절 [ 이로서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리라 ]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의 결과는 심판날에 담대함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부끄러움 없이 담대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설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또한 형제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죽음과 심판의 두려움을 지닌 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살펴봅시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이유는 열매를 얻고자 함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그를 믿는 자들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시는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나 열매 없는 나무, 저주 받을 수밖에 없듯이
우리가 주님 앞에 선 그 날에 사랑의 손길이 없다면
왼편 염소같이 영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사랑을 베푸는 삶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18절에
[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 놓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6>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면
내가 두려워할 대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환경에서도 나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리 거센 폭풍 속에서도 나를 보호하십니다.
사랑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승리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의학계에 <마라스머스>라는 이상한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주로 전쟁고아나
고아원에서 외롭게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나타난고 합니다.
증상은 신체발육이 부진하고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환자는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맙니다.
이 병은 영양부족이나 병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부모의 품에 안겨 재롱을 부리고
어머니의 살내음을 맡아야 할 어린이가 그것을 전혀 누리지 못할 때
이 병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남들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마라스머스와 유사한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사들이 밝히는 이 병의 치료법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 매일 사랑을 고백하며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
이 사랑의 말 한마디가 최상의 묘약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맛보지 못하고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삶은
벌써 영적으로 메말라가고 있는 삶입니다.
영적으로 죽어가는 삶 - 그기에 무슨 활력이 이겠습니까?
삶이 두렵습니까? 미래가 두렵습니까?
사랑하십시오, 사람을 베풀며 살아갈 때 행복한 삶이 찾아옵니다.
실버스타인의 작품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글 기억하시는지요.
한 소년의 집 근처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소년은 어린 시절 이 나무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고 그네를 뛰기도 했습니다.
그 그늘에서 마냥 즐겁게 놀았습니다.
나무는 그에게 이 같은 놀이터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자라서 그네를 다시 타지 않게 되고
이제는 나무 열매를 구하게 됐습니다.
다행히도 나무는 좋은 열매를 줄 수가 있었습니다. <7>
그래서 그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가 청년이 되어 집에 땔감이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했습니다.
내 가지를 베어다가 불을 때서 더웁게 하라고.
장년이 되었습니다.
돈을 벌어와야겠다고 나서면서 그에게 배가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했습니다.
나의 몸통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서 타고 목적지로 가라고.
그러고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멀리 떠난 소년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이 백발이 되어서 노인의 몸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밑동만 남아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밑동에 걸터앉아 쉬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5.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사랑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19-21절)
19절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깨달은 결과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거나 무관심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20절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까?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내 삶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반드시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
21절에 주께 받은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요한1서에 새롭게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 <8>
바로 예수님의 대강령입니다.
마22:34절 이하에서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한 말
[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의역한다면 뭐가 예수 잘 믿는 것이고?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삶, 남은 삶 -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마크 빅터 한샌> 박사는 미국을 대표하는 카운슬러요 저술가입니다.
베스트 셀러 -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의 저자
근간엔 이 한샌 박사와 잭 켄필드라는 분이 공저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Quicken soup for soul]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이것은 출간된 지 일 년 만에 백만부가 팔리고
"뉴욕 타임즈"에서 계속해서 베스트셀러로 소개한 책입니다.
그 책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샌 박사가 어느날 전화를 한통 받게 된다.
"나는 지금 덴마크로 가는 길이다. 얘야,
그냥 너 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전화했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전화했다." 아버지의 전화였다. 아버지는 반시간 동안 전화통을 붙들고 띄엄띄엄 똑같은 말을
일곱 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그냥 걸었다, 별일은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전화 걸었다,
아들은 이 전화를 받으면서 조금 짜증스러웠습니다.
바쁜 시간에 그 한 마디를 하느라고 30분 동안이나 전화통에 달리시다니... 아버지의 형님되는 큰 아버지가 107세까지 살았으므로
내 아버지도 족히 100세를 넘게 사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평소 아버지의 건강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별로 깊은 생각 없이 좀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건성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며칠 후에 그의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형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고향 덴마크로 가셔서
당신이 태어난 침대에 누워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한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날의 전화가 아버지의 마지막 음성이었는데
듣기 싫은 양 건성으로 전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뒤에 후회했지만 도리가 없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 그냥 전화했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걸었다. ]
좀 더 정신 차려 들었어야 하는 것을... 그는 가슴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바로 몇 시간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불러놓고 간곡하게 밤이 늦도록 길게, 길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이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뭡니까?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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