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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종류의 결국 (롬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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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영국의 밀란성당의 출입구 위에는 아름다운 세 아치위에 새겨진 글이 있습니다. 그 하나 위에는 아름다운 장미꽃들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들은 한 순간뿐이다.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연 마약이 그러합니다. 놀음이 그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인생을 영혼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밀란 성당의 또 다른 출입구 위에는 십자가를 조각해 놓았는데 그 아래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입니다. 주어진 한 생애를 살다보면 많은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문제들은 예고된 문제들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들은 예고되지 않은 채 졸지에 밀려와 버리는 것입니다. 걸어가는 길목에 홍해가 가로막듯 이스라엘앞에 골리앗이 밀려오듯 인생앞에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밀려오곤 합니다. 이렇게 밀려온 대부분의 문제앞에 우리는 방법이 없곤 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영원한 것만 중요하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의 선택이다. 인생의 7,80이 긴 것 같아도 순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그 인생을 안개와 같다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인생을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다했습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수고하여 무엇인가 대단 한 것을 보겠다 하지만 인생을 먼저 경험한 전도서 기자는 전도서 2:17절에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1:2절에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전 15:19절에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했습니다. 저는 지금 밀란성당의 출입구위에 새겨졌다는 세 가지 글들을 소개했습니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들은 한 순간뿐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은 지나가는 것이요, 영원한 것만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의 선택이다. 인생을 살만큼 살았다 여기시는 성도님들이여! 지금 말씀드린 이야기들이 어떤 느낌이 옵니까 맞아! 수긍은 하면서도 여전히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 마음을 빼앗겨 있지는 않는지요? 지금 밀려온 문제앞에 그것이 지나가는 것일꺼야 하면서도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처럼 주저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또 하나 모든 것이 이 땅에서 결판나는 것처럼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그러하진 않습니까? 눅16장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평생 부자로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던 부자는 죽어 지옥에 갔고 한평생 거지로 살면서 병들어 지쳐 부자의 상에서 버려지는 음식들로 하루 하루를 살던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갔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이 땅의 삶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대로가 좋아 영원했으면 했던 부자의 삶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병들어 지친 나사로의 삶도 같이 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이 땅의 삶이 끝이 있었지만 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죽어 한 사람에게는 천국이 그리고 또 한 사람에게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천국이 지옥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결정이 나 버렸기 때문에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이 땅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결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부자의 애절함이 무엇입니까? 지금 저 땅에 살고 있는 내 형제 다섯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어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엄마뱃속에 잉태되어 있는 아이는 엄마뱃속이 아무리 편안해도 이 땅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뱃속에 있는 태아가 인정하든지 안 하든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이 땅의 7,80 여러분이 인정하시든지 못하시든지 이 땅의 삶은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일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믿으면서 영원을 맛 보았습니까 참 영원을 맛 본 사람에게는 이 땅의 것들이 모습들이 우습게 보이곤 합니다. 저는 어릴 적 딱지치기 구슬치기에 있어서는 도사였습니다. 그것이 제게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것때문에 울고 싸우곤 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울거나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수준입니다. 이 땅입니까? 하늘입니까? 영원입니까?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보여지는 것 또 하나는 이 땅에서 누가 잘 살았는가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결판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땅에서는 부자는 부자이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지만 그런데 이것이 영원함속에서 보면 역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 남을 해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아닙니다.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던 나사로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도우심입니다. 나사로를 하나님이 도우셨을까요? 이 땅만 생각하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사로에게 잠시 인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을 주셨습니다. 한 사람은 지옥 한 사람은 천국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요 부자는 부자였기에 지옥간 것이 아닙니다. 부자의 입에도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노래하며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나사로는 병들고 어려웠기에 천국에 간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두 종류의 삶의 결국:  사망과 영생이며 천국과 지옥입니다.

천국 그리고 지옥입니다. 이것은 부자와 나사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 종류의 삶의 결국입니다.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가능성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인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함께이거나 중간은 없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언제나 그러합니다. 모든 사람은 모래위에 지은 집이든지 반석위에 지은 집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은 넓은 문으로 가든지 아니면 좁은 문으로 가든지 입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필연적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 하나입니다. 요일5:12절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복음이 없고 있고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세상은 사소한 차이로 가득합니다. 국적이나 빈부의 차이 그리고 사상의 차이 키가 큰 사람 중간인 사람 작은 사람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입장에서 보면 구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모든 것은 하나입니다. 단 하나 예수를 믿느냐 믿지않느냐입니다. 복음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냐 비 그리스도인냐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분명한 이 진리를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는 땅에서는 전라도냐 경상도냐 중요할 지 모릅니다. 여당이냐 야당이냐 중요할 지 모릅니다. 보주주의자냐 진보주의자냐 중요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울타리 밖에서 보시면 전라도나 경상도의 의미는 없습니다. 단 하나 한국사람이냐 아니냐입니다. 이 넓은 의미에서 보십시오 영원의 의미에서 보십시오. 안개와 같은 이 세상에서 가난과 부유 그리고 건강과 질병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보시는 눈은 영원과 함께 보시기에 언제나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스스로 늘 가난하고 힘들다 하던 서머나 교회를 향해 실상은 부요한 자라 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세상에 보기에는 스스로 보기에는 가난한데 부요를 말씀하십니까? 영원을 함께 계산하고 영원을 함께 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라오디게아의 부요함 앞에서도 단호합니다. 너의 실상은 헐벗고 굶주린 자라 합니다. 영원을 함께 보시기에 가능합니다. 만약 이 땅만 계산한다면 하나님은 나의 도우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나사로는 이름과 그의 삶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두 종류의 결국은 천국과 지옥입니다. 천국을 모르면 모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옥을 모른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모릅니다.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요 안타깝게도 여러분의 삶의 결국은 정해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느냐 못하느냐 인식을 하느냐 못하느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있다는 것입니다. 출발은 같이 했던 지금은 비슷할지 모르나 종점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합니다. 그런데 왜 부자는 지옥에 갔을까요? 나사로는 왜 천국에 갈 수 있었을까요?

  두 종류의 삶의 결국: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의 삯은 무엇을 말합니까? 급료를 말합니다. 죄의 삯은 죄의 급료입니다. 죄라는 주인이 자기가 부리는 종에게 급료를 지불하니 지불할 급료는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유린당하고 결국은 멸망을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을 속입니다. 사단은 실제로 주는 것보다는 주는 것처럼 착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 하듯 세상의 만국과 기쁨 그리고 쾌락 풍요들을 약속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얻을 수 있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작성하신 계약서에도 단호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죄의 삯은 월급의 개념을 넘어 군인들에게 배당되는 배급입니다. 정해진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이 사망은 육신적 죽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죽음을 말합니다. 지옥의 심판을 말합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죄가 지불할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죄의 문제를 해결받은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본질 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용서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더 성실해져서가 아닙니다. 더 착해셔서가 아닙니다. 십가가의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것입니다. 그것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죄에서 벗어나 은혜안에 있는 나를 보는 것입니다.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이사와 있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이삿짐을 싼 일도 없습니다. 노력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는 내 죄를 용서하고 어느 날 은혜의 자리에 데려와 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왜 지옥에 갔습니까? 부자는 지옥에 가셔야 내가 왜 지옥에 왔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 저 땅에 있는 형제들에게 이것을 알려주어 고통 받은 이곳에 오지 않게 해야 했습니다. 눅16:30에 부자는 말합니다.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리니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합니다. 부자는 무엇을 알려주고 있습니까? 저들이 있는 지옥에 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을 하라고요? 그렇습니다. 회개입니다. 부자 자신은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죽어서야 안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자는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채 죽음을 맞으면 부자 옆집에 가는 것입니다. 내가 억만 죄인임을 알고 용서의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개인적 용서를 경험했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큰 용서를 경험하십시오. 큰 예수를 만날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 그것까지 용서하십니다. 더 큰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크게 용서한 것만큼 내가 받은 용서의 은혜 또한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이제 우리가 받은 것은 없습니다. 내가 받을 것을 예수그리스도가 대신 받으셨습니다. 다만 나는 은혜만 받았습니다. 그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지옥이라해서 천국은 선의 삯으로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이니 신령한 은혜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 수고하는 자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사인 천국은 영생의 삯이 아닙니다. 은혜인 것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삯을 받기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삯을 받은 자이기에 수고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옵니다. 구원의 단비입니다. 내리는 구원의 단비로 인하여 너무 감격합니다. 그냥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릇을 가지고 가서 받았습니다. 힘들었지만 받았습니다. 묻겠습니다. 하늘에서 준 것입니까 내가 받은 것입니까? 분명 내가 받는 것 같지만 하늘에서 준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옵니다. 귀찮습니다. 그냥 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 비를 받을 그릇은 있었지만 그 구원의 단비를 환영하지 않고 그릇을 엎어 버렸습니다. 묻겠습니다. 하늘에서 안 준 것입니까? 내가 안 받은 것입니까? 내가 안 받은 것입니다. 그 구원의 단비를 용서의 단비를 거절하여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비 그리스도인들을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사로 주어지는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영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합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얻어지는 선물입니다. 요14: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말씀을 자세히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많은 길 중에 하나의 길이 아니며 많은 진리 중에 하나의 진리이거나 많은 생명 중에 하나의 생명이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길이 무엇입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가르치던 사람이라하여 길과 진리는 될 수 없습니다. 공자님께서 하신 말씀 중 내가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나도 나르반(열반)을 향하여 가르치는 선이라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공자나 부처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애쓰시던 분들입니다. 다만 참 진리이신 예수가 없는 진리 예수가 없는 선 예수가 없는 길을 찾고 가르치다 한 평생을 마무리 했을 뿐입니다. 행4:12절에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했습니다. 여기에 사람들은 불만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너무 독선적이라 합니다. 왜 하나될 줄을 모르냐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천국이 있으면 불교에는 극락이 있지 않은가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이라 합니다. 천주교를 보라 얼마나 합리적인가 부처님 생일을 앞두고 추기경이 나와서 축하메세지 하는 것을 보라 교회또한 다 좋은 사람되라는 것 아니냐 좋은 말씀 들으러 가는 것 아니냐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만약 거기에서 머문다면 기독교야 말고 가장 아름답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믿던 안 믿던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또 이야기 합니다.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가지 있다 합니다. 서울로 가는 길이 여러가지 있다합니다. 그렇습니다. 서울로 가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 길은 하나입니다. 예수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정리하십시오. 공자님은 부처님은 길과 진리를 발견하고 싶어 도를 닦고 또 가르치시던 분들이었지 길이며 진리며 생명은 예수그리스도안에만 있습니다. 영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두 종류 삶의 결국 : 영생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영생이 있습니까? 예수 우리 주안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안에 있는 영생이 내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사요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요5: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합니다. 요3:16절에서는 무어라 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예수를 믿는 믿음외에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왜 천국에 갔습니까?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으로 압니까?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국에는 모세도 다윗도 사무엘도 있을텐데 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상징적으로 나사로는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름의 뜻의 하나님의 나의 도우심입니다.

오늘 말씀 롬3: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두 종류의 삶의 결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 종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열차에 타고 계십니까?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사람은 죄의 열차에 타고 있는 것이며 결국은 사망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은 사람은 구원의 열차이니 종점은 천국입니다. 영생입니다. 그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나도 아브라함의 품에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열차에 타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열차를 바꾸어 탈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죄에서 자유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마귀에게서 예수님의 품으로 입니다.

그리스도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 이것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 아멘 -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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