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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 (고전 9: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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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크리스챤 선수들이 열심히 뛰는 것이 긍지이고 자랑이고 자부심입니다. 믿음 좋은 이천수 선수하고 안정환 선수가 첫 원정경기에서 자랑스런 두 골을 넣어서 하나님 앞에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경기가 끝났을 때 네 명의 선수, 이영표, 이천수, 이호, 송종국 선수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감사 기도하는 모습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있을 듯 합니다. 우리 선수들이 끝까지 잘 싸우고 부상당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도록 격려해 주시고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번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가 극명하다는 것입니다. 경기 종료 휘슬이 불었을 때, 이긴 팀은 너무 좋아서 얼싸안고 감격합니다. 덩실 덩실 춤을 춥니다. 그런데 패배한 팀은 어깨가 축 늘어져서 시무룩한 얼굴로 쓸쓸히 경기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그것을 볼 때 인생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됩니다. 경기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를 가르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월드컵에서는 오늘 패배해도 다음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브라질이 우승을 했는데 이번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또 아르헨티나가 그 때는 16강에도 못 들었는데 이번에는 참 잘합니다. 한번 잘 못해도 다음번에 다시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회복할 수 없는 경기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신앙의 경주는 마지막에 실패하면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경기장과 같습니다. 우린 인생의 경기장, 사업의 경기장, 신앙의 경기장에서 오늘도 우리는 싸우고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을 통해서 경기장의 모습을 우리 신앙의 모습으로 비유하여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와 로마 지역을 많이 돌아다녀 보았는데 고린도에서는 2년마다 쓰미안이라는 큰 경기가 열리곤 했습니다. 로마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 경기를 보면서 사도바울은 경기에 승리하는 자를 보면 신앙의 승리자도 저런 모습이 되어야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 성경에서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딤후 4:7에 보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했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앞에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위의 본문을 임종을 앞두고 기록했습니다. 죽을 때가 되어 인생을 돌아볼 때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경기자의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에베소 6장 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씨름에 비유하고 있는데 아마 그 당시에는 큰 경기중에 속했던 것 같습니다. 씨름은 바로 우리 영적 싸움의 모습을 비유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신앙의 경기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지막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자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 칭찬과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자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신앙의 경기장에 서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고독한 이 길을 열심히 달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사울 왕은 출발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도에서 실격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윗왕도 출발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어려운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범죄함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회개하고 다시금 승리자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두 제자 중에서 수제자로 많은 사랑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어린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위기였습니다. 신앙의 경기장에서 실격당할 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가서 고기잡이하며 생활하려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이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내 양을 치라”고 그에게 다시금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신앙의 경기에서 실격당할 뻔 했지만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다가 마지막에 그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달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 거꾸로 달렸습니다. 순교당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신앙의 경기장에 서 있습니다. 아니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승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경기에서 승리자가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첫째는 상급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를 잘해 좋은 성적이 나오면 선생님, 부모님께 칭찬받을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좋은 학교에 입학하면 그 영광을 생각할 것입니다. 상급을 바라보기에 힘들고 어려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4절에 보니,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경기에도 상급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상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이 있을까요? 성경 25절 말씀 읽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아멘.

  로마나 고린도에서는 경기의 승자에게 상을 줍니다.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을 씌워줍니다. 그것은 최고의 영예였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부단히 노력하고 훈련했겠습니까? 최고 영광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월계수 잎은 얼마 못가서 시들어 버립니다. 그것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썩을 면류관이 아니라 썩지 않을 불멸의 면류관을 우리는 쓰고자 함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기에서 승리하면 바로 우리의 머리에는 불멸의 면류관이 씌어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불멸의 면류관이 기다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에게 씌워질 영광의 면류관이요, 의의 면류관이요, 불멸의 면류관인 것입니다. 우리에겐 영광스런 구원이 있습니다. 주님의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내가 네게 큰 일을 맡기겠다, 네가 잘하였도다 하고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광스런 상급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신앙의 경기를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상 얘기를 하면 시무룩해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상이란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목사님, 우리가 꼭 상을 받아야겠습니까? 유치원 때는 유치하니까 상을 좋아하지, 우리가 어른인데 무슨 상이 필요합니까?”하고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른에겐 상이 필요 없을까요? 여러분에게 누가 노벨상을 주면 거절하시겠습니까? 그것은 가문의 영광이요 민족의 기쁨이니 거절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벨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상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주님은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기장에서 마지막까지 승리자가 된다면 우린 불멸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상급을 바라보시고 승리의 걸음을 재촉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신앙의 경기장에서 승리자가 되려면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26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아멘.

  사도 바울은 이 글을 쓰면서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마라톤 경기와 복싱입니다. 42.195km를 달립니다. 아무리 먼 거리를 달려도 거기엔 분명한 목표 지점이 있습니다. 목표 지점을  향해서 달려갈 것입니다. 엉뚱한 곳으로 가면 안 됩니다.
  또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함은 복싱을 말합니다. 복싱 선수는 주먹을 허공에 날려선 안 됩니다. 상대의 얼굴을 향해서 정확히 주먹을 날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한 목표, 목적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신앙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우리의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선수들은 종종 실격당할 때가 있습니다. 활을 쏘는데 남의 과녁에 활을 쏘아 명중하더라도 목표를 잘못 잡았으니 실격입니다. 축구 경기에선 종종 자기 골대를 향해서 골을 차 넣는 경우를 봅니다. 자책골입니다. 달리기 선수가 아무리 급하더라도 엉뚱한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바른 길로 가야될 것입니다.

  저는 군에 입대해서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 받았다가 첫 휴가를 나올 때를 기억합니다. 집에 갈 생각에 너무 좋아서 기차를 탄다는 게 엉뚱한 기차를 타서 다른 곳으로 한참을 갔습니다. 너무 좋아서 확인도 안하고 탔지 뭡니까? 빨리 가려다가 한참을 늦게 가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그 때 얻은 교훈이 있다면 “아무리 바빠도 기차는 확인하고 타자!”였습니다.

  세 번째로 신앙의 경기장에서 승리자가 되려면 우리는 절제해야 합니다.

  25절에 보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절제가 참 중요합니다. 경제적으로 절약하는 것도 절제입니다만, 우리가 모든 삶을 적당히 하는 것, 순리대로 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안 좋습니다. 밥 먹는 것은 건강에 좋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과식이 되고 문제가 됩니다. 비만에 걸리게 됩니다. 취미 생활도 참 좋은 것입니다만 그것이 지나치면, 절제하지 못하면 문제가 됩니다. 낚시를 너무 좋아해서 토요일부터 하느라 주일 예배를 나오지 못한다면 절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적당히 해야 합니다.

  우스겟 소리입니다만, 어떤 교회 권사님이 바둑을  참 좋아했습니다. 토요일이 되어 직장 끝나면 친구들 불러 바둑 두는 게 낙이었습니다. 이런 낙도 없으면 어찌 사나 하고 주일 새벽까지도 바둑을 두다가 잠깐 눈 붙였다가 교회에 나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정신없이 자고 나왔는데 그날따라 교회 기도할 사람이 없다고 대표 기도를 시키더랍니다. 그래서 강단에 졸린 눈을 억지로 비비고 올라왔더니, 앉아있는 교인들이 꼭 바둑판같이 보이더랍니다. 의자가 있는 것이 바둑 줄 같고, 검은 머리는 검은 바둑알, 흰 머리는 흰 바둑알처럼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비몽사몽간에 기도를 하긴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해야 하는 것을 세상에 자기도 모르게 아다리 해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취미가 지나치면 신앙생활, 경건 생활에 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장관을 지낸 요시카 피셔라는 유명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오래 전에 쓴 책이 ‘나는 달린다’입니다. 이 분은 아주 어려운 가정에서 출생했습니다. 부모가 푸줏간 주인이었는데 고등학교도 다 못 마치고 중퇴했습니다. 그리고는 노동일부터 택시 운전까지 안 해 본일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을 해서 35세에 연방의회 의원으로 진출하여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마 후에 젊은 나이에 환경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장관이 되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때론 공격도 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먹기 시작했습니다. 마음껏 먹기 시작했습니다.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기 시작했는데 그랬더니 몇 년 사이에 엄청나게 살이 찌기 시작했는데 그가 보통 181cm인데 몇 년 안 되어 113kg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곳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와의 갈등도 생겼습니다. 아내는 당신은 자기 몸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장관 구실을 하느냐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 몸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겹쳐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요시카 피셔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내가 내 몸부터 다스려야겠다, 절제 해야겠다.’ 해서 목표를 세웠습니다. 앞으로 1년 안에 75kg의 몸을 만들겠다는 작정을 해서 매일 몇 시간씩 끊임없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75kg의 정상적인 체구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민첩한 정치인, 인기 있는 정치인이 되고 많은 사람에게 환영받는 정치인이 되어서 외무부 장관과 부총리까지 지내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입니다. 자기 몸 하나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절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늘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범죄의 유혹을 절제하지 못하면 언제 우리가 실격 당할지, 넘어질지 모릅니다. 우리가 게으름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게으름의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음식의 절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적 생활에 방해되는 것들을 절제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만드신 고 김용기 장로님은 게으른 것을 못 보셨다고 합니다. 그 분이 제일 못 봐주는 것이 게으름이었답니다. 제 시간에 안 일어나고 늦잠 자는 것을 못 보았답니다. 그 분은 지나가다가도 누워있는 돌을 못 지나가셨답니다. 돌을 세워놓으며 “이 놈아! 왜 누워있느냐”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게으름의 유혹도 절제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면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신앙의 경기장에서 마지막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절제라는 의미 속에서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 성경 27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 아멘.
  남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오히려 내가 버림이 될 까 두려워함이라 그랬습니다. 실격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직분자로, 제직으로 봉사했지만 남은 전도해서 가르쳤지만 나 자신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실격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우리가 월드컵 보면서 제일 안타까웠던 장면이 무엇이었습니까? 한국과 토고가 경기하는데 토고 선수가 한 사람이 심하게 파울을 해서 퇴장을 당했습니다. 그 표정 한번 보셨어요? 그 당황스러움, 그 어이없는 놀라는 표정... 쓸쓸하게 퇴장합니다. 그러고 나서 토고는 여지없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아르헨티나와 세르비아가 경기하는 것을 봤는데 워낙 실력 차가 나서 3:0으로 이기는데 또 세르비아 선수가 심하게 파울을 해서 퇴장을 당하고 나서는 6:0으로 졌습니다. 나 한사람이 경기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팀 전체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언제가 98년도 월드컵에선가 하석주 선수가 첫 경기에서 왼 발 슛으로 첫 골을 넣었습니다. 너무 좋아했습니다. 너무 흥분했던지, 그 후에 파울을 심하게 해서 퇴장 당했습니다. 그 때 내리 져서 중간에 차범근 감독이 경질당하는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실격 당하게 되고 그것은 많은 이에게 해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제란 무엇입니까? 규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5절에 보니,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절제가 참 중요합니다. 요셉도 엄청난 유혹을 받았습니다. 보디발의 부인이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그를 유혹했는데 요셉은 그것을 뿌리쳤기에 그것을 거절했기에 요셉은 애굽의 위대한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앙의 경기에서 절제할 것을 절제하고 거절할 것을 거절함으로 승리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경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24절 말씀 다시 한번 읽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아멘.

  달음질을 원어로 보면 힘써 달리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달리십시오. 최선을 다해 달리십시오.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특별히 마라톤 같은 것은 고독한 경기입니다. 축구는 좀 낫습니다만, 마라톤은 혼자 42.195km를 달려야 합니다. 목마르고 피곤하고 주저앉고 싶고 고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고 격려 하고 교제하지만 우리 신앙생활도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근심과 고통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홀로 이 고통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고독한 경주자의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그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혼자 달리고 있는 것 같지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저 아무개 집사가 마지막까지 승리하나 보자.’ 하십니다. 아무개 권사가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가는지 보고 계십니다. 아브라함과 요셉과 이삭과 엘리야와 이사야와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 힘든 걸음 달려왔는데 몇 번 넘어질 뻔하고 실격당할 뻔 했지만 “아무개 집사야, 너도 끝까지 승리하기 바란다. 거기에 시험 들지 말고, 유혹당하지 말고 끝까지 목표 지점에 골인할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힘을 얻습니다. 신앙의 경주, 최선을 다해 달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새가족 환영주일입니다. 새가족들은 아직도 교회에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람보고 실망하고 넘어지지 말고 먼저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두 번째는 말씀을 읽으십시오.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 보니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배우시고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하루에 세 장씩 읽으면 일년이면 성경 한 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각 식사 전에 한 장씩 읽는다고 합니다. 직장에 가서도 꼭 출근해서 성경 한 장을 읽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읽지 않으면 아침을 굶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을 승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했습니다. 우리가 호흡하고 숨을 쉬듯이 늘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제자들이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어 기도하라 했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말씀을 열심히 읽으십시오. 그것을 내 삶의 양식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바로 그것이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신앙의 경기장에 서 있습니다. 저 멀리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계십니다. 쓰러지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내게 다가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마시고 신앙의 영적 경기에 승리하시는 그래서 불멸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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