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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기념주일] 싸우시는 하나님 [출 14:10~14, 계 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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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든 한국전쟁 56주년 기념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편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풍전등화의 위기를 벗어나게 하시고 지금 이렇게 성장한 나라, 성장한 교회를 보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돌이켜보면 한국전쟁은 하나님이 싸우신 전쟁이었습니다. 위험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 대신 싸우신 것입니다.

  1945년부터 2000년까지는 2,912주입니다. 이 오랜 기간 동안 지구상에 전쟁이 없었던 주는 3주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구인들은 온갖 싸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말싸움, 몸싸움, 사랑싸움, 부부싸움, 폭력과의 전쟁, 물과의 전쟁, 가난과의 전쟁 등 이 지구상에는 그 외의 기상천외한 싸움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하였습니다.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을 피렌체 출신의 상원의원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의 즉각적 반응은 “그 망원경은 전쟁할 때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겠군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전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잔인성과 파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인간의 필연지사입니다.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며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전쟁은 어떤 평화보다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전쟁은 모든 자에게 피해를 줍니다. 승자도 패자도 항상 피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결코 편안치 못한 것이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나라 안팎이 싸움과 전쟁이 끊임이 없습니다. 심지어 은혜가 충만해야 할 교회도 싸움이 충만합니다. 학교에서 싸움을 잘하거나 뛰어난 것이 있어 또래를 잘 이끄는 우두머리나 그 무리를 일진, 찐 혹은 짱이라고 합니다. 아이들 사이에서 이런 아이들은 굉장한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싸움은 기술이 좋은 싸움이 잘 하는 싸움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싸울 줄 알고 싸워야 할 때 싸우는 사람이 진짜 싸움꾼입니다.

  하나님은 싸움꾼이십니다.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원수 마귀와, 언제나 이기는 싸움을 싸우십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싸움은 선택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평하신 마음으로 싸우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싸우시고 반드시 해야 할 싸움을 선택하여 싸우시는 우리의 싸움꾼이십니다.

첫째, 하나님의 싸움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에는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싸움은 대상이 분명합니다. 싸움의 목적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아무하고나 싸우지 않습니다. 아무 일에나 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과 싸우십니다. 우리를 구워하시기 위하여 싸우십니다. 존 번연은 “이상하다. 마귀와 더불어 대적해야 할 성도들이 자기끼리 싸우고 있다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마귀와 더불어 대적하기 위하여 싸우십니다.

  밥 얀디안은 ‘다윗, 섬김의 리더십’이란 자신의 책에서 교만한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싸움의 상대가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싸움의 상대가 잘못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싸움은 언제나 상대가 명확했습니다. 악의 세력인 마귀입니다.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렸을 때 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3년 동안 교육을 받고 왕궁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부왕 필립은 알렉산더가 얼마나 교육을 잘 받았는가 시험하였습니다. 철학, 수학, 점술 등을 물어 보았지만 배운 것이 시원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스승의 뒤만 따라다녔다고 하였습니다. 실망한 필립은 아들을 직접 교육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부왕은 알렉산더를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서 종일 전투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언덕을 경계로 양군이 노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보초병이 임금님의 막사에 급히 뛰어들어 와서 필립 왕을 깨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덕 너머에 적들이 모두 피곤하여 잠들어 있습니다. 지금 공격하면 승리할 것입니다”. 필립 왕은 못들은 척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왕자 알렉산더가 일어나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승리를 도적질하고 싶지 않다. 내일 아침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기겠다”. 아들의 이 말을 들은 필립은 기뻐서 벌떡 일어나 알렉산더의 등을 두드리면서 “너는 과연 위대한 아들이다. 나는 일국의 왕이지만 너는 세계의 왕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잘 싸우는 사람은 비겁하지 않습니다. 정정당당합니다. 오래 전 미국에서 ‘두순자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두순자씨는 한국인 이민자로 착실하게 가게를 운영하며 살던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어느 아이가 들어와서 물건을 훔쳐가는 것을 보고 두고 가라고 했지만 계속 도망하자 등 뒤에서 총을 쏴서 아이를 죽였습니다. 이 사건이 미국 사회에서 아주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지금은 아무데서나 총을 쏘지만 그 때만 하더라고 절대로 등 뒤에서는 총을 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부 활극 영화를 봐도 돌아서서 정면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이 총잡이들의 윤리입니다. 싸움에도 윤리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잘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항상 정정당당하십니다. 그리고 항상 이기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열 가지 재앙을 애굽 사람들에게 내리십니다. 피, 개구리, 이, 파리, 생축병, 독종, 우박, 메뚜기, 암흑, 장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열 가지 재앙은 갈수록 강해지는 재앙입니다. 하나님이 왜 애굽 사람들에게 그렇게 야박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심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싸움은 우리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이라면 하나님은 지금도 싸우십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마귀와는 끝없는 대결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전쟁의 죽음 같은 기도입니다. 땀이 흘러 피가 되는 결사적 기도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싸움이 그렇습니다. 사탄은 “내려와 보라”고 유혹하지만 예수님은 내려가지 않고 끝까지 이기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원수를 다 이기고 싸움에서 이기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의 그 싸움은 우리가 시험당할 때, 유혹이 밀려올 때 그 때마다 막아주시고 싸우십니다. 우리 속에는 선과 악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내가 싸우려고 하면 판판이 집니다. 나는 도저히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 대신 싸우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승리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은 그 싸움을 사탄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하십니다.

  지금 세계는 완전 싸움터입니다. 선심이 오프사이드 기를 들어도 주심이 인정하지도 않고 한 골 먹고 완전히 흐름을 빼앗은 월드컵도 싸움터입니다. 무한경쟁 시대의 경제도 싸움터입니다. 앞 다퉈 차지하는 최신정보도 싸움터입니다. 혹자는 현대 세계는 정글법칙에 의해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참혹한 전쟁터입니다. 세렝게티 초원은 매일 아침 생사의 달리기가 벌어집니다. 세렝게티 초원에 살고 있는 임팔라나 가젤은 아침에 눈을 뜨게 되면 달립니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면 사자도 눈을 뜹니다. 사자는 가장 느리게 달리는 임팔라나 가젤보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자이거나 아니면 임팔라나 가젤입니다. 잡아먹는 사자이건, 잡아먹히는 임팔라나 가젤이건 상관없이 매일 아침 눈만 뜨면 달려야 합니다. 세렝게티 초원의 동물이나 지구촌의 인간이나 다 싸움판에서 무한 경쟁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프랑스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의 4대 인물은 나폴레옹, 드골, 잔 다르크 그리고 루이 14세라고 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첫째는 싸움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독재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국민을 위한 독재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싸움은 자신을 위한 싸움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싸움은 자신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싸움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싸움에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14절에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까? 우리가 나서면 오히려 방해가 되고 그르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보다 하나님 한분이 더 강하십니다. 복음 성가에는 “나는 비록 약하나 우리 주는 강하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 원수를 다 모아도 하나님 혼자서 이기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강하시니 우리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다윗은 전쟁의 사람입니다. 그는 싸움을 많이 했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장년기에는 왕이 되어 블레셋과 쉴 새 없이 싸웠습니다. 노년이 되어서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시 쫓겨 다니고 싸웠습니다. 다윗은 싸울 때마다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역대상 14:10에는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이르되 블레셋을 치러 가리이까”라고 합니다. 14:14에는 “다윗이 또 여호와께 묻자온대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언제 올라가리이까”고 합니다. 다윗의 전쟁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다윗이 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내가 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시게 해야 합니다. 변방을 꼬드겨 싸움에 개입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개입하십니다.

  빅토르 유고는 “오늘의 문제가 무엇이냐? 싸우는 것이다. 내일의 문제가 무엇이냐? 이기는 것이다. 모든 날의 문제가 무엇이냐? 죽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겨도 죽습니다. 인간의 이김 그 자체는 절대적 의미는 아닙니다. 제가 헌병이었던 건 다 알고 계시지요? 제가 근무할 당시 수도경비사령부의 헌병대에는 운동선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권투선수였던 유재두, 허버트강, 홍수환, 염동균 등이 한 부대에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권투시합을 하고 나면 이겨도 얼굴이 일그러지고 며칠은 아파서 고생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면 더 아프겠지만 이겨도 아픕니다. 이것이 세상의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시라소니’를 아십니까? 이분의 본명은 이성순인데 제가 전도사일 때 영락교회 교인이었습니다. 이분의 아드님이 지금은 목사가 되어 아주 열심히 목회를 잘 하고 계십니다. 시라소니는 고양이 과의 야생 맹수입니다. 흔히 새끼 호랑이라고 하였지요. 시라소니 이성순은 한 때는 김두한 보다 싸움을 잘 한다고 하였답니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서는 편찮으시고 싸움도 못하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싸움꾼입니다.
  영국인들은 “워털루 전쟁의 승리는 이미 이튼 고등학교의 운동장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전쟁은 이미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기고 시작하는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시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디모데전서 4:8에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라고 합니다. 로마서 12:21에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선한 싸움은 하나님이 하시는 싸움입니다.

  에베소서 6:13-17에는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입니다.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성령, 이 모든 것은 하나님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의 싸움에 그들이 나와 싸우고 죽습니다. ‘지하드’라는 말은 그 자체는 ‘노력’이라는 뜻을 가진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성전 즉 거룩한 전쟁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알라를 위한 전쟁을 합니다. 그들은 폭탄 자살을 하고 쉽게 죽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코란 수라 3:157에는 “알라의 길에서 살해당했거나 죽었다면, 알라로부터 관용과 자비가 있을지니 이는 생전을 축적한 것보다 나으리라”고 합니다. 수라 3:158에는 “만일 너희가 죽었거나 살해당했다면 너희는 알라에로 돌아 가니라”고 합니다. 수라 3:169에는 “알라의 길에서 순교한 자가 죽었다고 생각지 말라. 그들은 알라의 양식을 먹으며 알라의 곁에서 살아 있노라”고 합니다. 수라 3:195에는 “그들의 집을 떠났거나 추방당했거나 나의 길에서 순교한 자, 성전하였거나 살해당한 그들을 속죄하여 줄 것이며, 강이 흐르는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이것이 알라로부터 받을 보상이라. 그 중 좋은 보상은 알라에게 있노라”고 합니다. 이런 코란의 가르침 때문에 알라를 위한 전쟁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전쟁은 절대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쟁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이고, 이슬람의 전쟁은 알라를 위해 무슬림들이 하는 전쟁입니다.

결론

  ‘싸움의 기술’이란 영화가 있습디다. 내용은 모르지만 싸움을 잘 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싸움 잘 하는 법 가르쳐 주세요”. 어떤 학생은 인터넷에 질문합니다. 싸움을 잘하는 기술은 단지 하나님께 맡기는 것밖에 없습니다.
  어떤 초등학교의 시험문제입니다. “나에게는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데 답이 기상천외합니다.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친구를 배면 경찰서에 잡혀 갈 수도 있으니까, 병원비를 내야 하니까요. 친구를 배기 싫습니다. 친구를 배려해야 하는데 친구를 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앞세우고, 함께 하기보다 끌어내리고, 다투고, 없이하고, 심지어 죽이려는 경쟁과 투쟁심리로 꽉 찬 인간에게 싸움은 계속됩니다.

  싸움을 가장 잘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싸움의 기술은 무엇이지요? 하나님이 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싸움터입니다. 매일 싸워야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싸우고 이길까요? 싸우기 전에 이기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이 싸움으로 우리가 이기고, 우리나라가 이기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혼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월드컵이 문제 아닐 것입니다. 싸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다시 활력을 얻어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안보도 구멍이 나 있고 통일도 요원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고 감독하십니다.

  싸우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의 삶이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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