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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맥추절에 무엇을 감사할까? (삼하 12: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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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요압이 암몬 자손의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매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쳐서 취하게 되었으니 이제 왕은 남은 군사를 모아 진치고 이 성을 쳐서 취하소서 내가 이 성을 취하면 이 성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쳐서 취하고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있는 면류관을 취하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어오고 그 가운데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도끼질과 벽돌구이를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아들 솔로몬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자 요압 군대 장관이 암몬을 쳐서 왕성 랍바를 거의 함락하게되자 다윗 왕이 오셔서 승리를 완성하기를 청합니다. 다윗은 거의 다 이긴 전쟁을 수고도 하지 않고 거두어 승리를 얻게됩니다. 그리고 암몬왕이 쓰던 금 한 달란트 면류관을 쓰고 영광을 누렸습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첫 열매를 거두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복된 절기입니다. 우리는 감사절기를 맞을 때마다 당연히 감사할 것을 찾아서 감사하며 감사절기를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리를 거두는 일이 농사를 짓는 농민들 사이에서도 거의 없어지다보니 농사짓지 않는 우리들에게는 맥추감사절이 별로 우리들의 마음에 다가오지 않아 형식적인 감사를 드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맥추감사절을 주신 것은 단지 첫 열매인 보리나 밀을 거두고 감사하라는 작은 의미 때문에 명하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 맥추절기에는 어떤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까를 다윗의 주변에 일어난 일을 바라보며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들으시고 당연한 감사는 물론이거니와 미쳐 깨닫지 못한 일도 감사하여 이 맥추감사절을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절기로 만들어 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여디디야의 감사를 찾아 하나님께 드립시다.

다윗은 밧세바와 옳지 않은 관계를 가져 아이를 잉태하자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징벌하시려고 아이를 죽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아이를 살리려고 금식하고 회개기도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다시 아이를 잉태하자 다윗은 반가움보다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첫째가 자신의 죄로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둘째 또한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0개월 동안 불안하고 초조했던 다윗의 가정에 밧세바를 통하여 건강한 아이가 출생하였으나 다윗은 여전히 불안하였습니다. 그것은 첫째 아이도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 있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이 찾아와서 여호와가 사랑하는 아이니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지어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삼하 12:25)

다윗은 아이를 건강하게 낳게 하시고 주님의 종인 나단 선지자가 와서 축복해주고 은혜로운 이름까지 지어 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래서 날마다 아이의 이름을 “여디디야야” 즉 “하나님 사랑아” 라고 부르며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여디디야라는 말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뜻인데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신 것과 죄악의 결과로 얻은 아들을 축복해주신다는 뜻이 여디디아속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들도 사실 다윗과 그리 멀지 않은 죄악의 자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용서만도 감지덕지 인데 놀라운 축복으로 지난 반년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맥추감사절기에 이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극진한 사랑을 깨닫고 어떤 경우에도 진실한 감사를 드릴 때에 참 맥추절을 지키며 감사하는 성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복된 맥추감사절에 하나님의 넘치는 용서와 사랑과 축복을 깨닫고 참 여디디아의 감사를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탈게드라는 사람이 쓴 무인도라는 글이 있습니다.
폐병에 걸린 중환자 둘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말기환자 하나는 병실 가운데 침상이 있고 또한 환자는 병실 창가에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가 와서 매일 창가의 환자에게 침대 시트를 갈아주면서 창밖의 풍경을 이야기 해줍니다. 방갈로가 있고 백조가 있고 사람과 개가 왔다갔다하고 아름다운 집과 나무가 있다고 석달동안을 설명해줍니다. 그러자 병실 한가운데 누워있는 환자는 “누구는 창가에 누워 간호사에게 좋은 풍경을 설명 듣는데 자신은 방 한가운데 누워있다니” 하고 못마땅해서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때가 왔습니다. 창가에 있던 환자가 밤에 갑자기 숨이 차고 혼수상태에 들어가는데 간호사를 찾는 버튼을 누르지 못합니다. 방 가운데 있는 환자가 이것을 보고 자신이 대신 자신의 버튼을 눌러 간호사를 불러 줄 수 있는데도 부르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이 없어지면 자신이 병실 창가에 누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자 창가에 누워있던 환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상태가 좀 좋아진 방 가운데 있는 환자를 창가의 침대에 뉘어주었습니다. 조금 움직일 수 있는 이 환자는 제일 먼저 몸을 일으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창밖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방갈로도 없고 백조도 없고 사람도 개도 아름다운 집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온통 건너편 건물의 하얀 벽만 코앞에 닿을 정도로 서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탈게드의 작품은 끝이 납니다. 작품이 그 사람의 상태를 전혀 설명하지 않고 끝나기 때문에 독자들은 한결같이 그 환자에 대하여 한없는 궁금증을 가지며 생각하게됩니다. 이것이 탈게드가 이 소설을 쓴 목적인 것입니다. 그 환자는 얼마나 후회하며 나머지 삶을 살았겠습니까?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어제 밤에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눌러줄걸 하면서 말입니다. 죽음보다 더 큰 형벌이 후회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같이 못된 사람을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시면서 까지 용서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받고도 우리는 계속해서 죄짓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분쟁하고 시기하면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 없이 사랑하시고 많은 복과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가진 것, 건강한 것, 부러워하며 내게 주신 은혜를 잊고 감사하지 않는 다면 탈게드의 이야기에 나오는 방가운데 있던 환자의 후회를 우리도 평생 안고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아침 여디디야의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이 맥추감사절기에 후회 없는 참 감사의 마음과 예물을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불구하고 의 감사를 가집시다.

다윗에게는 요압이라는 훌륭한 장군이 휘하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요압은 암몬의 수도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곧 성이 함락할 시기가 왔습니다. 요압은 사신을 보내어 다윗을 전쟁터에 오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공격하여 성을 얻으면 자신이 명예를 얻게되기 때문에 이제 왕이 오셔서 공격하여 함락하므로 모든 영광과 역사적인 기록에 자신 대신 왕의 이름이 올라가기를 원하는 충성스런 신하의 마음이 이 행적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요압이 암몬 자손의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매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쳐서 취하게 되었으니 이제 왕은 남은 군사를 모아 진치고 이 성을 쳐서 취하소서 내가 이 성을 취하면 이 성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삼하12:26-28)

다윗은 이런 충성스런 신하의 충성을 받고 있으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다윗은 이러한 충성된 신하의 충성을 받을 자격이 근래에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군사들이 전쟁터에서 사생결단의 전쟁을 하고 있을 때 다윗은 왕이라고 평안히 궁궐에서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왕궁의 옥상을 거니는 중에 어떤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 마음에 음욕을 품게 되어 왕의 권세로 그 여인을 불러오게 하고 결국 그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부하인 우리야 라는 장수의 아내였습니다. 이 여인이 아이를 가졌습니다.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서 몇 달을 있는 기간에 아이를 가졌으니 분명히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고 여인의 간음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은 다윗의 죄가 드러날 것입니다.
급해진 다윗은 요압 군대장관에게 명하여 우리야를 휴가를 얻어 돌아오게 하고 아내와 동침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야는 충성스런 부하입니다. 내 상관과 내 부하들이 전쟁터에 있는데 나만 어찌 아내와 편히 잠잘 수 있는가 하고 동침을 거부하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를 격렬한 전투에 투입하여 전사하게 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야는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바로 이 다윗의 비리를 너무도 잘 아는 요압이 자기가 성을 함락하고 자기 이름을 빛내고 다윗을 무시한다고 하여도 자신의 죄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할 다윗의 입장에서 요압으로부터 넘치는 충성을 받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나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했는데도 내 자식에게 진실한 효도를 잘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한일과 봉사가 보잘것없는데도 하나님께로부터 후한 칭찬과 축복이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당연시 여기고 있거나 오히려 불평하고 불만하며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삶이 보잘것없고 죄악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마다 일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잊어버리고 살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는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불충성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라고 이 맥추절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초대교회의 어느 부인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나가기 위하여 시장에 가서 닭을 샀습니다.
아주 잘 운다는 장사의 말을 믿고 사왔는데 이 닭이 새벽에 울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닭을 판 사람에게 가서 따졌더니 그 사람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집을 잘 지어주었습니까?” “먹이는 제때에 넉넉히 주었습니까?” “암탉을 같이 우리에 넣어 주었습니까?” 부인은 모두 그렇게 잘해 주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닭 장사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니 아주머니! 좋은 집 있겠다 먹을 것 넉넉하겠다 암탉도 있겠다 뭐가 아쉬워서 목청을 돋우어 울겠습니까?” 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뭔가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을 때만 감사 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아니면 나 자신은 돌아보지않고 그저 내목적만을 위하여 간구하다가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감사했던 부분도 지난 반년동안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맥추감사 절기에 우리는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내가 부족함에도 동행해 주시는 사랑, 그리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불구하고의 사랑의 깨달으시고 금년에는 불구하고의 감사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랍바 성을 다윗은 정복하고 성에 입성하여 성안에서 암몬 왕의 항복을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암몬 왕의 면류관이 다윗의 머리에 씌워졌습니다. 면류관은 금 한 달란트로 만들어진 보물중의 보물이었습니다. 암몬 왕의 면류관이 왜 다윗의 머리에 씌워졌습니까? 암몬 왕의 죄 값으로 그는 전쟁에 지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죄가 없습니까? 다윗의 죄악 또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귀하게 여겨 용서해 주시고 여디디야의 축복을 주시며 부하의 충성된 봉사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암몬 왕의 면류관을 그의 머리에 씌워 주셨습니다.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쳐서 취하고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있는 면류관을 취하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삼하12:29-30)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라고 다윗은 찬양하고 감사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다윗에게 행하시는 이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다른 이는 실패했는데 나는 성공했습니다. 다른 이는 병약한데 나는 건강합니다. 다른 이는 가난한데 나는 부요하고 풍족합니다. 다른 이는 멸망의 길을 가는데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고 죄사함을 얻었으며 천국의 면류관을 얻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그들보다 선하고 나는 그들보다 의롭고 나는 그들보다 훌륭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고 감사하다고 느끼고 넘치게 감사하라고 오늘 이 말씀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줄로 믿습니다.

프레드릭 레만 목사는 시골의 아주 어려운 교회에서 목회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너무 어렵고 교인들이 없어서 생활비를 공급받지 못해서 그는 생계를 위하여 치즈공장의 직공으로 나가서 하루종일 힘든 일을 했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요원하고 목사이면서 목회보다는 먹고사는 일에 더 힘을 써야하는 그의 처지인지라 언제나 그의 마음은 너무도 답답하고 안타깝고 그러다 보니 거의 낙심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과연 목사의 길을 계속 가야할까? 하는 끊임없는 회의가 그의 마음을 엄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고달픈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하여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열었습니다. 거기에 자기 아내가 작은 쪽지 편지를 넣어 준 것을 발견했습니다. 레만 목사는 그 쪽지를 펼쳤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써 있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다 기록 할 수 있겠어요 여보! 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힘내세요!”
사모님이 우연히 어느 기관 담 밑에서 주은 종이 속에 이 글이 있음을 읽고 감동하여 힘든 남편의 마음을 위로 하고자 도시락에 써넣은 것이었습니다. 레만 목사는 그 글을 읽으면서 목사인 자신이 먹고살기 힘들다고 낙심한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시며 사랑해주신 하나님, 나를 예수 믿게 해 주셔서 구원해 주시고 더 놀라웁게도 목사의 사명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니 오늘의 고통과 어려움이 어려움이 아닌 축복으로 피부 깊숙이 닿아 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너무도 감사할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도무지 자신이 낙심하고 회의하고 좌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뜨거운 감동을 받고 그 즉시로 아내의 편지의 구절을 인용하여 아름다운 신앙의 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아름다운 곡을 붙여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귀한 감사의 찬송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404장 찬송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리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너무도 불평만 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의 삶을 보시고도 용서하여 하늘의 면류관까지 예비하셨는데 우리는 감사와 축복도 모른채 장래 주실 아름다운 면류관은 상상도 못한채 하나님께 인색하고 낙심하고 한숨짓고 살았습니다. 이제 주실 면류관을 바라보는 영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감사하며 이 아름다운 맥추감사절을 감사로 채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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