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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을 이리 가운데 (마 10: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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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보냄 받은 예수님께서도 그 뒤를 따르기 원하는 우리 모두를 세상에 보내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 10장 16절 상반절에도,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a).”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사명자의 길을 걷게 될 제자들을 보내실 때, 양에다 비유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성경 속에 나타난 양은 어떤 동물입니까?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양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같거늘(사 53:6)”이란 기록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는 모습이지요. 그러나 이 양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때는 반대로 순종의 상징이었습니다. 곧 이어 나온 이사야 53장 7절은 메시야가 받게 될 고난을 다룹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이스라엘로서의 양은 제 뜻대로 제 길로 갔지만, 예수님으로서의 양은 하나님 뜻대로만 하는 순종 그 자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은 희생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대신 죽어주는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양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이 심판받지 않아도 되었던 겁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표현한 적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위해 대신 희생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양으로서 예수님께서 순종하고 희생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들도 이 세상에서 순종하고 희생하는 영적 표지와 정신적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파송 받아 나아가는 세상은 이리떼로 가득하다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이리”하면 대개 굶주려 으르렁거리며 군침 흘리는 날카로운 이를 연상합니다. 무섭습니다. 잔인합니다. 약한 짐승이 나타나면 언제나 잡아먹으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약육강식의 공식과 힘의 논리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양은 사정없이 찢기고 짓밟힐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진작부터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고통을 받을지, 어떻게 핍박받을지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비장한 심경으로 제자들을 보내고 계십니다.

지난주일, 우리교회의 파송 선교사 김창기 목사님으로부터 짧지만, 그러나 가슴 깊이 감동 주는 구호 사역보고를 우리는 접했습니다. 주님께선 김창기 선교사님을 처음 인도네시아로 파송하실 때도 오늘의 본문을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희 가정이 1988년부터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떠나갈 때도 이 성경 구절은 남달리 실감되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아니 선교사 뿐 아니라, 오늘 예배를 마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선교사 혹은 사역자들을 기다리는 이리 떼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먼저 1.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종교적 적대세력일 수 있습니다. 17절에는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마 10:1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기독교 교세가 만만치 않을 때는 다릅니다만, 그리스도인이 극소수인 선교지에선 선교사가 활동하고 교회가 확장되면 현지 종교 지도자들은 위협 받는다고 느낍니다. 실정법보다 관습법이 우선하는 시골에선 현지 종교 지도자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지금도 성도들을 핍박하고 추방하곤 합니다. 기도를 마음대로 할 수나 있습니까? 찬양을 목 놓아 부를 수 있습니까? 눈치 보며 짓눌려 지내는 선교지 성도들은 찬송가 가사 그대로,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입니다.

또한 교묘하게 3. 선교사나 교회 지도자들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정치 권력자들이기도 합니다. 18절에는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마 10:18)” 선교사에게 비자를 쉽게 주지 않습니다. 집회나 건축 허가도 어렵게 만듭니다. 타종교가 들어옴으로 그들이 통치하는 사회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어려움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은 3. 사랑과 후원을 나누어야 할 가족으로부터의 배신과 핍박을 기록합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마 10:21)” 피를 나눈 가족이지만 신앙 다르다는 이유로 죽이기까지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선 예견하셨습니다. 근본주의 이슬람교도들은 개종을 곧 가문의 수치로 느끼기 때문에 오빠들에 의해 처형된 누이동생 이야기가 지금도 들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좀더 폭넓게 적용해볼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가족이라 할 수 있는 동역자로부터의 갈등과 상처가 곧 이리가 될 수 있습니다. 타 종교 지도자나 이 세상 권력자에 대한 핍박을 예상하고 바짝 긴장할 뿐 아니라, 핍박 받아도 십자가 지는 마음으로 견딜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역자에 대해선 서로 돌보고 격려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흔히 방어의 빗장을 내려놓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받는 상처는 참 깊게 아려옵니다. 불신자들이야 우리의 신앙을 몰라서 그렇게 핍박할 수 있다고 치지만, 동역자간에 생겨난 갈등과 분쟁은 세상의 조롱거리요 차라리 쓰디 쓴 배신감입니다. 사실 밀월기간 동안에는 가족같이 따뜻한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믿고 거는 기대는 오래지 않아 무너집니다.

선교에 관심 있는 분들이 읽어보아야 것으로 “낯선 고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향은 어머니의 품과도 따뜻하고 푸근해야합니다. 그런데 선교사에게 고향은 이미 낯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년을 맞이하여 고국을 방문했지만, 기거할 수 있는 숙소가 제대로 있습니까? 아무리 교회 성도가 많아도 진정으로 관심 갖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곧 떠나갈 선교사가 의미 있게 쓰임 받는 역할이 주어지기나 합니까? 후원교회야 그렇다치더라도 주 파송교회마저 그럴 때 사역에 지친 선교사는 어디서 위로받습니까? 고국에서 받는 외로움과 고독은 선교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리의 공격이며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상처입니다. 한 가족이라면 그래서는 안되는 데 말입니다.

어디 선교지 동역자만 그렇나요? 교회 내 동역자는 어떻고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더 나아가 사업상 동업자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아픔과 상처는 바로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었던가요?

그러나 저는 이제 가장 무섭고도 집요한 이리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이리는 사명자들을 핍박하는 세상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배신으로 마음 아프게 하는 동역자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4.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이리적 근성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이리의 파상적인 공격에서도 나중까지 견디며 자신의 영혼을 지켜내라는 당부입니다. 이리의 공격을 받았다고 느낄 때, 대체로 우리의 반응은 정당방위전입니다. 억울하니까요.

오해받고 모함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얼마나 분이 치밀어 오르고 원통한지 모릅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저의로 이런 비방을 해올까? 너무나 억울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들어 놓고 하소연했습니다. 저는 피해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저의 정당함을 주장하면서 소위 가해자에 대한 비방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저는 언제나 양이라고 생각하고 저에게 상처를 입히는 저 사람이 바로 이리라고 판단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꼭 같은 이리로 돌변한 것입니다. 아니 어쩜 제 깊은 속에 이리적 근성이 도사리고 있었고 때가 되어 표출된 것이었습니다.

분명 억울하고 원통한 모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냉철하게 제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았습니다. 주님의 관점에서 그 비방의 말들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거기엔 제가 귀담아 들어야 할 주님의 지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누가 완벽한 의인이겠습니까? 모두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은 죄인들이지 않습니까? 옛사람의 속성은 누구에게나 이 제 속에 남아있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섬기기보다 섬김 받는 것이 더 기분 좋았습니다. 제 앞에 머리 숙이고 굽실거리는 현지인에게 마음이 더 끌렸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지위와 더 중요한 역할이 주어졌을 때, 흐뭇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도 저에게 더 많은 관심이 제게 집중될 때 신났습니다. 더 강자임을 확인했을 때, 강자 특유의 동정이나 여유도 생겨났습니다. 분명 제 마음속에도 군림하고자 하는 이리적 속성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자는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왔다는데 저는 도리어 섬김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약한 것들을 사정없이 밀어냅니다. 천한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없는 것들하고는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더 강해지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성공가도에서 만난 경쟁자를 누르고 올라서려는 생리에 지배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 내 지체들과도 경쟁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더 우위에 있으려 하고, 더 강자임을 보이려하고, 다 행세하려 하고! 여러분! 이것은 이리적인 속성입니다. 이것은 이리의 군대가 싸우는 방식입니다. 어린 양 예수님을 따르는 양의 군대는 싸우는 방식이 다릅니다. 16절 하반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b)”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뱀처럼 지혜로워야 하지만 비둘기 같은 순결성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리가 됩니다.

어린양 예수님 잡으러 온 이리들을 향해 칼을 빼어들었던 베드로, 그는 양의 군사로서 그만 이리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더 무서운 힘을 보이려 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오?(마 26:53-54)” 사단은 힘의 논리를 따라 어린 양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리 군대가 사용하는 꼭 같은 방법으로 맞서길 거부하신 겁니다. 오히려 순종과 희생으로 묵묵히 세상을 이기어 나가셨습니다. 우리도 이 방법을 따르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혼자 내버려두질 않으시고 성령께서 친히 함께 하셔서 도와주십니다. 마 10장 20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주님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잘라 드리기를 원하시는 여러분! 주님을 위해 생명과도 같은 아까운 물질 드리고자 하시는 여러분!, 그리고 주님을 위해 자신의 달란트와 열심을 배나 드리고자 결단하시는 여러분! 참 귀하십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희생을 사용하여 주께서 우리 교회를 이루어 왔고 앞으로도 이루어 가실 겁니다. 이제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하십시오. 양의 자세로 봉사하십시오.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이리적 속성을 경계하십시오. 생색내려는 마음,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는 마음, 돌아올 영광을 기대하는 마음, 섬김 받으려는 마음, 군림하려는 마음! 이런 것들은 다 양의 군대에 합당한 정신적 태도는 아닙니다.

순종과 희생의 방식을 따라 묵묵히 봉사하고 헌신하십시다. 일 만원의 헌금과 한 시간의 봉사 속에 세속적 야심이 섞이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일 만원 헌금하며 한 시간 봉사하려고 한다면 이를 위해 한번은 눈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세속적 야심에 대한 경계도 없이, 눈물의 기도도 없이 감당하는 봉사와 헌금은 오히려 인간적인 공덕만 내세우게 할 수 있습니다. 도리어 교회를 해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나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원하는 여러분! 순종과 희생이라는 양의 속성을 가지고 양의 군대로 헌신해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높은뜻숭의교회는 더욱 정결하며 견고한 교회로 성숙해 갈 줄 믿습니다. (이장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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