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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신앙의 꽃(욥 1: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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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은혜는 물에다 새기고, 원수는 돌에다 새긴다.” 정말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섭섭한 일은 심지어 수십 년이 흘러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은혜를 입은 일은 금세 잊어버립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쉽기 잊어버립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신앙과 삶에 큰 해가 됩니다. 신앙적으로 병드는 겁니다. 감사가 없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는 인격은 위선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인격과 신앙에 격조를 높여줍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인간도 아닙니다. 여러분, 짐승이 감사하는 것 보셨습니까? 강아지에게 먹을 것 주면 좋다고 꼬리를 치지만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꾸벅 절하지도 않고, 감사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냅다 먹을 것에 달려들 뿐입니다. 감사의 유무가 인간과 짐승의 중요한 차이인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 참 성도가 아닙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가장 고상한 인격은 감사하는 것이다. 가장 성숙한 신앙은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감사는 꽃이다!” “감사는 인격의 꽃이다!” “감사는 신앙의 꽃이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향기롭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해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의 본성을 아시고, 1년에 두 번 감사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산다면 이런 기회에 감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인격의 격조, 신앙의 격조가 높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승리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감사절은 하나님이 엎드려 받으시는 절기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의 절기입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신앙과 삶에 감사를 회복하셔서 더욱 행복하시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욥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욥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고난이 생각납니다. 그는 엄청난 고난을 당한 ‘고난의 대가’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감사의 대가’입니다. 가장 큰 고난을 당했을 때 가장 큰 감사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 후에 욥은 가장 큰 축복을 경험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욥처럼 늘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우리 자신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1] 욥의 프로필 : 동방의 의인, 동방의 갑부

  1절에 보면 욥은 우스 땅(지금의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 국경 부근)에 살고 있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 즈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가정으로 보나, 재산으로 보나, 신앙으로 보나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2절 보면 그의 가정에 관한 소개가 나옵니다. 그는 슬하에 7남 3녀를 두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놀랄 일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다복한 겁니다. 그리고 3절 보니까. 재산목록이 나옵니다. 양이 칠 천, 약대 가 삼 천, 소가 오백 겨리, 암나귀가 오백 등이 있었고, 일하는 종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갑부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신앙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습니다. 1절 후반절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4절~5절을 보면, 얼마나 철저했는지 자식들이 잔치를 치르는 날이면 혹시라도 실수를 하거나 신앙이 해이해지지 않았을까 염려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의인이었습니다.
  욥은 재산도 많고, 가정도 다복하고 신앙도 좋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오래 오래 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은 그런 게 아닙니다. 험한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닥쳐오기 마련입니다. 욥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몰아닥쳤습니다. 

[2] 욥에게 닥친 시련 : 고난의 연속, 소망이 송두리째 사라진 상황

  욥에게 닥친 시련은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배경이 있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사단이 시험한 것입니다. 사단은 본래 천사였는데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타락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을 이간질을 합니다. 자기가 쫓겨났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신앙생활 잘 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신앙을 흔들어놓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6절~12절 보면, 사단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욥을 참소하며 시험하는지 그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칭찬하자 사단은 몹시 못마땅하여 욥을 참소합니다. 욥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셔서 그런 것이지, 만일 하나님이 복을 거두면 당장 하나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욥을 시험할 것을 허용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 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악한 사단에게 그런 짓을 하도록 허용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욥으로서는 얼마나 애매하고 황당하겠느냐 하는 겁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게 가당한 말이냐 이겁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어린 신앙으로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단의 시험을 허용하면서 역으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는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높은 빌딩을 지으려면 무엇부터 합니까? 기초 공사를 하죠. 기초 공사를 깊이 든든히 할수록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만일 별 기초공사 없이 집을 짓는다면 겨우 판잣집 정도나 지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이런 예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을 연단하시기 위해 사단의 시험을 스파링 상대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시험이 오더라도 망하지 않습니다. 잘 극복하면 신앙의 성숙과 축복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주요한 사실은 시험에는 범위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단에게 시험을 허용하시되 성도를 보호하십니다. 12절 보면, 욥에게 시험을 허용하시되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시킵니다. 다른 것을 몰라도 생명에는 터치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해서 욥은 큰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연속적인 고난으로 닥쳐왔습니다. 욥기 1장만 봐도 4차로 닥쳐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마 장남의 생일이었는지 잔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다 모였습니다. 한참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뜻밖의 일들이 터집니다. 스바인들이 습격을 해옵니다.(15절) 그래서 소와 나귀를 약탈하고, 종들을 죽입니다. 욥에게 이런 비보가 다 전해지기도 전에 다음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번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양과 종을 불살랐다는 것입니다.(16절) 비극이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갈대아인의 습격으로 약대를 약탈당하고 종들이 죽습니다.(17절) 그리고 대풍이 불어와 집의 네 기둥을 무너뜨리므로 집이 내려앉아 자식들이 즉사합니다.(18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고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장으로 넘어가면, 몸에 악창이 생깁니다. 얼마나 괴로웠던지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시련의 상황입니다. 욥은 자신의 비극적 상황을 스스로 이렇게 묘사합니다. 욥19:9~10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 ” 한 마디로 말해서 소망이 뿌리째 뽑힌 것입니다.

[3] 욥의 반응 : 경배와 감사

  사람이 욥이 처한 것 같은 극단적 상황에 마주치게 되면 대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아마 원망, 불평, 저주, ... 결국은 자살 소동까지 벌어질 겁니다. 그런데 욥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배하고 찬송하며 감사했습니다. 20절~22절. “욥이 ...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 하니라”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욥이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의아해집니다. 아니면 그가 목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욥은 정신도 멀쩡하고 목석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슬퍼하고 있습니다. 괴로워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20절 보십시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 ” 이것은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극도로 슬프고 애통할 때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는 초인도 아니었고, 목석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금니를 깨물면서 그 마음을 다잡은 겁니다. 그리고 경배합니다. 찬송합니다.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연약하지만 힘들지만 신앙을 지키고 마음을 지킨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욥의 감사는 그의 신앙에서 꽃피운 것입니다. 감사는 신앙의 꽃입니다. 그런데 욥의 경우는 ‘사막에 핀 꽃’입니다. 푸른 풀밭에 핀 꽃도 아름답습니다. 그라나 사막에 핀 꽃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사막에는 도저히 꽃이 필수 없는 것 같은데 사막 한 가운데 한 떨기의 꽃이 피어있다면 얼마나 희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우리가 형통한 가운데 감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귀합니다. 형통한 가운데 오히려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멀리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고난의 때에 감사하는 것은 정말 귀한 것입니다.
  과연 욥은 어떻게 이런 감사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성숙한 신앙이 가능하게 한 것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건으로 감사하는 줄 압니다. 조건이 좋으면 오히려 감사치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잘 해서 그런 줄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조건이 좋든 나쁘든  신앙으로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조건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단이  생각  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조건이 좋을 때도 물론 감사해야 합니다. ‘ ~ 때문에’(because)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나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감사해야 합니다.

  욥은 아주 성숙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성숙함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한 마디  로 ‘하나님 주권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 주인 의식’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이런 겁니다. 자기 중심이면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미성숙하고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자기가 아쉬우면 하나님을 찾고, 자기가 잘 나가면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본질 상 자기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입니다. 욥의 이런 신앙이 21절의 고백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인생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인데, 모든 게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거두어가신들 어떻게 원망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사실로 여전히 찬송을 받으셔야 된다는 겁니다.

  딤전6:7~8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인생은 빈손으로 왔기에 하나님이 주신 만큼 감사하고 자족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엄밀히 말해서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오우너(Owner)이십니다. 하나님은 소유권자이고, 우리 인간은 관리인(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이 도로 찾으시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면 감사, 안 주셔도 주신 만큼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주권 신앙은 ‘하나님 섭리 신앙’을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세상만사, 인생만사를 다스리고 경영하십니다. 이를 가리켜 ‘섭리’(Providence)라고 부릅니다. 
인생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입니다. 요셉이 이런 신앙  을 갖고 있었죠. 그가 애굽에 팔려가서 종살이, 감옥살이하면서 고통을 받았지만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도 구원하고, 만민을 구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그는 고난 가운데서도 원망하지 않았던 것은 선명하게 이해되지는 않아도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고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일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그가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그래서 요셉은 고난 중에 감사할 수 있었고, 범죄한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금 비록 고통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욥23:10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믿고 기대했던 것입니다.(롬8:28 참조)

  이런 성숙한 신앙이 있었기에 욥은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신앙의 수준이 드러나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이 얼마나 진실한지, 얼마나 성숙한지 보통 때는 모릅니다. 시련이나 고난이 닥쳐오면 압니다. 조금 어렵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배반하면 엉터리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중에 신앙을 지키고 감사할 수 있다면 참 신앙이요 성숙한 신앙입니다.

[4] 욥의 승리 : 하나님이 부어주신 갑절의 축복

  고난 중에 신앙을 잃으면 다 잃습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 신앙을 지키면, 감사할 수 있으면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욥42:12~13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 ” 하나님의 욥의 말년에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정확하게 그의 재산을 갑절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식도 열 명 더 주셨습니다. 10명은 이미 천국에 가 있기 때문에 이 또한 갑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감사의 꽃이 피고 난 후에는 축복의 열매가 맺어진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형통하면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하면 형통해집니다. 복이 오면 웃는 겁니까? 웃으면 복이 오는 겁니다. 여러분, 이 비밀을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 울면 3류, 고난의 때에 참으면 2류, 고난의 때에 웃으면 1류이다.” 우리 모두 일류 신앙인이 되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앞에서 감사 기도한 후 살아났고 더 크게 승리합니다. 세 친구는 풀무불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혹시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배반하지 않고 감사 l도한 후 풀무불이 들어갑니다. 그러자 털끝 하나 그을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도 감사할 때 승리하는 것은 공식입니다. 공식!

  일본의 최고 기업가 마쓰시다 고노스께(내쇼날 파나소닉 창업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인데, 그 성공 비결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J주신 3가지 은혜 덕분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첫째, 나는 집이 몹시 가난해서 어릴 적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를 통해 세상의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둘째, 나는 약하게 태어나서 항상 운동에 힘써 왔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셋째, 나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나의 스승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물어가며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가난하고, 병약하고, 무학인 게 은혜입니까? 그러나 그는 고된 현실 속에서 감사하며 살았을 때 역전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절입니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감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고난과 풍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질병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걸어 나올 만큼 건강하고, 먹을 수 있을 만큼 부하고, 시간을 낼 만큼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없는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 자녀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지금까지도 보호해 주신 그분은 남은 생애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아니, 영원무궁토록! 그러므로 감사하며 삽시다! 감사로 신앙의 꽃을 피웁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을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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