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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잠 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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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란 때론 내가 왜 그렇게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지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난 좀 이렇게 살고 싶은데 내 삶의 상황은 왜 이렇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까하고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나는 의도한 바가 없는데 전혀 다른 오해와 상황의 전개로 인하여 엉뚱하게 피곤한 일들이 닥쳐오기도 합니다. 그나마 참고 이겨내고 거기에 익숙해져 이제 좀 살만하다 생각했더니 또다시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 우리 삶에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는 우리의 근원적 부족함과 예기하지 못했던 상황들로 인하여 갖게 되는 삶의 멍에가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다부지게 마음먹고 어차피 이렇게 살아가는 것인데 하고 주어진 여건 속에서 기쁨을 찾고 행복을 느끼고자 하면 우리의 삶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함을 봅니다.

오늘 우리는 짧은 잠언 말씀을 통해서 늘 끊임없이 당하는 삶의 곤고와 실망 그리고 낙담의 때에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할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는 어렸을 적 자랐을 때부터 참 많은 실망을 겪고 좌절과 상처를 받고 자라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심어주어야 될 큰 것이 자신감인데도 불구하고 교회의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와 같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또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음을 봅니다. 오히려 많은 실패와 낙담 속에 시달려 오고 또 자신감을 가지기 보다는 오히려 마음속에 위축됨을 가지는 것이 우리 삶의 환경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삶의 이러저러한 풍상을 겪으면서 우리는 치유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가끔 우리 성도들을 보게 되면 소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드릴 때 그 표정이 환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이 꽤 어렵구나라고 마음속에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삶속에서 어려운 일이 많기에 희망과 소망을 드리게 될 때 마음이 밝아져 표정까지 밝아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말씀에 용기를 얻고 다시 한 번 해보자하는 마음이 얼굴에서 읽혀지는 것은 참 우리의 삶이 힘들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겠지요.

이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는 삶의 아픔과 무거움이 있다면 다 날려 보내고 다시 동화속의 어린아이처럼 씩씩하고 자신 있게 우리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의 길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길을 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의 삶은 내가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걸어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사람은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오늘 성경을 잠시 더 생각해 봅니다.

오늘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은 내가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삶의 환란과 곤고의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10절을 보면 “내가 만일 환란 날에 낙담하면”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을 보니 우리 삶에는 환란의 때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려고 해도 또 이렇게 많은 어려움이 있기도 합니다.
오늘 16절을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아무리 의롭게 사는 의인이라 할지라도 7번씩 넘어지는 이와 같은 반복적인 곤고함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삶 가운데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의 실수로 죄악가운데 빠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그 다음에 어떻게 나의 삶의 대처를 이룰까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려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어려움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려움이 있고 내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결코 삶을 회복할 수 없는 실패는 아닙니다. 내가 잘못했고 내가 부족하고 그래서 어려움이 왔고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까 하고 마음속에 각오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기 위한 전 단계임을 우리는 이루게 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불완전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것이 바른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착각할 뿐입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부족이 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부족과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다시 기회를 구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잘못과 어려움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있어 주님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너무 고난이 지나쳐 내가 살 소망을 잊어버리고 그리고 내가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자 같이 되었지만 내가 가만히 그 일을 생각해 보니 나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만 의뢰하게 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삶에 모든 소망이 끊겨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지경에 몰리게 되었을지라도 그 이유는 나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신 줄 믿고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과 죄악을 인정한 후에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생각하여 결정하고 실행하고 보완하는 것은 삶의 지혜와 용기입니다. ‘넘어질지라도’의 히브리말의 뜻은 ‘부끄러운 죄악에 빠질지라도’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부끄러운 죄악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합니다. 내가 실수해서 내가 뭐하나 잘못해서 부끄러운 죄악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아주 넘어지고 그 가운데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일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사단에게 온전히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을 생명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셨는데 용서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며 우리를 세워서 다시 기회를 주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단은 우리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한 번의 실패와 실수로 인해서 아주 우리를 망치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사단이 흔히 우리를 사용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를 혼미하게 해서 문제나 상황의 장면으로부터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냥 피해버리고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냥 도피해 버리고 방치해 남겨두고 숨겨두고 싶게 만듭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이것이 사단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 순간마다 내가 이번에 망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일어날 것인가를 신중히 결정하셔야 됩니다. “이번에 아주 망해버릴 것인가? 아니면 다시 일어날 것인가?” 이 둘 중에서 선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생각도 안 해보고 포기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망하라고 어려움 주시는 것인가? 다시 일어나라고 어려움을 주시는 것인가?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비싼 값을 주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헐값에 우리 자신이 잘못했다고 부족하다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포기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낙심하고 좌절해 버린다면 너무 비싼 값을 치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끈기입니다. 어떤 순간도 내가 하나님 앞에 끈기 있게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기치 않는 삶의 곤고와 낙망의 때를 만나도 이것이 도대체 왜 나에게 오는 것일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맑은 날 후에 비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며칠 맑았으면 흐린 날도 있고 비오는 날도 있는 것입니다. 비오면 우산 준비하면 됩니다. 비오면 우산 준비하면 되는 것이지 비가 오니 인생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34편 19절을 보면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롭게 사는 믿음의 사람이라도 그에게는 고난이 많고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시니 그가 의로운 백성으로 주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의인도 못되는데요.” 아닙니다. 예수 믿어 구원에 이르는 모든 사람은 다 의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야말로 나는 어려움을 당할 때 자학하거나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떤 뜻이 계심을 믿고 의심하지 말고 곰곰이 하나님의 은혜의 뜻을 파악해야 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은혜의 백성입니다.

어제 제가 11시 넘어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설교를 다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11시 넘어서 목사님을 통해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 중에서 몸이 불편하셔서 여러 해 동안 투병하시는 분이 있는데 다행히 제가 지난주간에 상태가 안 좋으시다고 해서 심방을 했습니다. 심방을 했더니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져서 이제는 길어야 한 달, 두 달을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이러다 갑자기 안 좋아 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갑자기 안 좋아지시면 안되기에 제가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듣고 와서 지난 주일에 예배를 드렸고 어제 전화를 받았으니까 불과 3-4일인데 한두 달 견딜지 모르겠습니다 했던 분이 불과 3, 4일 지나서 갑자기 어려우시다는 전화가 온 것입니다. 임종예배를 드려야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평일 날 같으면 얼른 달려갈 수 있었을 텐데 어제 제가 설교를 다 끝내지 못했고 또 그때 갔다 오면 아마 1시는 넘을 것 같고 해서 제 사정은 다 알고 제게는 연락을 안 하셨지만 목사님이 제게 알려주셔서 제가 그 집사님과 연결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물론 정신이 어려우시니까 그 남편 되시는 집사님과 통화를 해서 제가 전화 기도를 했습니다. “마음 단단히 가지시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평안을 가지십시오” 하고 권면을 드렸는데 그 집사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담담히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며칠 전에 가서 심방을 해서 몸이 아프신 집사님과 잠시 대화를 했습니다. 상태가 굉장히 나쁘신 것 같았습니다. 온몸이 장기가 다 상해가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가 오니까 대강 깨끗이 정리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냄새가 많이 심각하게 났습니다. 상태가 아주 안 좋은 것이지요. 모든 것이 다 상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편안하게 “목사님 저는 괜찮아요. 저는 천국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마음이 편하고 저는 기뻐요. 저는 천국을 기대해요.”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의 마음에 이렇게 위로가 될 수 없어요. 오히려 저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괜찮아요. 저는 천국에 갈 소망이 있기 때문에 저는 괜찮아요.” 나와서 집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지금 굉장히 아픈 중이고 그런데 그 아픈 표정도 안 짓고 편안한 표정으로 목사에게 그렇게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억지로 그렇게 평안한 표정으로 지으셨겠지요. 목사님이 잠시 예배를 드리는 동안 그래도 내가 아파하지 말자하고 그렇게 말씀하셨겠지요.

우리 성도에게는 극한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소망과 기쁨과 은혜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또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우리 믿음의 사람입니다. 어떤 삶의 곤고와 질고가 있어도 그 가운데 우리는 일어나는 사람이 믿음의 백성들입니다. 좋을 때 있으면 나쁠 때 있고 또 나쁠 때 있으면 좋을 때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시험 잘 치를 때 있지만 시험 잘 못 봐서 마음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 다른 예를 들어드리면 더 쉽겠는데 제가 다른 예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제 얘기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목사는 어쩔 수 없이 설교를 해야 합니다. 저도 벌써 그 이전에도 설교를 했고 이 교회에서만도 15년 동안 설교를 했는데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사는 매일 설교를 합니다. 주일날도 여러 번 설교를 하고 또 수요일도 설교하지요. 새벽마다 설교하지요. 또 금요일도 설교를 합니다. 이렇게 매일 설교를 하니 목사는 성경만 펴면 설교가 될 것 같으십니까? 그러면 좋지요. 저도 토요일만 되면 소화가 안 되고 어떨 때는 잠도 안 오고 설교하려고 하면 마음도 초조해지고 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설교라고 한번 잘 한 것 같으면 목사가 설교 잘하고 못하는 것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니까 목사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은 성도의 마음에 전해지니까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제 입장에서 보게 되면 어쩌다 설교 한번이라도 잘한 때가 있으면요 다른 것 다 그냥 아무 필요도 없고 다 마음이 흡족하고 기분 좋고 그냥 살만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설교도 잘 못하고 헤매고 그러면 일주일 내내 저조한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꿈도 헤매는 꿈만 꾸는 것 같습니다. 횡설수설한 것 같기도 하고 성도들 얼굴 보기도 민망하고 어디로 가버리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어디 사람 없는데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하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안 믿어지시죠? 그런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큰 위로를 받은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마음속에 어려워하고 있는데 어느 날 제 마음에 큰 위로가 다가왔습니다. 무슨 소리가 제 마음에 들리는가 하면 ‘설교는 들으면 다 잊어버린다.’ 이런 소리가 제 마음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다음에 큰 위로를 받았어요. ‘잘못해도 잊어버리고 하니까 또 이렇게 지내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제가 평안을 찾았습니다. 또 진일보해서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헤매다가 어쩌다가 한번 잘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목사님 매일 헤매다가 어쩌다 설교 한 번 잘할 때 그것 가지고 목회하니 나도 날마다 헤매다가 어떻게 한번 잘하면 그것 가지고 살 수 있겠다’는 이런 생각을 성도들이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마음도 좀 편한 것 같아요. 목사가 헤매는 게 성도들에게 은혜도 될 것 같습니다. 요즘은 꿈도 잘 안 꾸고 잘 잡니다.

자연의 섭리는 밝음과 어두움의 조화입니다. 조화를 통해 이루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대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잘하고 또 주님 앞에 바로 살아서 칭찬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님 앞에 부끄러운 자의 모습이요, 위축될 때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일들이 감사하고 또 이후의 있어지는 일들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의 심정으로 다가오지요. 밝음도 어두움도 있기에 노을의 아름다움이 있지요. 봉우리와 계곡이 있어서 산은 굴곡을 이루고 아름다운 법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 쓰실 때도 있지만 비록 우리 스스로의 실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 깊은 계곡에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체험한 아픔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의로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더욱더 마음에 사무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당하지만 능히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나에게 어려움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특별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를 관리하는 능력과 복원력을 가지고 그 위기를 관리하며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쓴 잔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낭만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형틀기구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시대에 있었다면 예수님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십자가가 사람들 죽이는 형틀기구였습니다. 혐오스럽고 끔찍하고 마음에 어려움을 주는 기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끔찍한 형틀기구를 우리 마음속에 소망의 십자가로 삼게 하셨고, 그 십자가를 보면 가슴이 감격스럽고 그 십자가를 생각만 해도 우리 가슴이 떨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감사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세상에서 더 나쁠 수 없는 최악의 지경을 세상에서 최고의 아름다움과 최상의 것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 자신이 고통을 지고 세상에서 가장 큰 어려움과 죄악을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 십자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로 만드신 것입니다.
사단은 환란 날에 우리가 낙담하고 미약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곳에서 건져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풀무불에 던져져도, 사자 굴에 던져져도 불에 타지 않고 사자에게 먹히지 않고 사자의 입을 봉하시고 오히려 풀무불 가운데서도 그들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겪지만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다시 존속하고 그 고통을 이겨내며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지고 그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은 현실세계 속에서 어떻게 일이 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누리고 슬픔으로 아파하느냐, 그것입니다. 가장 나쁜 것은 ‘나는 안 돼, 이제 끝났어, 하나님은 나를 상대하지 않을거야’ 하는 생각입니다. 탕자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잘 한 일이 있다면, 백가지 잘못했는데 한 가지 잘 한 것은,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고 돌아가면 아버지가 받아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돈 30냥에 팔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깨어진 꿈 때문에 팔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서 모든 권세를 누릴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갖은 고초를 겪으며 살았던 그의 꿈이 깨어졌기에 그는 깨어진 꿈을 돈을 받고 팔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의 면전에서 부인하고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회개할 기회를 잃고 죄책감 때문에 목을 매어 죽었고 베드로는 회개하여 주님을 위하여 살다가 주의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여 죽었습니다. 두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삶은 회개하고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다 이 세상을 떠났고 가룟 유다는 결국 그의 죄 때문에 회개치 못하고 가슴 아파하며 기회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위기의 순간, 실패와 실수의 순간들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길의 결과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어찌 평생 사는 동안 잘 하는 일만 있겠습니까. 어찌 평생 사는데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어찌 평생 살면서 넘어지지 않고 달려가기만 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짐 가운데 징징 울고 그것으로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곤고한 때를 이겨 내가는 믿음의 백성의 의연한 삶입니다. 전도서 7장 14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셔서 우리에게 내일을 알지 못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일을 알지 못하니 우리는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형통함과 곤고함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병행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때는 우리가 단기간 내에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어려움이 닥치니 우리에겐 귀한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어려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삶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려움을 반복하고 잘못을 반복하고 습관이 되어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잘못된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직까지 나를 버리지 않았고 어려움을 통해서 나를 깨우치고 새로운 역사를 주시기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회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없는 것은 내가 숨조차 쉴 수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게 적어도 호흡을 주셨다는 것, 살아있음에 감사와 의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이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울고 낙심하고 그 자리에 엎드러져서 우리의 삶이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바라보며 나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사람의 최고의 멋진 모습은 환란에 빠졌을 때, 낙담의 지경에 있을 때, 넘어졌을 때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을 보면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빌더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초대교회에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고 그들이 자신있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베드로가 한 번 외치니 삼천 명이 변화되었습니다. 또 한 번 외치니 오천 명이 변화되었습니다. 그 시대에 인구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조그마한 도시에 우리 서울과 같은 인구와는 비교가 되지 않잖습니까. 그런데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사람이 삼천 명, 오천 명이라면 이것은 대단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오히려 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아직까지 마음이 미약한 성도들에게는 위축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축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옥에 갇혔지만 교회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7절에 보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그의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의 손에서 벗어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나오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는 불붙음의 뜨거운 활기 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빌립보 도성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이루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면 낙심해야 될텐데 오히려 넘어졌을 때 엎드러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오히려 감옥 속에 찬미하며 주님께 기도하기로 힘씁니다. 그 때 옥토가 흔들리고 지진이 나 그들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착고가 풀려 그들은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간수장이 그것을 보고 자기가 잘못해서 그들이 출옥한 것으로 알고 자결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말립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담대히 선언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하나의 고백이 나오기 위해서는 한 순간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고비에 쌓여 삶의 선언으로 집약되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마음속에 체험하고 삶의 정수로 남겼다가 마지막에 우리말로 고백되어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삶에 모든 고초를 겪으며 어려움 가운데 일어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그 과정 가운데 마음의 언어를 완성한 것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담대한 승리의 선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넘어져도 우리 믿음의 사람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의인은 실수를 안하거나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해도 극복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며 더욱더 겸손해지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실수가 없다거나 부족이 없다는 착각에 빠지면 필연적으로 그는 사람도 무시하고 하나님도 부인하는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실수 없고 완벽하고 능력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착각할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는 우리의 부족을 깨우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 앞에 경거망동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무시하라고 주신 지혜가 아닙니다. 나의 무지를 깨닫는 지혜이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지혜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존경,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는 삶이 이루어진다면 내 삶이 교만 중에 있는 것이 아닌가 깨우치고 돌이켜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 자꾸 보이고 너무 모자란 것 같으면 우리는 내가 어리석음에 빠져있지 않은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늘 영적위기와 어려움에 빠져있으면서 모를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어지는 지 아십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너무 어리석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처럼 되려고 감히 생각을 합니까? 헤롯은 메시야인 아기 예수를 자기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시야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이 이렇게까지 어리석어집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자기 삶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자기가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와 같은 어리석음에까지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혜를 짜내고 가지고 있는 여건과 능력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으려는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실수와 부족의 때가 있을 때 가슴아파하며 회개하며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부족하지만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유용이 사용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 내 부족이 보이고 내 부족을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체험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게 됩니다. 다윗, 엘리야, 엘리사, 모세, 여호수아 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소원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우리 인간의 사용기준은 유능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은혜 앞의 복종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달을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 다음으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위하여 애쓰고 노력하고 갈고 닦아 하나님의 은혜를 이룰 능력을 소지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요행수가 아닙니다. 제가 늘 노력도 성령충만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은혜를 체험할 수밖에 없는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서 실제적인 능력을 갖추게 하십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물맷돌 하나 가지고 가서 이겼습니다. 우연히 손에 잡힌 것이 물맷돌이 아닙니다. 다윗은 수 없는 물맷돌 던지기 연습을 했고 그것으로 맹수를 이겼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자신이 있어서 단 한 번으로 그것을 끝낼 수 있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끊임없는 물매의 연습이 익숙한 물매의 장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궁중에 있었던 모세를 광야로 부르시고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광야의 지도자가 필요했지 궁중의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를 지나갈 때 백성들을 그냥 평면적으로 놓고 봐도, 인간적으로 놓고 봐도 그 백성의 지도자는 당연히 모세가 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광야에 대해서 모세만큼 아는 사람이 고센 땅에 살고 있던 히브리백성 중에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당연히 인간적으로 봐도 그들의 지도자가 될 만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40년간이나 수종 들며 그의 리더십을 배웠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수발하면서 그의 지도력과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배웠고 사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부족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으로 날마다 새로운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유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기회를 넓혀서 세상에서도 유능해지는 강력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은혜 가운데 무슨 일을 이루고 그 일을 이룸이 세상에서도 능력화하여 이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루 종일 울 수는 있습니다. 너무너무 슬퍼서 눈물이 내 식물이 되어 하루 종일 울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루 종일 웃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하하하하 하루 종일 웃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퍼서 하루 종일 눈물이 나고 눈이 퉁퉁 붓고 울 수는 있습니다. 무슨 의미이죠? 인생에는 웃음보다 슬픔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짧은 웃음으로 말미암아 그 긴 슬픔이 일거에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주십니다. 긴 슬픔도 한 순간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다 사라져서 우리 삶의 색조가 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게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케 하시는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무언가 기울어지는 것이 있으면 하나의 우등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 내게 어둠이 있으면 어딘가 내게 기쁨이 차근차근 쌓여져 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이 쌓아두신 기쁨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가장 큰 어려움이 나에게 있는 것 같을 때 그것을 통해서 나에게 이루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반드시 찾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끊임없는 기회를 주시고 그 은혜를 알고 끝까지 수고하고 애쓰면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심을 믿고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야 합니다. 꿈과 소망이 없어져보일 때 내 인생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까 망연자실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시편 37:4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실수하고 죄짓고 잘못해서 능력이 부족해서 넘어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뻔뻔스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되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몹쓸 뻔뻔스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자비를 기대하는 우리의 축복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기대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저희 집에 딸 아이 셋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가운데 때로는 부모의 마음을 섭섭하게도 하고 기쁘게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좀 섭섭한 마음이 있다가 제가 어디 나가려고 하면 아이들이 따라오면서 문 앞에서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한 마디 하면 그런 섭섭했던 마음들이 다 사라집니다. 상냥하게 인사하는 한 마디에 모든 마음이 다 녹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한 번 더 기회를 주세요.”라고 하면 우리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끝까지 원한을 품고 계시겠습니까? 우리가 죽을 죄를 지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도저히 살 수 없는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인간들도 자식을 사랑하는데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그의 자녀를 사랑하시는 은혜의 자비와 축복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감격할 뿐입니다.

사랑하면 허물이 안보입니다. 사랑하면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고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옆 사람의 허물이 보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의 허물이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이 식어져서 허물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내 죄 내 허물이 보이시겠습니까. 죄와 허물이 보이면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덮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 있다고 가출하는 사람 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잘못했다고 “잘못했습니다. 죄값을 받겠습니다.”라며 가출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는 우리들도, 자녀가 잘못을 반성하며 용서해주세요라고 나오는 자녀에게 더 기대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자비를 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자녀들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풀무불에 던져질 수도 있고 우리는 사자굴에 던져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풀무불에 던져져도 사자굴에 던져져도 다니엘처럼 모함과 계략에 빠져도 그 가운데 우리는 분명히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믿음의 백성이요 악인은 넘어짐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그것으로 엎드러지고 마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떤 순간, 어떤 어려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순간마다 일어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아름다운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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