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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기적과 축복은 우연히(by chance) 찾아오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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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축복은 우연히(by chance) 찾아오지 않습니다(눅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발명왕 하면, 토마스 에디슨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1,300개 이상의 발명특허를 얻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디슨이 어렸을 때에는 저능아로 취급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규학교에서도 쫓겨났습니다.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어머니는 낙심하지 않고 그에게 용기와 소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꾸준한 연구를 하는 가운데 어느 날엔가는 기차안에서 발명품을 실험하다가 그만 불을 내는 바람에 얻어 맞아 가지고 귀먹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보십시오. 훗날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참으로 감사할 것은, 내가 귀머거리가 됨으로써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오늘에 이르러서 이같이 많은 발명품을 개발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고 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귀먹어리됨을 감사했습니다. 삼중고로 시달려야만 했던 헬렌 켈러 여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이 불구때문에 나 자신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내가 불구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고백하엿습니다. 보세요. 저들은 한결같이 잃어 버린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귀머거리 됨으로써, 소경이 됨으로써, 벙어리가 됨으로써 얻은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환경속에서도 얼마든지 감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어떤 불행에 처했든, 실패했든, 병들었든, 가난했든,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앞에서 내가 얻게 되는 것, 얻은 것, 그 소중한 것들을 생각할 때에 그런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아이작 월톤’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단 두 곳 뿐이다. 하나는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심령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감사를 잃어버렸다면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어렵다는 말입됩니다.

그런가 하면, 작가 오혜령씨가 어느 해 감사주일을 앞두고, 감사할 것을 찾아보니, 2,000가지 감사 제목이 나오더랍니다. 그가 말하기를 "당연한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인생이 팔자 소관이요.. 우연이라 믿으면 감사가 필요없습니다. 누구에게 감사할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안다면, 감사는 복된 삶을 사는 데 너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특히 남자들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세 차례 반드시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야 하며, 빈 손으로 와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감사절기를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감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복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확인이요, 훈련이고, 준비인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자라야, 복을 받을 수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찬송가 해설가로 유명한 김경선 장로님은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것은 또 다시 받을 길을 열어 놓는 것이다.”라는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줄수록 양양인 사람에게는 다시 줄 마음이 없습니다마는 반대로 줄 때마다 감사하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더 주고 싶은 법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스펄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반딧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촛불을 주시고,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전기불을 주시고, 전기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주시고, 밤이 없는 천국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갑사를 해보면 더욱 큰 축복은 우리 곁에서 이루어 지기에 기적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누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감사하는 사람만이 천국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옥의 삶이 따로 있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며, 그리고 미워하며 사는 그곳이 바로 '지옥'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유명한 단테가 쓴 '신곡'이라는 책에도 보면 '지옥편'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지옥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고생할 사람은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가롯 유다같은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서인 골로새서 2장에 보면, "너희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감사하는 사람이 진정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치유와 구원의 기적과 은혜를 누릴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내용은 열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모두 치유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그 중에 한 사람만이 감사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해 보면, 기적과 축복은 우연히 찾아오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맥추감사절을 통해 어떻게 살아여 한다는 것입니까?


1. 감사할 수 없어도 감사해 봅시다.

우선 문둥병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어느 한촌에 들어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 한 촌이란? 문둥병자들 만이 모여 사는 촌을 의미합니다. 일단 문둥병이 들었다 하면, 사랑하는 가족들과는 격리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 가정에서 동네밖으로 쫓겨나서 따로 격리되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죽어서도 따로 묻히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 출입은 물론이고, 성물을 먹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고요?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은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었습니다. 그래 당시에는 하나님의 저주받은 병이라고 불리던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여기에 열명의 문둥이들이 비참한 것은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고침받을 수 있다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 기대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살아 있다고는 하나 결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소망이 없었던 그들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마침 예수님이 자신들이 거하는 촌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가까이 갈 수는 없고, 그저 멀리서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느냐구요?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자들은 사람을 가까이 해서는 안될 사람들입니다. 성한 사람이 가까이 올려고 했을 때에는 손으로 입을 가리우고 ‘나는 부정하다’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돌로 맞아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노릇입니까?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문둥이들이 멀리서 그야말로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부르짖었습니까? 13절에 보면,“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였습니다. 고쳐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불쌍히만 여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고침 받을만한 무슨 의라든지, 자격이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 자신들임을 알았기에 긍휼만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앞에 서 있는 우리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만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우리에게 의가 있고, 자격이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전혀 무자격한 가운데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무자격한 가운데 그 은혜를 누리고 있을뿐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 따름입니다. 그저 오늘도 내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뿐입니다. 저는 새벽마다 나를 위한 유일한 기도가 있다면 “하나님이여, 제발 이 놈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밤을 새워 가면서 부르짖고 기도한다고 하지만 줄이고 또 줄이면‘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의 이웃을, 우리 민족을 긍훌히 여겨 주옵소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만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저 유명한 나폴레옹 황제의 병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탈영을 했다가 붙들려 왔습니다. 이번이 두번째 탈영이었기에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는 그의 어머니가 달려와서 나폴레옹 황제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황제여, 내 아들을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나폴레옹이 거절하며 한마디 했습니다.“두번씩이나 탈영한 네 아들을 위해서 탄원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니라.”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 “황제여, 저는 지금 의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자비를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더 완강하게 나왔더랍니다.“한 번도 아닌 두 번이다. 두 번씩이나 탈영한 네 아들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느니라.”그러자 다시 엎드렸습니다.“황제시여, 자격이 없기 때문에 나는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격이 있었더라면 내가 무었때문에 긍휼을 구하겠습니까? 제발 자비만은 거두지 말아 주소서.”라고 호소하였 결국 이 어머니의 탄원대로 황제의 긍휼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감사제사의 방법을 생각해 보면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추수한 곡식 낟알을 빻아서 가루를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가루 낸 밀가루를 갖고 빵을 만드는데, 누룩을 넣어서 만듭니다. 그때에 소제에 드리는 제사의 양이 얼마 정도나 되냐 하면,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라 했습니다.

'일에바는 23리터'입니다. 그런데 십분의 일에바는 2.3리터고 십분의 이 에바는 4.6리터입니다. 이것을 갖고 빵을 두 개 만들라 했으니, 빵 하나의 크기는 십분의 일 에바로 만드는 것인데, 2.3리터입니다. 우리가 그전에 학교 다닐때에 쓰던 커다란 주전자가 4리터입니다. 작은 주전자는 2리터입니다. 2리터의 밀가루에 누룩을 집어넣고, 반죽을 해서 빵을 만듭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2.3kg짜리 밀가루를 갖고 반죽을 해서 빵을 만들면 얼마나 크겠습니까? 집에서 쓰는 것 갖고는 어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커다란 솥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물을 부면 보통 세배정도 부풀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두 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하나가 이만하다고 보면, 2.3kg를 반죽해서 만들었다면 3kg는 넘었을 거란 말입니다. 3kg짜리를 하나씩 들고 흔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곡식을 빻아서 가루를 만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빻아야 합니다. 그냥 뭉쳐서 보지 말고, 이것을 쪼개서 보자는 말입니다. 뭉쳐서 보지 말고 우리의 삶과 마음을 작게 쪼개 보십시오. 밀가루를 빻을 때 맛있는 빵을 만들려면 아주 가늘게 빻아야 합니다. 마음을 빻으면 빻을수록 맛있는 빵, 맛있는 인생이 만들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맛있는 인생을 하나 소개해 보겠습니다. 영국의 신학자요, 유명한 성서주석가인 매튜헨리 목사님께서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돈지갑을 도둑맞았답니다. 그리고, 이 목사님이 하나님께 네 가지 감사를 드리는데,

① 전에는 도둑맞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② 도둑이 내 생명은 뺏아가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③ 지갑을 도둑맞았지만, 내 전재산은 도둑 맞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④ 내가 도둑이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했답니다.

어떻게 도둑을 맞았는데,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마음을 쪼개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가 더 맛있는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신은 부서진 것을 사용하신다고 했습니다.

낱알 그대로인 밀을 갖고는 빵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밀을 부수어 뜨려 밀가루를 만들어야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과 마음을 부수고 잘게 빻아서 많은 감사로 하나님 앞에 드릴 때에 그 인생은 맛있는 인생이고, 하나님은 그 제물을 기쁘게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마음은 들 수 있지 않습니까? 병들어도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 되면 흔들 수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자식에게 우리 성도간에 맛있는 빵을 만들어 흔들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어두운 역사속에서 죄악가운데 빠져 있는 이 백성들의 오늘의 현실을 바라볼 때에, 문둥이들만이 긍훌이 필요한 것입니까? 이것은 문둥이들이 아닌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소망이 없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긍휼을 얻을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외아들인 예수님을 희생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 소망을 가집시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이요, 희망이 없는 현실이라고 단정하지 말고

“하나님이여! 이 악함, 이 어두움, 이 죄악에도 불구하고 한번 더 이 땅과 저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저를 사랑하심을 믿사오니 도와 주옵소서! ” 하나님의 긍휼만이 병든 이 땅과 나의 사업터와 직장과 학원과 가정과 심령을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오늘 구한 것은 오직 긍휼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구함으로 기적을 만드는 지혜로운 삶을 만들어 가시기를 복빌어 드립니다.

미국의 미식축구 최우수 선수상을 받은 사람 가운데 쿠르드 워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이 상을 받을 때에 "오늘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과 나를 위해 기도한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분이 무명에 가까웠기에 최우수 선수상을 받으리라고는 예상을 못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상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분이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전도집회에 나와서 간증을 했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헌신한 크리스챤입니다. 나는 한낱 풋볼 선수가 아닙니다. 볼을 던질 때마다 머리 속에는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나는 시합 내내 이길까 질까 승부의 결과보다 이 경기를 통해서 하나님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대가도 없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원하느냐는 말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많은 것을 바치고도 그 욕심, 사심 때문에 그 앞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헌신을 할려고 하면 깨끗하고 온전한 헌신을 해야 합니다. 일하면서 대가를 바라거나 대접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신앙이요,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의 모습이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사도바울의 말씀의 실천입니다.

사심없고 욕심없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 주시고 은혜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남편을 섬기시고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키우시고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봉사하시고, 직장 생활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 사랑하시고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너희에게 주리라`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긍휼속에 살고 있음을 감사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늘 충만히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번째 나환자들과 같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분문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마저도 문둥병자들을 무시하는 것 같은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들 무시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를 무시야 하시갰습니까? 그러나 자격지심에 그렇게 생가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나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거나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질명이나 우환, 사고, 위기가 찾아올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바로 나아만 장군이 여기서 시험들었다는 것 아닙니까?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백방으로 손을 써 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스라엘 나라에서 붙잡아 온 식모 아이가 엘리사를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소년의 말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엘리사 목사님이라면 충분히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선물보따리를 짊어지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갑니다. 그런데 엘리사를 보십시오. 문밖에 나와 보지도 않고 그저 종을 시켜서 ‘돌아가다가 요단강 물에 일곱번 목욕하라.’고 자신의 사환을 통해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상5:11에 보면,“나아만이 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생각에는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에 손을 얹고 흔들어 병을 고칠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안수기도나 안찰기도를 통해서 병을 고쳐 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된 말로 ‘에이 쌍!’하고 돌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실망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실족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등의 다를바가 없는 상황입니다. 열명의 문둥병자들 역시 예수님이 가까이 오셔서 자기들 머리위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하신다든지, 아니면 몸에 손을 얹고 안찰기도를 해서 고쳐 주신다든지 했으면 모를까? 그저 "가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쳐 주신 다음에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셔야지, 이 상태로 가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책망을 듣든지 벌을 받을 지도 모릅니다. 천대를 받을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 들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과학'과 '믿음'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믿음과 지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과학은 정확한 데이타를 요구합니다. 0.1% 실패확률도 없을 때에야 움직이는 것이 과학입니다. 정확한 지식을, 합리적인 경험의 통계와 지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99.9%가 불투명 하다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싶으면 용기있게 실천하며,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즉,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해 보여도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믿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축봅기 만들어 집니다.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이해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는 것입니까? '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를 보면,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바를 내가 알고”입니다. 내가 아는 바를 믿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해가 먼저가 아닌 믿음이 먼저입니다. 가령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타지방에 초행길을 간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그때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도일 것입니다.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을 이해하고??가십니까? 아니면 믿고 가는 것입니까?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어떻게 이해하고 간단 말입니까? 믿고 가는 것입니다. 그 지도를 믿고 가는 것입니다. 믿고 갔더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습니다. 그 다음 이제 두번째로 갈 때에는 믿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이미 한 번 갔다 온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이해에??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하찮은 진리도 믿어야 아는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에??대해서 이해 안 된다고, 성경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고, 예수님의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부정하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은, 마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 이해가 안 된다고 못가겠다, 못 믿겠다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믿음을 통해서 지식에 이르고, 이해에 이르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기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들은 자기들의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른 것이 아닌, 저들은 믿음을 통해서 이해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가라시는 말씀만 믿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저들이 믿는 바를 곧 이해하게 되었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4절 하반절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했습니다. 가라시는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행동으로 옮기다가 중간에서 치유받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들의 믿음이 저들의 병을 치유한 것입니다. 저들의 행동하는 믿음이 불치의 병에서 자유함을 얻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병을 치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의학계에서도 널리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최근 몇년 전에 미국의 보스톤에서 하버드 의과대학 심신의학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심령치료의 효과와 역활”에 관한 세미나가 열렸었습니다. '다트머스 의과대학의 옥스만 박사'와 그의 연구팀이 95년도에 심장병 수술을 받은 환자 132명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수술 후 6개월 이내에 사망한 사람 중에, 교회에 전혀 다니지 않은 사람의 사망률이 12%였고, 가끔씩 출석한 사람의 사망률이 5%로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신앙심이 깊고 적극적으로 교회를 다닌 사람은 모두 건강을 되찾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발표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서 분당 차병원 통증센타의 최윤근 소장은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그것은 신자들이 비신자들보다 마음의 안정을 얻어 스트레스 호르몬을 적게 분비하며, 면역계나 심혈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신경내분비 반응을 억제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듀크 대학의 해롤드 G. 코에니 박사가 1700명을 대상으로 종교적 활동과 면역계 기능과의 상관관계를 조사해서 발표한 논문이 소개되어 화재를 모으고 있습니다. 코에니 박사는 교회 출석율이 낮은 사람일수록 '면역계의 부조화를 나타내는 인터루킨이 6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 말은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감사가 맣은 사람일 수록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감사하는 믿음과 건강의 상관관계를 강조하는 논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의학계에서도 이 놀라운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과 신앙이 없는 사람은 치료과정에서도 차이가 있을 뿐만아니라 수술 후에 회복도 신자들이 빠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확신있게 외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이요, 믿음의 결국은 곧 기적을 낳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약 5:14은 말씀합니다.“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통해 우리의 삼ㄹ에 적용을 한 번 해 보시다. 과연 여러분들은 나의 호나경을 초원하여 감사하고 있습니까? 신앙 생활하면서 조건이나 결과를 따지지 않고, 먼저 얼마나 감사해 보셨습니까?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대로라면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가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저들은 그대로 순종했더니, 그 결국은 문둥병에서의 자유함이었습니다. 가라고 하실때 우리는 가면 됩니다. 가는 것은 내가 할 일이고, 고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너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지시한 땅에 대한 아무런 정보나 준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 훗날 히브리서 기자는 히 11장에서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떠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가나안의 주인공이 되며, 복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은 철저하게 순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하므로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3. 배은망덕을 버리고, 사마리아인의 감사를 따라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고침을 받은 열명 중의 한 사람만이 감사하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謝禮)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그 중에 하나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 하반절에 보면,.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했습니다. “저희가”즉 열명이 다 고침을 받았건만 그 중에 한 사람만이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홉명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여기에 예수님의 섭섭함과 유감스러움이 있습니다.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오늘도 그 아홉을 찾고 계시는 주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여기 돌아와서 감사한 사람이 누구라구요?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그는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에다 이방인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 사람취급을 받지도 못했던 존재였습니다. 짐승과 이방인의 차이는 말귀를 알아듣고, 못알아 듣고에 있을 뿐입니다. 그외에는 짐승과 꼭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짐승취급을 받던 사람은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하는데, 너희 사람같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느냐는 것입니다. 너희 유대인들은 다 어디 갔느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본문에서 나타난 통계라면 9:1의 감사비율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이요. 현대인들의 모습이 아니겠냐는 반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열명이 은혜를 입었으면, 그중에 한 사람 정도 감사하면 다행이라는 성서적인 통계에 혹시 내가 포함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감사!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생동안 감사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면 감사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가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맨추감사절을 통해 이 귀한 감사의 퍼센트를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옆 사람에게 서로 이야기 합시다. "감사할 수 없어도 감사합시다.",??"믿음으로 감사합시다.",??"결코 배은 망덕하지 맙시다." "그렇게 사십니까?"


왜 현대인들이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되어 갈까를 생각해 보면 중요한 몇 가지의 이유를 발견합니다.

1) 그것은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당연하다는 생각때문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하도 속을 썩이니까 어머니가 그 자식을 앞에 놓고 종아리를 때리면서 한 마디 했더랍니다. '네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내 혼자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네 놈이 이러느냐고, 네가 정말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아들이 뭐라고 한줄 아십니까? '누가 나를 낳으랬어요? 누가 어머니 보고 혼자 살라고 했습니까?'라고 따지더랍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기르고 희생하고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하면서 오히려 대 들더랍니다.

이것이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사고입니다. 오늘의 세대들은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있다는 입니다. 옛날에는 '스승의 날'이다 하면, 그래도 선물은 못할 지언정, 마음만은 고맙게 생각하면서 노래를 불러 드리며, 꽃다발이라도 드리며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내가 비싼 등록금 내서 공부하는데 은혜는 무슨 은혜냐?'는 생각입니다. '선생님은 월급받으면서 가르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반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처럼 살벌할 때도 없었다고 합니다. 스승이 학생들에게 매를 맞아 가면서 가르친 때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학교가 스승과 제자의 인격적인 만남의 장이 아닌,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사고 파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입니다. 여기에도 당연논리가 적용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저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저 북한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쯤되면 감사하다고 한마디 할만한데도 전혀 아니거든요? 그야말로 ‘물에 떠 내려 가는 사람을 건져 주었더니만 보따리 내 놓으라’는 식입니다. 보세요, 죽어가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쌀을 보내준다, 소를 보내준다, 의약품을 보내준다, 달러를 보내준다, 비료를 보내준다고 하는데도 오히려 큰 소리는 저쪽에서 내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우리가 큰 빚이라고 진양, 빚 독촉받고 있습니다. 어째서 저 모양일까?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고가 바뀌지 않으면 당연하다는 생각때문에 이해가 되긴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곳에는 감사가 발 붙일 틈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생각이십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당연하다는 생각이십니까? 불편과 불만이 입에서 나오면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당연하다는 잘못된 생각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까?

2) 또 하나의 원인은 지극히 세속적인 그릇된 가치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치관과 세속적인 가치관은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가치관에 따르면, 물질이 아닌 관계속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내가 말씀속에 살며,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 지는 것을 진정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가치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하면, 복은 욕망과 욕심속에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이 이루어 지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욕망과 욕심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지느냐에 따라서 감사의 사람이 되기도 하고,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만 되나요?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에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원망과 불평가운데서 살아간다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50:23)”그랬습니다. 감사하는 그가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미국 뉴욕의 빈민가에 사는 아이들이 범죄의 길로 빠져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파머부인'은 빈민가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행복클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세가지를 실천을 하게 하였는데, 하나는 매일 한가지 이상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기, 둘째는 매일 한가지 이상 좋을 일을 하기, 셋째는 매일 한가지 이상 감사하기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들이 빈민가의 굴레에서 벗어난 삶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맥추절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 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맥추절에 엄청난 영적인 복을 담아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게 하셨습니다. 이 날 성령을 부으셔서 교회가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들이 맥추절을 알고, 지키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자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9:1의 감사! 문제는 나는 어느쪽에 속하는 사람인 것인지 사펴보아야 합니다. 혹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3대절기 하면,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입니다. 이 오순절은 다른 말로는 '맥추절 또는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였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감사를 상기시키며, 가르치는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에는 더 중요한 현대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1년 열두달을 놓고, 전반기를 무사히 보내면서 드리는 감사절입니다. 전반기와 같이 후반기에도 인도해 주십사는 마음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이런 뜻깊은 절기를 맞이하여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감사함이 회복이 되며, 그 감사가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로 인하여 좀더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감사를 깨닫고 주님께 돌아와 더욱 큰 복을 받은 사마리아인처럼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감사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할찌라도 '소망가운데 감사를 하며 살며, 믿음으로 감사하며, 배은망덕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감사를 회복하여 기적과 축복을 만드는 복된 성도 여러분 무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복 빌어 드립니다.'

[기도]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썩어지는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끝없는 욕망 가운데 붙들려 사는 저희들로 하여금 이 시간에 주님 앞에 나와서 세상에 집착한 더러운 마음을 씻고, 탐욕의 눈을 씻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 특별히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아홉명의 나환자처럼 감사가 메말라가는 우리들의 심령속에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시사 감사의 마음이 회복이 되며,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서도 천국과 같은 삶을 맛보며, 감사를 통해 더욱 큰 감사를 만드는 생활의 기적을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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