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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식적인 신앙과 세속적인 신앙 (마 1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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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지역에서도 유대 땅에서와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셨던 예수님은 다시금 유대 땅에 돌아오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하셨던 말씀을 빌리자면, ‘자녀들’로 배불리 먹이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대 땅에 돌아오자마자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저항에 부딪치게 됩니다.

1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고 묶여져 있어서 둘 다 한통속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당시에는 서로 적대하며 날카롭게 대립했던 분파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주어진 계시에 무언가를 자꾸 ‘덧붙이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전통과 까다로운 의식들을 많이 만들어 내다보니,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사두개인들은 주어진 계시에서 무언가를 자꾸 ‘빼버리기’ 좋아했습니다.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천사나 부활이나 모든 신비한 요소를 믿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위한 신앙을 추구하다가 세속적인 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앙숙지간처럼 다투던 두 그룹이 예수님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하나로 연합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했던 동기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들을 보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늘로서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리게 하거나, 하늘로부터 우박을 내려 로마제국을 무찌르는 등의 굉장한 표적이 있어야만 믿겠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모든 표적들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습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들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이방인들의 반응과 아주 대조됩니다(15:31).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2-3) ‘시대의 표적’이라는 표현은 신약 전체를 통틀어서 이곳에서만 등장합니다. 이 용어는 ‘각 시대마다 나타나는 징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행하셨던 기적들’을 말합니다. 벙어리가 말하고, 절뚝발이가 걷고, 소경이 보는 이러한 역사들은 예수께서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는 표적들입니다.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되는 표적들을 보고서도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면, 뭘 더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4)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던 선지자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시다가 다시 살아나 심판의 주로 사역하실 일을 계시한 표적입니다. 누구보다 경건하고 거룩해 보이는 그들이 ‘악하고 음란하다’는 정죄를 받았다는 것은 참 역설적입니다. 원래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을 행해 구약의 선지자들이 사용했던 용어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지 않은 그들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보여줄 수 있는 최후의 표적입니다. 그 표적마저 거절한다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준엄한 심판밖에 없습니다.

흔히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들이 있는데 성도들은 그 징조를 분별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말씀의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 끝은 아무런 징조 없이 갑자기 임할 것’이기 때문에 ‘깨어있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그런 의미였다면, 우리 시대에도 표적이 계속 있어야 하고 십자가는 최후의 표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님께서 이미 행하셨던 많은 표적들을 통해서 메시아이심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아 있었던 최후의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그 이상의 표적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시대에도 다른 표적들이 필요치 않으며, 오직 성경만으로 그분께서 메시아이심을 믿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녀들로 배불리 먹이기 원하셨으나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긍휼을 구했던 수로보니게 여인과 이방인들은 풍성한 은혜를 맛보았지만, 악하고 음란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떡 부스러기 은혜조차 받을 수 없었습니다. 자녀들부터 배불리 먹이려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했겠습니까? 그들의 악영향이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퍼지지 않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6).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어이가 없습니다. 늘 결혼 문제로 고민하던 어떤 사람이 설교를 듣다가 목사님이 ‘결혼적으로’라고 말하자 귀가 쫑긋해졌는데, 알고 보니 ‘결론적으로’라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의 마음은 온통 떡 생각으로 가득해서 ‘누룩’하니까 자동적으로 빵 생각이 났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만큼 그들은 배가 고픈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빵문제는 그들에게 늘 시급한 현실 문제였습니다. 빵 때문에 신경 써야 하고, 빵 때문에 고민해야 하고, 빵 때문에 눈물 흘려야 하는 것이 그들의 처지였기 때문에, 비록 한 순간 배가 빵빵했어도 앞으로 굶게 될 날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기도문을 외면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대목이 나올 때마다, 다가온 취업 시험이 생각나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자식 걱정, 장래 염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적은 믿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원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8-11) 제자들은 기적의 현장마다 함께 하면서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맛보며 살았습니다. 사실 떡을 몇 억 광주리 소유한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보다 더 든든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그들보다 더 완벽하게 보장된 삶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적은 연고입니다. 칭찬을 받았던 수로보니게 여인과 제자들의 모습이 참 대조적입니다.

저는 언제나 자신의 무능한 모습으로 절망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우연히 별점을 봤는데 계장도 못될 팔자라고 되어 있어서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바보 같음 때문에 장가도 못가리라 생각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제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골골하는 몸뚱이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긍휼히 여기신 주님은, 돈 한 푼 없었던 저도 좋은 아내 만나서 결혼하게 하셨고, 사랑스런 두 아이의 아빠로 살게 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꿀과 우유를 참 좋아하는데 결혼하고 이날까지 집에 꿀과 우유가 떨어진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농담 삼아 우리 집에는 항상 ‘젖과 꿀이 흐른다’고 말하곤 합니다. 생업을 포기하고 간사로 살아가면서 ‘나도 저런 것 먹어보았으면’, ‘나도 저런 것 입어봤으면’, ‘나도 저런 곳 가봤으면’하고 부러워하던 마음의 은밀한 생각까지 아시고, 채워주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겨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르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도 다시 염려하는 ‘믿음이 적은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주님의 안타까운 음성을 듣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하나님 앞에 아직도 믿음이 장성한 자가 되지 못한, 역사의식 없는 모습이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제자들 역시 ‘믿음이 적은 자’였다는 사실이 사실은 제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27-29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은혜가 필요 없다고 자랑할 만큼 큰 믿음을 가진 사람도 없고, 더 이상 은혜를 받을 수 없을 만큼 믿음이 아주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항상 이전에 베푸셨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공급하심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야 “떡이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았습니다(12). 비록 믿음이 적은 자들이기는 했으나, 제자들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고의적으로 주님을 대적하고 시험하는 자와는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형식적인 신앙인들이 아니었고, 사두개인처럼 세속적인 신앙인들도 아니었습니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하고 마음은 떠나 있는 그들과는 달리,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들은 진실하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반 박자 늦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경계하셨습니다. 6절에서 경고하시고, 11절에서 다시 경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사두개인들의 세속주의 욕망이 누룩처럼 퍼질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누룩은 발효성이 강해서 하룻밤 사이에 온 반죽을 부풀게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누룩이 침투하면 부풀지 않도록 막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누룩은 침투되기 전에 방어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인, 세속적인 신앙인은 처음부터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경건했던 사람도, 처음에는 상당히 합리적이었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누룩에 부푼 빵처럼 이상하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눈을 피해 조금씩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 신앙생활을 오직 현실적인 문제 해결의 수단처럼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신앙생활의 생명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누룩입니다.

불신자보다 더 악하고 음란한 것이 형식적인 신자와 세속적인 신자의 삶입니다. 주변의 많은 신자들이 그처럼 살고 있을 때, 나 혼자 꼬장꼬장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 타협하면 신앙생활에 맥이 빠지고 헌신적인 주님의 제자로 살 수 없습니다. ‘형식주의와 세속주의’라는 두 덩어리의 누룩은 항상 경계해야할 신앙생활의 적입니다.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가 베풀어지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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