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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4) (창 3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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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조금씩 나이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얼굴’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는 것과 평생을 예수 믿으면서도, 더군다나 목사로 헌신하여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하나님 닮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지는 것은 조금 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안타까움이 생겼을 때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본래의 내 모습이 하나님과 같았다는 것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씀에 얼마나 큰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감동을 받은 후 성경을 하나님 닮은 하나님의 사람들 모습을 중심으로 읽으니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아직도 멀었지만, 그래서 이런 저런 실수를 많이 하며 살지만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성경의 인물들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형상을 추적하며, 그것을 부러워하며, 닮아가기 위하여 노력하며 기도하며 살고 싶습니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 전혀 닮지 않은 저와 여러분들을 그저 하나님을 믿는다는 단 하나만의 이유로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늦게라도 하나님 닮아가는 삶에 남은 인생을 걸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오늘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 네 번째 시간으로 요셉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셉을 생각하면 우리는 먼저 그의 꿈을 생각합니다. 자기의 형제를 상징하는 열 한 볏단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제를 상징하는 열 한 별과 부모를 상징하는 해와 달까지도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을 이야기하며 흔히 요셉을 꿈의 사람, 비전의 사람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요셉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그 요셉이 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셉에게 그와 같은 야망, 좋은 말로 하면 비전이 있어서 그와 같은 꿈을 꾼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은 꼭 요셉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계시와 예언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같은 계시와 예언을 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와 같은 가능성을 열어 놓고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서 발견되어지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은 그와 같이 아름다운 꿈속에서 발견되어 진다기 보다는 오히려 꿈과 정 반대의 비참하고 냉혹한 현실 속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더 이상 힘들어지고 낮아 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요셉은 꿈과는 전혀 다른 현실에서 산 사람입니다. 형들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종이란 신분은 지금 우리 현대인들이 실존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많다고 해도 이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종이 된 것만으로도 그 삶의 억울함과 비참함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데, 요셉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깊은 옥에 기약도 없이 갇히는 죄수가 되고 맙니다. 그냥 죄수와는 다릅니다. 종이 죄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약도 없이 갇히는 죄수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열 한 볏단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것을 꿈꾸었던 요셉이 살아야만 했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 그 어디를 보아도 요셉이 낙심하고 절망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였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혹시 요셉이 절망하고 원망했지만 성경에 그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을 아닐까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그 삶의 증거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증거는 요셉이 종과 죄수의 노릇을 아주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하였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종노릇을 하도 잘 하여 종중의 종이 되었으며 죄수 노릇도 성실하게 잘하여 성경에 보니 전옥이 감옥의 모든 죄수를 요셉이 관리하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갈 때부터 죽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평생과 형들과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폐인처럼 죽었다고 하여도 요셉을 탓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비관하지 아니하고, 공평치 아니하고 선하지 아니한 세상과 사람들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자기가 어려서 꾸었던 꿈을 이루어갔습니다. 형들을 원망해도 되고, 자신의 거센 팔자를 탓해도 되겠건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꿈은 꿈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꿈은 어떠한 일을 만나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아니하고,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정말 눈물과 땀과 피로 하나 하나 쌓아 이룬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요셉의 모습은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훌륭해 보입니다.

툭하면 절망하고, 비관하고, 남을 탓하고 원망하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요셉과 같이 원망과 시비 없이 절망과 비관 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을 이루어가는 모습은 얼마나 근사한지 모릅니다.

요셉에게서 보여 지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은 ‘용서’입니다. 요셉의 일생은 정말 드라마와 같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팔려간 애굽 땅에서 왕의 권력을 가진 총리가 됩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판 형들이 애굽으로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저들이 요셉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설도 이와 같은 소설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었습니다. 보통 소설이었다면 자신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먹은 형들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중국의 무술 영화와 옛날 서부 영화와 같은 식의 영화를 우리는 대개 좋아합니다. 통쾌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통쾌하게 합니다. 그것은 ‘복수’입니다. 그것은 헐리우드 영화에도 있습니다. 슈퍼맨이라든가 스파이더맨의 주제도 다 그와 같은 권선징악 또는 복수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복수하고 싶고, 응징해 주고 싶은 대상이 있는데 힘이 없어서, 기회가 실제로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영화를 통해 대신 하는 것입니다. 대리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소설과 영화의 주제는 권선징악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때 요셉의 이야기도 매우 좋은 소설 감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습니다. 용서합니다. 저들을 끓어 않고 웁니다. 그저 매 몇 대 맞은 정도의 일이었다면 이해가 됩니다. 그저 돈 몇 푼 손해나고 말았던 일이라면 그렇게 용서하는 사람들 아마 세상에 더러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다릅니다.

어린 나이에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 종으로 왔을 때 그가 당했을 두려움과 공포는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종과 죄수의 신분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세상말로 썩히고 있었을 때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들은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형들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속이고 형들과 대화하다가 마음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밖으로 나가 통곡을 했다는 말씀이 감동이 됩니다.

눈을 작게 뜨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 주먹을 부르르 떨며 형들에게 가장 참혹한 복수를 맹세하여야 할 자리였는데, 요셉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형들이 원수로 여겨지지 않고 형제로 여겨져 그 정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는 요셉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입니다. 권선징악적인 복수도 통쾌한데 그것을 넘어선 요셉의 용서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큼 통쾌합니다. 정말 통쾌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요셉에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요셉에게는 아주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모든 일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며 궁극적으로 자기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요셉은 믿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식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자기가 당하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이해하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잠잠히 그러나 분명히 믿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애굽으로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흉년 때 자기 가족과 백성들을 굶어 죽지 않고 보호하시기 위하여 앞서서 자기를 애굽 땅에 보내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단순해 보이는 그 믿음이 요셉을 그렇게 근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 닮은 사람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단순해 보이지만 확고한 그 믿음 때문에 요셉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결입니다. 본능적인 욕구마저도 제어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입니다. 순결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살지만 정말 육신이 약하여 매일 매일 세상에서 넘어지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인데 요셉은 그것을 이기며 단호하게 자신의 순결을 지킵니다.

그 때문에 말도 못할 억울한 일을 당하지만 그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요셉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요셉에게서는 마치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버리시고 포기하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요셉은 한번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심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엄청나고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반듯하고 흔들림이 없는 믿음 하나가 사람을 그렇게 근사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편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향기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합니다.

믿음은 참으로 보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질그릇 같은 존재들이어서 깨어지기도 잘하고 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정말 몇 푼 안 되는 존재이지만, 그 질그릇 같은 존재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실제와 섭리를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보배로운 가치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사도바울은 고린도 후서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 취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 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 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5-10)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다 요셉 같은 사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셉같이 근사한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믿음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떤 환난과 고난을 당하여도 그것을 요셉처럼 하나님의 섭리로 믿고 그 있는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종과 같은 자리에서, 죄수와 같은 자리에서 절망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남을 탓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아니하고, 이해는 잘 안 되지만, 정말로 이해는 안 되지만, 그래도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믿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요셉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의 역전 되어 세상과 자신을 조롱하고 억울하게 한 사람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는다 해도 저들을 용서하고 가슴에 품고 통곡하며 울 수 있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냥 한번만 눈 질끈 감으면, 얼마든지 세상 부귀와 영화와 쾌락을 다 누릴 수 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에 끌리는 본능이 내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하나님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늘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시고 살펴보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것을 거절하고 자신의 순결을 지킬 수 있는 요셉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말씀이 요셉에 대한 옛날이야기가 되지 않고 우리들이 주인공이 되어 삶으로 다시 매 순간순간마다 쓰여 지는 하나님의 편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편지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담겨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깨닫고 감동하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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