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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예배자를 찾습니다 (요 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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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신앙인을 신앙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가? 저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주일대예배가 중요합니다. 주일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믿는 자요, 그렇지 않은 자는 믿음에서 멀어진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 드리는 인생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도 예배입니다. 교회의 모든 건물을 보세요. 그 목적은 단 하나 예배드리기 위한 이유로 건축되었습니다.

신앙인들의 능력의 근원 또한 예배에서 주어집니다. 예배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경험하면 그 힘으로 한 주일을 살아갑니다. 인생이 무미건조하고 활기가 없다면 그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예배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는 영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교제가 일어나야 살 수 있습니다. 예배가 바로 그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기독교의 예배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하고, 인간 생활에서 행해지는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이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하고 또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예배입니다. 그것도 주일대예배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생명이 걸려 있습니다. 예배 대충 드리지 마십시오. 그래서 저는 예배에 관련된 말씀을 몇 주에 걸쳐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오늘 읽은 말씀은 예배의 기원으로 자주 이용됩니다. 또 예배 드리는 우리의 태도를 점검하는 말씀으로 자주 인용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4) 그런데 이 말씀처럼 잘못 이해되고 있는 말씀도 없는 것 같습니다. 먼저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신령’과 ‘진정’이라는 단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신령’이라고 하면 우리는 ‘성스럽다’ ‘거룩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정숙하고 조심하며 일사분란함을 보여야 예배답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목회자는 목회자 가운을 입고 설교해야 합니다. 예배 강단은 높고 그 곳은 신을 벗고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직도 이해 못하는 부분은 세례나 성만찬에서 여전히 흰 장갑을 끼고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일본의 군사와 의식 문화의 잔재일 뿐입니다. ‘신령으로’를 인간이 만들어내는 형식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진정’ 이라고 할 때는 마치 ‘우리 진심을 바쳐서’, ‘우리 정성을 바쳐서’의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인간 편에서의 노력을 강조한 의미들입니다.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신령’은 영어로는 'Spirit'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진정’은 영어로는 'Truth' 곧 ‘진리’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개역개정판에서는 ‘신령과 진정’을 ‘영과 진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사마리아 여인의 의문으로 시작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조상들은 이 산 곧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유대 인인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 맞습니까? 하는 의문입니다. 사마리아란 곳은 원래 이스라엘이 남북 왕조로 분열되었을 때 북 왕조가 있던 곳입니다. 북왕 조는 앗수르란 나라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앗수르는 이 때 북이스라엘에 거하던 사람들 중 많은 수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타지역에 살던 이방인들을 이곳에 거주시켰습니다. 그 결과 모세의 종교와 이방종교가 혼합된 사마리아 종교란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4장 18절에서 예수님이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는 말씀은 이 때 사마리아에 거하게 되었던 이방 다섯 민족(왕하17:24,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 곳 사마리아의 중심지인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인들이 순수성을 상실했다고 하며 이들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그리심 산의 예배든 예루살렘의 예배든 그 모두가 잘못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미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20) 유대인들의 성전 예배 또한 형식화되고 오염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21)고 성경말씀은 해석을 합니다.

오늘 읽은 21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가 장소를 중시하는 예배의 시대의 지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으로 곧 성령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 계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장소나 형식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예배 드리고 있는 이곳에 계십니다. 초막이든 궁궐이든, 사막이든 도시든 하나님께서 영으로 임재하는 그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진리’는 참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참된 앎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에 불과했고, 이제는 실체가 왔으니 그것을 가리키던 그림자들은 사라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

그러므로 예배는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성령은 그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예배를 단순히 종교의식의 일종이나 정신적 각성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현존 의식을 느끼며 나아갈 때 성령은 임하십니다. 옛날 성전 지성소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곳에는, 아니 지성소뿐만 아니라 성소 안에도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곧 죽음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드릴 때 그 두려움을 가지고 계십니까?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굉장히 경건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오늘날의 교회 성도들을 마치 연극장에 연극 한 편 보러온 사람처럼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뭐 색다른 것이 없나, 오늘 성가대 찬양이 괜찮군, 오늘 설교는 별로야! 마치 자신은 관객이고 예배는 자신이 감상하는 한편의 연극처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배우입니다. 관객은 하나님이십니다. 설교자만 예배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배의 참여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예배를 받으시도록 두렵고 떨림의 자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주일 예배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일 전 날 밤이 흥분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무슨 말씀으로 나에게 말씀하실까 기대감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먼 거리에서 오시는 분들입니다. 부천이나 기흥 쪽에서 오려면 한참 시간이 걸립니다. 저는 그런데 그 게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한 시간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한 시간 넘게 걸려 예배당에 온다면 이 분은 두 시간을 예배드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서마다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해야 합니다. 찬양을 부를 때 마치 무대에서 발표하듯 힘 있게 부르십시오. 그러면 우리 영혼이 살아날 것입니다. 세상 예술가들도 작품에 혼을 실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찬양을 아무 맥없이 불러서야 되겠습니까? 기도할 때도 한 사람만 대표 기도한다 생각마시고,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멘 아멘’하며 기도하십시오. 봉헌할 때도 준비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드린다고 생각하며 봉헌하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예배드릴 때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 영혼이 삽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는 일주일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구경꾼 참여하듯 하니 우리가 예배에서 감격을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

우리 모든 예배의 초점은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그분의 말씀이 예배 가운데 선포되어야 합니다. 2천 년 교회 예배 역사에서는 설교라는 것이 따로 없었던 때가 더 많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 것이 설교였습니다. 정해진 성서일과에 따라서 구약 말씀, 서신서 말씀, 복음서 말씀을 읽었습니다. 복음서 말씀을 읽을 때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남으로 마치 예수님을 맞듯이 하였습니다.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만찬이었습니다. 매주 성만찬을 드렸습니다. 떡과 잔이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는 교리(화체설)가 생길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 하나님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여기에 설교가 갖는 중요성을 더 강조하였습니다. 이제는 개신교 예배에서는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의 형태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목회자는 사람이지만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때는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오늘 칼 바르트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은데, 칼 바르트는 가히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라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와 관련된 예화중 하나입니다.

하루는 칼 바르트가 자기 제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제자는 설교하다가 자기 스승이자 대신학자인 칼 바르트가 예배에 참석한 것을 보자 맥이 풀리면서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횡설수설, 그야말로 죽을 쑤는 설교를 하고 예배를 끝마치고 칼 바르트에게 인사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바르트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설교에서 은혜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 제자 목사가 말합니다. “오늘 제가 횡설수설하신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선생님 같은 훌륭하신 분이 어떻게 제 설교에 은혜를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칼 바르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를 위대한 신학자로 보았습니까? 나는 당신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말씀을 들었는데...”

이 강단이란 곳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자나 말씀을 듣는 자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선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는 주의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인간의 말을 감추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자기 뜻을 죽이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설교자는 마치 수도관과 같은 존재입니다. 수도관이 녹이 쓸어서 막히거나 불순물이 흘러나오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중간에 새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는 자칫 잘못하면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그의 설교학 강의에서 되도록 성경 본문을 길게 잡으라고 충고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말을 적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성경 본문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지 말고 성서일과에 따라서 하거나 한 성경을 차례대로 강해할 것을 권합니다. 종교개혁가 루터나 칼빈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손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강해 설교에 주력했습니다. 19세기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설교전집 또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빠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소리를 감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입니다.

우리는 요 근래 북한의 미사일 사태 같은 것을 당하면 우리 설교 주제를 평화나 안보에 맞추고 자의적으로 본문을 선택하여 그 방향으로 설교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소리를 들으려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강해식으로 한 성경을 통해 순서대로 나가더라도 하나님은 그 상황에 적절한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도 살아계셔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강단에 너무 인간의 말이 넘친다는 점입니다. 보수적인 정치의식이나 사고를 가진 분은 자기의 정치의식을 설교에 그대로 실어냅니다. 진보적 의식을 가진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때는 주일 강단이 시국강연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욕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맙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 말씀만을 전하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성도들을 교회로부터 떠나게 만들고, 또 예배가 가지고 있는 거룩함을 스스로 상실하게 만듭니다. 이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그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가 됩니다. 예배가 살수록 우리 영혼도 풍성해지고 살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습니다. 예수님이란 보화는 캐면 캘수록 우리 영혼을 풍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대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 영혼이 행복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우리 심성의 밑바닥을 건드리는 순간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구치는 생수가 터집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면 우리의 목마름이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시며 능력자이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이 분이 우리 심령 안에서 다시 살아나신다면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자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참된 예배자만이 그 영혼이 마르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자만이 참으로 행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을 삽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된 예배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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