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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하나됨의 비결 : 평등을 주장하지 말고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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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하나됨의 비결 : 평등을 주장하지 말고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 오스트리아는, 1945년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4개국에 의하여 신탁통치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좌익과 우익으로 분열의 양상을 보인 것은 우리나라나 오스트리아나 매 일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시기에 오스트리아는 칼 레너(Karl Lehner)를 대통령으로 하여 사회민주당, 기독교사회당, 공산당이 똑같은 수의 대표를 뽑아서 국회를 구성하고 정당마다 똑같은 수의 각료로서 정부를 구성하여 신탁통치를 받기 시작한 지 10년만에, 1955년에 외세를 완전히 벗고 중립국가로서, 독립국가로서 설 수 있었습니다. 내적인 하나됨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북한이 기어코 미사일을 쏘아올리고 주변 열강들이 난리를 치는 모습들 속에서... 하나되지 못하여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겪고... 오늘 이 순간에도 몹쓸 분단구도 속에서 외세에 의하여 이리 치이고 저리 당하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보면, 우리는 공동체가 내적으로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절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가 이처럼 수난을 당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제일 큰 요인은 내적인 요인, 우리 민족이 중요한 시기에 하나되지 못하고 분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이 도둑처럼 주어진 해방은 ‘민족과 교회에 대한 시험’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우리 민족은 그 시험에서 극단적 분열이라는 오답(誤答)을 써 내어서, 6.25전쟁이라는 호된 매를 맞았고 그 후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상태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천형(天刑)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남한이 세계 10대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남북한 대화와 교류의 물꼬가 트인 지금의 시기는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시험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민족은 하나님 앞에서 재시(再試)를 치르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시험문제는 똑같습니다. 남북 관계에서, 또 남한 내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들이 극단적 대결구도를 벗고서 조화를 추구하여 하나됨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됨의 과제 앞에서, 하나님과 우리 민족공동체 사이에 서서 민족의 평화통일,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 기도하는 교회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민족성이 무슨 사쿠라인 양, 월드컵 응원이나, 촛불시위처럼 단시간 확 타오르고 마는 모습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하나됨의 은혜를 입도록 인내를 갖고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교회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공동체의 하나됨의 기적은 주님의 교회 안에서 제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교회가 하나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가 분열되었을 때에는 온갖 소란함과 더러움이 진동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성경 안에서 하나되지 못한, 분열되어서 시끄러운 교회의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마음이 나누이면 뭐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관계된 모든 일에서 티격태격 내지는 삐걱삐걱 소리가 납니다.

이 고린도교회의 하나됨을 회복하기 위하여, 교회가 똑바로 서도록, 사도 바울은 12장, 이 대목에서 직접적으로 하나됨을 촉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원리에 비추어서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나됨을 이루며, 유지하며 지켜갈 것인지를 깨우쳐 줍니다.

고린도교회의 하나됨을 촉구하며 깨우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 속에서,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하나됨을 이루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경험할 것인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인정하지 않겠지만, 해방 이후, 6.25전쟁, 5.16군사혁명 등이 있기 직전에 한국교회가 크게 분열되었던 역사를 그리스도인들은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모습이 교회가 속한 사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교회의 하나됨이 이렇게 중요한데, 그러나 우리의 작은 교회,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닌 작은 교회에서도 온전한 하나됨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이 작은 교회 안에서도 하나됨을 이루지 못하면서 어떻게 한국교회의 개혁, 민족의 통일의 꿈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작지만, 하나된 우리의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개혁과 일치 나아가 민족의 평화통일의 꿈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더욱 힘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하나되기 위하여 과연 무엇이 중요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첫째는, 교회는, 교회 가족이라는 기초가 분명해야 합니다<13절>. 사도 바울이 그냥 쉽게 넘어가듯이 하는 말씀 같지만, <13절>은 사실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제일 중요한 초석입니다.

“우리는 유대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13절> 어떤 종족, 어떤 출신의 사람이든지, 교회의 가족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한 성령을 마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 성령을 마시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성령침례는 특별한 신비체험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음으로써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다 성령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침례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긴 믿는데 성령을 안받아서 나이롱신자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을 쉽게, 적당히 생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실은 거듭나지 않았는데, 사실은 회개와 믿음이 명확하지 않은데, 예배당 다닌 경력으로서 자신도 거듭났겠거니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듯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거듭나서 성령께서 계시해 주시고 보여주시는 것에 따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됨을 이룬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소욕, 열망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고, 인간의 소욕은 자신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다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중심의 열망이 다른 데, 어떻게 하나됨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주일에 예배당에 오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고자 열망하는 사람과 세속적 복을 받기에 연연해서 예배당에 오는 사람하고 어떻게 하나됨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하나됨, 다양성을 논하기 앞서서 교회의 각 사람은 나는 정말로 거듭난 사람인가, 정말로 성령의 침례를 받았는가 그 절대적 기초를 확인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역사를 경험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같지는 않습니다. 사람 쪽수가 많아서 분위기 잡히고 하면, 일이 잘 된 것같고 성령이 역사한 것처럼 느끼는 것은, 껍데기에 연연하는 인간적 생각합니다.

교회의 연합과 능력은 우선적으로 과연 교회 가족들 각 사람이 정말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데 인생을 드린 사람들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교인 각 사람이 중심의 마음에서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것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듯이, 우리 개인의 인생에서도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운명에서도 관건은 과연 이것들보다도, 나의 명예, 나의 소유, 나의 인기 이런 것들보다도 과연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모여서 각 사람의 연민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주는 마술단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각 사람의 욕망을 절묘하게 다 채워주는 마술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아니 당신 개인의 운명을 위하여 나는 정말로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인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가 이 기초는 분명히 하십시오. 당신 마음 중심의 열망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마땅히 교회는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뭐 교회가 사람을 차별하냐 라는 불평과 비판의 소리가 사랑으로 들리려고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생명의 진리를 희석하지 않습니다. 교회 가족 각 사람이 분명하게 거듭남, 성령 침례를 받는 것은 교회의 하나됨을 절대적인 기초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둘째로 기억해야 될 원리는 이것입니다. 서로에게 평등을 주장하지 말고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많은 양으로 논증하는 것은 ‘교회인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교회를 몸이라고 강조할 때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공동체의식을 가지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는 서로서로 다른 존재들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12절>

몸 안에는 서로 다른 모양, 다른 기능을 하는 여러 조직과 기관이 있듯이, 하나님의 가족, 교회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질도 다르고 재주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같은 것이라고는 예수님께 드려진 사람들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18절> “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대로, 우리 몸에다가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무엇을 말하여 줍니까? 사실은요, 하나님이 교회에도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이게 하셨습니다. 나하고 코드가 맞는 사람만 모이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말로 코드가 안맞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종종 많은 지역교회들에서,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많이 하나됨을 강조하고 중요시 여기면서도 왜 하나되지 못합니까? 그 주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서로에게 똑같음을 기대하거나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발이 말하기를 “왜 나는 손이 아닌거야, 나도 손처럼 하고 싶다, 앞으로 악수하지 말고 악족을 해라, 그러기 전에는 발바닥닦기를 거부하고 냄새나게 하겠다” 피켓들고 시위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또 귀가 나서서 “왜 나는 눈이 아닌거야 귀에게도 볼 수 있는 권리를 달라” 할 때, 분열과 다툼은 시작됩니다.

자녀들을 둘 이상 키워보신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느 때에 삐지고 싸우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왜 언니만 이뻐하고 나는 안 이뻐하는거야?”, “왜 누구 생일에는 선물을 주면서 내 생일에는 선물을 안 주는 거야?” “왜 맨날 형한테 주는 과자가 더 큰 거야?” 이러면서 삐지고 싸우고 하지요?

요는 평등을 요구하면 할수록 사실 연합은 어렵습니다. 서로 다름을 용납해야 하나됨을 이루어갈 수 있으며 그리고 당신의 마음도 평안합니다. 하나님이 다르게 하셨는데, 그걸 내 의지로 기어코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고야 말겠다 하면 인생이 쓸데없이 힘듭니다.

우리 민족도 서로서로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과제는 서로 다른 생각을 너죽고 나죽자 식으로 극단적 대결구도로 몰아가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가서 반향적 역동성(controversal momentum)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용납해야 오히려 연합을 이룬다고? 그래? 그러면 너는 니 맘대로 행해라, 나는 내 맘대로 할게. 그러면 싸우지도 않고 편하고 좋지? 다 자기 일들 자기가 알아서 할 것이니까 괜히 서로 간섭해서 싸우지 말고 알아서들 잘해~ ”하면, 어때요?

뭔가 아쉽지요? 이러면 조용하긴 하지만 신바람이 나지 않습니다. 외롭습니다. 영낙없는 공동묘지같을 것입니다. 죽어있는 시체들이 두터운 봉분을 뒤집어쓰고 이만큼씩 거리를 두고 서로 떨어져서 꼼짝도 안하고 있는 모습, 썰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영낙없는 공동묘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힘주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사실이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각자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다!” 이것을 강조합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12절>

하나라는 의식이 있으면, 제일 먼저 뭐가 나타납니까? 제일 먼저는 “나 몰라라~”하지 않습니다. 가족인가 아닌가 어느 때 차이가 납니까? 동네에서 애가 맞고 왔습니다. 그러자 이웃사람들은 아프겠다, 약 발라라 예의상 인사 한 마디만 하지요? 그런데 가족은요? “누가 우리 아들 때렸어? 어떤 놈야?” 하고 달려들지요?

칼릴 지브란의 유명한 책, 『예언자』에 보면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하나의 이파리도 온 나무의 동의가 없으면 갈색으로 변하지 않는다.” 나뭇잎파리 하나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25절>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서로 같이 걱정하십니까? 관심을 갖고 생각해 주십니까?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이 있으면 절대로 서로에게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라고 하지요? 아무리 나와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이 있으면, 관심을 기울이며 사랑합니다.

<26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 이게 공동체 의식입니다.  각 사람이 서로서로 다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한몸이다 이 모순되어 보이는 공동체의식을 새기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의식을 발전키시고 아름답게 키워가서 그 축복과 기쁨을 누리는 열쇠는, 서로에게 똑같음, 평등을 요구하지 말고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며 서로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보다 구체적인 세 번째 원리는, 교회 안의 질서를 존중하십시오<28-30절>. 

교회 안에 몇몇 일꾼을 언급하면서, 첫째 사도, 둘째 예언자, 셋째 교사 이렇게 세 직분에 대하여 서수로 나열하고 그 다음부터는 순서를 매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열거한 기적을 행하는 사람,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순서적 개념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 원문에 의하면, <28절> 하반부의 직분은 사람이 아니라 일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기적을 행하는 일, 병 고치는 은사, 남을 도와주는 일, 방언 이러한 은사들은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권위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예언자, 교사에게는 하나, 둘, 셋이 아니고 첫째, 둘째, 셋째 순서가 매겨져 있습니다. 사도, 예언자, 교사가 교회 안의 권위의 순서임을 가리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예언자, 교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특히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말합니까?

사도는,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들과 예수님을 직접 체험한 사도 바울에 국한되게 해석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에 사도라 지칭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초대교회들에게서 사도들이 감당했던 주요 역할, 교회의 권위있는 치리자로서의 역할은  어느 시대 교회에나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즉 교회 공동체 안에 권위있는 치리자로서 영적 리더쉽의 권위는 존중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 영적 리더쉽의 궈위가 흔들리면, 교회 연합은 꿈도 못꿉니다. 서로 갈등하고 있는 리더쉽이 있는 교회, 리더쉽의 권위가 흔들리는 교회는 반드시 싸우고 분열합니다. 그럴 경우, 현실적으로 제일 좋은 방법은 안싸우고 서로 갈라서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이상적인 방법은 야당이 회개하는 것이지요?

예) 하용조 목사님 -

교회가 하나됨을 이루려면, 사도적 직분, 지도자의 권위가 존중되는 아름다운 질서가 세워져야 합니다.

예언자는, 시대를 해석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언자는 점쟁이가 아니고 설교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고 선포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예방주사 놓으면, 하나님은, 뭐로 포장을 했든지, 점을 치거나 얼빠진  상태에서 튀어나오는 비합리적인 주술들, 샤마니즘적 주술행위를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이런 것은 흉내도 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교사는, 복음의 진리를 깨우치는 사람,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의 구체적 가르침을 주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이기에, 영적 지도자로서의 권위,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예언자 그리고 구체적 지침을 가르치는 교사 이 셋이 중요합니다. 이 셋은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이며 질서입니다.

<고전12-14장>까지 사도 바울이 은사에 대한 지침, 다양한 은사가 있지만 하나됨을 지켜야 한다라는 가르침인데 이를 어떻게 결론을 짓습니까? <고전14장> 맨 마지막 절, <14절>을 보시면, 은사에 대한 논쟁을 이 가르침으로 매듭짓습니다. “모든 것을 적절하게 하고 질서있게 해야 합니다.”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됨의 능력과 기쁨을 경험하려면, 영적 권위와 질서를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는 무작위, 무대뽀로 움직여지는 곳이 아닙니다, 마치 내 하고 싶은대로 마구 행하는 것이 자유나 행복이 아니듯이, 교회 공동체도 각 사람의 취향에 따라 마구 행해지는 것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권위와 질서의 바탕위에서 세워집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교회가 하나됨의 축복과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 교회에는 무엇이 제일 필요한 것같습니까? 아니 교회의 아름다운 하나됨을 위하여, 그 가운데 힘있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능력의 경험을 위하여, 당신 자신에게는 무엇이 제일 필요합니까?

당신은 정말로 성령으로 거듭나셨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 드려진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당신은 공동체의식을 품고 있습니까? 서로의 다름을 용납하여 나와 똑같기를 요구하지 않고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기를, 최소한 그 꼴을 봐 주려고 애쓰며 추구하십니까?

그리고 당신은 교회의 질서를 존중하십니까?

개척하여 성장하는 교회들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대다수의 교회들이 J자 성장 곡선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지지부진했다가, 마음과 뜻을 같이하여 하나된 일단의 사람들, 팀웤이 형성되면 그 다음부터는 굉장한 상승곡선을 보입니다. 하나된 교회에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권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J자 성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쪽수 모으기에 급급했다가 상승기류를 타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을 기다가 꺼져가는 교회들은 훨씬 더 많습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가져다 주겠습니까? 아직 소수의 사람일 때, 과연 하나됨을 이루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 우리 교회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는, 오늘 우리가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정말 소중한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명확히 깨우쳐 주시며 그 정신과 비전을 선명히 보여주심은 무엇보다도 큰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의 위선(僞善)과 기복신앙의 미신(迷信) 그리고 인간중심의 세속(世俗)화를 벗고서 예수님을 정직하게 믿고 따르는 맑은 물 근원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에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됨을 이루어감이 우리의 최선의 삶, 행복한 삶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당신은 바닥을 기다가 문닫는 교회생활의 체험을 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경험하는 교회생활을 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는 교회생활을 하고 싶다면, 우리의 하나됨을 위하여, 교인들에게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신앙생활 적용(예배의식, 성경학교, 기도모임, 작은공동체)을 하는 것이 최고로 낫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가족으로서 서약하고 헌신하였다면, 즉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서약하고 헌신한 것들의 이유와 소망을 분명히 하여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 교회 교인들이 예배의식과 성경학교는 거의 100% 참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씩 빠지는 것은 넉넉히 용납해야 합니다. 현재 예배의식과 성경학교에 지속적으로,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교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모임은 현재 참여율 약 50%이며, 작은공동체는 현재 salt 팀만 모이고 있습니다. Light 팀은 교인들이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가 많지 않은 상태에서, 모임틀만 갖춘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모임을 엮어줘도 잘 안하고, 또 나랑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려고 하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삐지고... ) 그래서 제 생각이 예배의식, 성경학교에 이어서 기도모임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리고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작은공동체를 엮어갈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교회의 신앙생활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모습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 온전히 따르지도 않고 자기 취향과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을 행하고서는, 하나님이 자기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 모습이 곧 에스겔8장의 성전에 나오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우상 앞에 절하는 모습, 컴컴한 우상의 방에서 주님께서 나를 돌보시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모습과 똑같은 것입니다.

어거지로 ‘기도모임 나오라, 작은공동체 참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왜 싫어하는가 생각을 하고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내 생각이 앞서는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 따르지 못하는 마음, 기도하기 싫어하고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드리지 못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나와야 합니다.

또 정말 자신의 생활의 시간표가 빡빡해서(사실은 이런 사람은 굉장히 적습니다) 기도모임도 작은 공동체도 참여를 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이 간혹 있을 수 있습니다.

핵심은 마음입니다. 마음에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며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길 것입니다. 문제는 사실은 마음이 없는데, 바쁜 삶을 핑계대는 것이지요?

이 교회생활의 틀을 지키는 것만이 다냐? 정작 생활이 중요한 것 아니냐? 교회생활은 말하자면 통로(vehicle)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통로들을 통하여서 마음과 삶이 바르게 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통로도 부정(否定)하면서 마음과 삶이 바르게 선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파이프를 설치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수돗물이 나오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물론 매일 교회다니느라고, 교회행사 참여하느라고 자기 생활의 책임을 유기하는 광신의 부작용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강조하는 것이 그렇게 개인의 삶의 책임을 유기할만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행사를 만들고 정신없도록 참여를 독려하고 이러지 않잖아요? 우리 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정상적인 삶입니다. 즉 현대인들 대다수는 일주일 단위로 살아가는데, 반복되는 일주일의 삶을 그리스도를 따르고 배우는 삶으로 세워가는 것을 강조합니다.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신과 비전을 배우고 익히는 기본적인 통로입니다. 

이 기본적인 통로를 세우고 지키는데 우선순위를 두지 못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물이 흐르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또 꼭 우리 교회에서만 해야되냐? 기도모임은 다른 데에서 해도 되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마음도 스스로 속이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뜻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시적 필요에 따라서, 한정적으로 다른 모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공동체로서 함께 하는 교회생활을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의 독선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정직하게 드려보십시오.

정직한 가치에 우리들이 하나되어 드리는 삶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은혜와 능력을 어찌 안 베풀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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