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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보내시는 주님 (마 10: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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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12제자를 선택하십니다. 12제자를 예수님이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0: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을 고치는 것”은 예수님이 하셨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을 부르시고 예수님이 하셨던 그 일을 제자들에게도 하라고 권능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9:35)에서는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는 일” 그것은 예수님이 하셨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하셨던 그 일을 이제는 제자들과 함께, 제자들을 통해서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자란 무엇인가? 진정한 제자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제자란 스승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자훈련을 받고 있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얼마나 많이 배우고 있습니까? 그러나 내가 그분을 통해서 배우고만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제자가 아닙니다.

  또한 제자란 스승을 통해서 본받는 사람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들의 스승이 예수님이기에 그것은 더욱 불가능합니다. 인간 역사를 장식한 유일하게 무흠하신 그 분을 본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일 뿐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특유한 부르심은 “나를 본받으라”가 아니고 언제나 “나를 따르라”였습니다. 제자들을 만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던 소명(Calling)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제자는 스승을 닮는 자가 아니라 그 분을 따르는 자입니다.

  제자도의 본질은 변화를 낳는 그 분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도에는 성장, 양육, 교육, 깊어지는 친밀함, 공동의 목표와 인생의 방향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 분과의 관계에 담긴 여러 단면들을 설명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윤리는 우리들에게 온전한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관계(맺음)가 없이는 예수님의 명령도, 온전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가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예수님의 모든 명령은 불가능한 짐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포사이스(P. T. Forsyth)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해방자 아니면 최고의 짐이다.”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없이 살아가는 제자에게 예수님의 모든 명령과 요구는 짐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위탁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맨 첫 번째의 위탁의 말씀은 (마 10“5-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첫 번째 위탁의 말씀을 요약한다면
① 먼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② 너희들은 물질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일꾼처럼 일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들의 먹을 것을 책임진다. ③ 어떤 집에 들어갈 때 그 집에 평안을 빌어주라.

  이런 위탁의 말씀을 하셨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보내야 할 세상이 어떤 곳인지 이미 주님은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탄의 시험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이 불신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어서 아무리 선포하고, 아무리 기적을 일으켜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좋은 의도와 동기를 가지고 해도 삐딱하게 흘기는 눈으로 바라보는 송곳같은 비판자들의 눈이 있다는 것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두 번째 위탁의 말씀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16절) “양과 같은 너희들을 너희들의 천적 이리가 득실거리는 저 세상으로 보내는 것처럼 내 마음이 아프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안타깝고 아픈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몇 해 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신대원을 다니면서 첫 애기를 낳고 저는 남양주 마석에서 살았습니다. 장신대에서 가깝고 싼 집을 구한다고 들어간 곳이 거기였습니다. 교육 전도사 시절 저의 사역지는 사당동에 있었는데 집에서 교회까지 가려면 걷고, 버스타고, 전절타고, 마을버스 타고 해서 1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그 때 저의 사례비는 55만원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 세 식구가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걸로 어떻게 살지 막막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살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제게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세를 준 집주인은 건축업자였는데 부도를 내게 되었고, 저는 전세자금 2천 만 원이라도 건지려고 그 집을 지을 때 대출받은 은행 빚을 떠 앉고 그 집을 샀습니다. 은행 빚 2500만원. 55만원 가지고 살아가는 신학생에게 그 빚은 너무나 컸습니다. IMF가 되자 은행이자로만 30만을 갚아야 했고 남은 돈 25만원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집사람이 일을 하기로 했지요. 예은이는 어린이집에 맡기기로 하구요.

  그런데 내일부터 직장에 나가기로 한 그 날 밤에 잠을 자는데 제 아내는 아기를 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예은이가 어려서부터 아토피가 심했는데, 그 애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집사람이 누군가에게 아기를 맡기고 처음으로 아기와 떨어져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날 밤 내내 아내는 아기를 안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3일을 그렇게 울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이 지난 다음 제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울었느냐?”
아내의 말은 “저 어린 것에게 살아가야 할 세상이 얼마나 힘들까? 한참 응석 부릴 나이에 엄마 아빠도 없는 곳에서, 가렵다고 하면 누가 긁어주기를 할까? 도와주기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저는 조금이나마 그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양과 같이 연약한 우리들을 이리와 같은 세상 속에 보내는 것일까요? 이리가 양을 잡아먹을 줄을 알면서도 왜 주님은 양을 세상에 보내는 것일까요? 그렇게 염려되고 걱정되면 안 보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과 같이 연약한 우리들을 왜 세상에 보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양인 우리들을 주님이 덜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이리가 있고, 무서움이 있고, 박해가 있고, 미움이 있고, 시험이 있는 세상에 우리를 보내는 것은 주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양처럼 약하디 약한 우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은 우리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리와 같은 사탄에게 노략질을 당하고, 상처입고, 이리 저리 흩어지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헤매는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양처럼 약한 나를 왜 하나님은 선택하셨을까요? 내 믿음하나도 제대로 지키기 힘든 나에게 세상을 구하라고,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구하라고 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이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습니까? 내가 아무리 연약해도, 내가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없다고 해도 주님이 나를 보내신다면 순종하십시오. 당신보다 더 연약한 한 마리의 양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아무리 연약해도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험한 세상 속으로 우리를 보내시면서 우리의 손에 두 가지를 들려주십니다.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입니다.(16절) 이것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손에 들려 있는 무기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무식하거나 어리석게 세상을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뱀같이 지혜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뱀과 같은 간교한 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또한 비둘기 같은 순결을 원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악하다고 너희도 악해지지 말고, 이 세상이 더럽다고 너희도 그것에 물들지 말고 비둘기와 같은 순결을 요구하셨습니다. 부패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참된 지혜는 비둘기 같은 순결입니다. 맞지 않는 말 같지만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고 말씀합니다.(17-18절) 공회에 넘겨지는 것, 채찍질당하는 것,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은 한 가지를 원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증거되는 것,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함께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세상과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각자의 본질에 충실하다면 세상과 우리들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인터넷에 기독교에 관한 기사가 올라오면 댓글 전쟁이 일어납니다. 안티 기독교에 관한 글들입니다. 댓글의 상당수가 기독교에 대해 비판함으로 베스트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거기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부터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며 우리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세상과 갈등 한 번 일으키지 않고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마 10:34)에서 주님이 오신 목적이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그럴까 저는 묵상해 보았습니다. 화평이 올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진정한 싸움 후에 권위가 세워졌을 때 화평이 옵니다. 진정한 힘과 권세 앞에 모두가 꼼짝 못합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는 아무런 싸움도 하지 않고 숨죽이고 있을 때도 평화의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 가운데 있는 이 화평은 후자에 가까운 평화입니다. 그것은 화평을 가장한 숨죽임입니다. 진실을 가장한 거짓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검을 주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검을 주러 오셨습니다. 검은 모든 싸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 검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승리를 하게 되고 진정한 평화가 올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하지 않는 평안은 거짓 평안입니다. 내게 거짓과 불의와 나약함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검을 소유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화평이 아닌 거짓 평화를 갈구하는 것이요 위장된 평화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런 싸움도 하지 않고 위장된 평화 속에서 세상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적전쟁을 통해서 진정한 싸움을 하고 그 후에 내 삶 속에 하나님의 권위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뒤따르는 화평을 맛보며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부르셨을까요?
디트리히 본 회퍼는 여기에 대해서『나를 따르라』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을 부르실 때 와서 죽으라고 부르신다. 집과 일을 버리고 그 분을 따라야 했던 제자들과 같은 죽음일 수도 있고,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들어가야 했던 루터와 같은 죽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매번 같은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 분의 부르심에 따른 옛사람의 죽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토마스 아 켐피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님께는 하늘나라를 사랑하는 자는 많았으나 십자가를 지는 자는 적었다. 위안을 바라는 자는 많았으나 환난을 바라는 자는 적었다. 식탁의 동지는 많았으나 금욕의 동지는 적었다.
  모두가 그 분 안에서 기쁨을 원할 뿐 그 분을 위해 조금이라고 고통을 당하려는 자가 적다. 떡을 떼는 자리까지는 예수를 따르는 자가 많아도 그 분의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리까지 따르는 자는 적다. 그 분의 기적을 숭배하는 자는 많으나 십자가의 견책을 따르는 자는 적다.

  예수님은 12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약속을 해 주셨는데 바로 성령의 약속이었습니다.(19-20절) 제자는 보내는 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야 할 자들이기에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이었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견디고 박해를 받아야 했지만 그들 안에는 그것을 이길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공회에 넘겨지고 사람들 앞에 서야 할 때 그들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우리 안에 충만케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성령은 말해야 할 때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며, 고난을 만났을 때 이길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사명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본성에 너무나 반하는 일임을 주님은 아시기에 자신의 사랑과 능력, 자신의 영, 성령을 부어주셔서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연약한 양과 같은 우리를 이리 같은 세상에 보내시는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러나 우는 사자와 같은 사탄에 쫓겨 이리저리 흩어지고 방황하며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보다 더 약한 양들이 있기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그들에게 보내십니다. 우리가 그 세상을 향해 갈 때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은 지혜와 순결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십자가와 박해와 죽음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주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내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좋은 생각>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길이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습니다. 눈이 오고 바람 불고 날이 어두워도 갈 수 있습니다. 바람 부는 들판도 지날 수 있고, 위험한 강도 건널 수 있으며, 높은 산도 넘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수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손 내밀어 건져 주고, 몸으로 막아 주고, 마음으로 사랑하면 나의 갈 길 끝까지 잘 갈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야 하며 단 한사람에게라도 나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 누군가와 손잡고 걸어갑시다.
혼자서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이 험난한 인생길 당신은 누군가의 손을 잡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내 곁에 계시는데, 성령님은 내 안에 계시는데 여러분은 누구의 손을 잡겠습니까?
(이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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