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욥 38:1~3)

  • 잡초 잡초
  • 687
  • 0

첨부 1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기 38:2~3)

  지난주간 북한은 7발의 무더기 미사일을 미국과 일본을 향하듯 동해를 향하여 발사했습니다. 이 미사일 발사에 대하여 미국과 일본은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작 안보에 예민해야 할 우리는 오히려 남의일 보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 사태를 맞이해서 우리 정부가 해온 대북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미사일 발사 직후의 우리정부의 대응의 과정에 대하여 비난이 일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3호 태풍 ‘에위니아’가 북상중이라 그 피해가 어떨지 도 다른 염려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폭풍 속에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건과 고난의 연속성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우리들을 보면서 욥을 생각해 보았고, 욥을 만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베풀며 순전하고 정직하게 산 동방의 의인입니다. 그에게 재앙의 폭풍이 찾아왔습니다. 욥은, 모든 가축과 종들이 스바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에게 탈취 당하거나 천재로 죽어, 빈 털털이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태풍에 집이 무너져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더욱 가혹한 것은 욥의 발바닥으로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긁어야만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욥을 보고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고 저주했습니다.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욥에게 재앙이 임함을 듣고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모든 고난은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 보았습니다. 과거의 죄 때문에 주어진 결과가 현실의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재앙을 겪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을 지켜보던 엘리후가 욥에게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욥이 고통이 욥의 죄라고 정죄하기보다는, 욥이 고난을 당하여 그 고통의 과정에서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러한 과정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욥에게 겸손하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욥에게 위로나 도움이 되지 못하고 더 큰 아픔을 안겨줄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재앙의 원인에 대한 분석과 욥의 태도에 대한 책망은 이론상으로는 옳고 타당한 것이나, 실제적으로 욥 자신에게는 합당한 것이 되지 못하고 욥을 도와주고 붙들어 주는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욥에게 더 큰 아픔을 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욥은 모든 재산과 자식을 잃고도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갈찌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 찌니이다” 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일을 저주할 정도로 극한 고통 중에도 결코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분명히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갈등은 왜 이런 재앙이 자기에게 임했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선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자기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에게 임한 재앙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에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폭풍 가운데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직접 뵙고 그 분의 말씀 안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했던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 했습니다. 
  우리는 폭풍우 가운데서 욥을 만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것은 폭풍과 같은 사건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고 하십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그의 지식과 지혜와 판단력으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함부로 속단하고 평가하는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이치를 가리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들 주위에 많은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어둡게 하는 것을 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주장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이치를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욥에게 임한 폭풍 같은 재앙에 대한 세 친구의 “죄의 결과는 심판이다”라는 것은 분명하고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자신들의 주장과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 규격화된 진리로 사용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이치를 어둡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자기이해와 자기생각으로 하나님의 이치를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때로는 옳은 것이라고 고집부리며 주장했던 나의 의견이 하나님 앞에서 무지한 것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이치를 어둡게 하는 것이 될 때가 있습니다. 

  폭풍과 같은 사건에 대해서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이치를 어둡게 하고 잘못 속단하는 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함부로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이치를 어둡게 하는 말을 멈추는데서 폭풍의 사건들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으라”고 하십니다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자세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솔직하고 분명하게 마주서라는 것입니다.
  심각하고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 그렇고 그렇지’, ‘지겹게 또 이런 일이 생겼어’, ‘될 때로 되라지’, 가볍게 판단하고 행동하지 말고 진지하게 하나님께 다가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사1:18)
하나님은 우리 죄악이 아무리 붉을지라도 그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다루어보자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경박함이 우리를 얼마나 어리석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인생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를 잊고 진지하게 살지 못하는데서 잃어버리고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진지하고 신중한 삶을 사셨습니다. 33년의 짧은 인생일지라도 주님의 삶의 내용은 헛됨이 없습니다. 주님의 삶은 우리 모두를 위해 절대적으로 유익하고 필요한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가가는 우리의 모습은 진지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자 하는 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바른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질문에 답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진실 된 신앙은 묻는 것보다 하나님의 질문을 듣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질문과 요구는 많이 하면서도 하나님의 질문을 듣지 못하고 대답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말은 많이 하지만 하나님의 질문을 듣는데 둔감하고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보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들은 여인을 돌로 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공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아니하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셨습니다. 돌로 치려는 자들은 조용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무지한 말로 이치로 가리는 자들의 말을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조용히 일어나셔서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예수님은 ‘돌로 칠까요?’ 묻는 무리들에게 질문하심으로 대답하게 하셨습니다. 이 질문을 듣고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무지한 말로 떠들던 무리들은 예수님의 질문을 듣게 되자 자신들에게 있는 무서운 간계와 위선과 거짓된 의와 경건을 보았습니다. 돌로 칠 수 없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보고, “죽일 놈, 못된 놈, 나쁜 놈...”이라고 하기 전에 나는 죽일 놈이 아닌가, 못된 놈이 아닌가, 나쁜 놈이 아니가 질문하며 대답해야 합니다. 그곳에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 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을 듣자 자신의 문제가 무엇임을 깨달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재앙은 욥을 하나님의 더 깊고 높고 넓고 큰 세계로 불러 주시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재앙 중에 더 큰 하나님 지식을 경험한 것입니다. 욥의 재앙은 하나님께서 욥을 더욱 크게 인정하기 위함이요, 욥의 믿음을 의심하는 사단에게 욥의 믿음을 보여주고 영광을 받기 위하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폭풍과 같은 재앙은 욥과 하나님의 더 크고 새로운 차원의 만남이요, 인간이 임의로 판단하고 측량할 수 없는 그 분의 뜻의 세계를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가운데서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이치를 가리는 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을 만난 후에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5)고 회개했습니다.

  우리의 고난의 폭풍과 같은 사건들은 하나님을 직면하는 하나님의 질문의 역사로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질문을 듣는 경험은 우리 인간에게 인간의 모든 이론과 이해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것인가를 바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인간을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는 적고 큰 고통의 사건들은 그 속에서 다가오셔서 질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사건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지 마십시다. 허리를 동이시는 영적 믿음의 자세를 가지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묻는 말에 대답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다. 그럼으로 폭풍 속에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성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