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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 22:3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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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늘 하신 말씀은 전도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그 끝에 전도에 대한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가복음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요한복음 20: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왜 보냈습니까?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 그것은 또한 제자들을 보내시는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49에,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섣불리 전도하러 나가지 말라.”는 겁니다. “위로부터 성령으로 입혀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리고 전도하러 나갔습니다.

훌륭한 군인들은 정신교육을 통해 정신무장을 합니다. 뛰고 구르고 하면서 육체를 단련시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각종 장비들로 무장합니다. 어느 하나 없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 그리스도인들도 무장을 해야 합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한 영혼을 놓고 악마와 하나님의 영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 싸움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들을 당신의 군사로 뽑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군사는 하나님의 군사로서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쉽다.”라는 책을 쓴 이유빈씨. 왜 전도가 쉬우냐? ‘전도는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기 때문에 쉽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과실을 맺음과 같이 우리도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열매를 저절로 맺는다.’
늘 그리스도인들의 착각 또는 오해란 이런 것입니다.
주일. 주방에서 식사 준비는 누가 해요? 주님의 일이니까 주님께서? 아닙니다. 사람이 합니다. 그럼 주방 일을 사람일이냐? 아닙니다. 일하기는 사람이 하지만, 일하라 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음식은 누가 먹어요? 예수님께서? 아닙니다. 사람이 먹습니다. 그럼, 사람이 먹자고 한 거냐?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주님을 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위한 일이요,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찬양대, 교회학교 교사 등 교회의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일은 사람이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은 사람의 일이지만, 그것은 곧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하도록 위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 “쉽지요.” “그냥 예수님 믿고 있으면 저절로 된다고 믿으니까 쉽지요.” “저절로.” 전도하게 되면 하는 거고, 못 하게 되는 거면 마는 거고. 그러니 얼마나 쉬워요?
전도는 주님의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바로 우리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마 28:19)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막 16:15) “너희는”이라고 하셨습니다.
전도하는 것. 누구의 일? 주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누가 해야 해요? 바로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어도 전도가 되던가요? “나 예수 믿는다.” 그러고만 있어도 저절로 전도가 되어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17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하는데 누가?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보고 복음을 전하라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 성령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령을 단순히 어떤 능력으로만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성령은 곧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순간이 아닙니다. 언제나이며, 그것은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은 머리만, 가슴만이 아닙니다. 삶 전체가 무장 되어야 합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임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특히 복음 전하는 자로서의 중요한 무장이 뭘까?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본이 오늘 읽은 본문(37-40)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곧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는 사랑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 소망은 이 세상에서 그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5:23-24,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웃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예물 곧 그 예배를 받아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5:22에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에게 노하고, 원망 받을 일을 하고……. 그렇게 하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랑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하나의 에티켓으로 생각합니다. 하루에 한 번 착한 일 하면 극락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행을 많이 하면, 사랑이라는 티켓이 주어지고, 그것 가지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사랑은 손에 든 티켓이 아닙니다. 사랑은 곧 내 몸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이 곧 사랑이어야 합니다.
특히 전도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성서 안에서 누가 복음을 가장 잘 전했는가? 당연히 바울입니다. 그는 생명 내걸고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이방인들에게. 그리고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무엇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생명 내걸고, 미치도록 복음을 전하게 했을까? 병 고치는 게 신나서? 사람들이 자기를 신으로 모시듯 떠받드니까?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복음 전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당신 안에서 다시 살리시고자, 당신 안에서 새 것 곧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려고, 당신 스스로 죽으신 그 사랑. 이 사랑을 생각하면 주님의 일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 그는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한 자입니다. 스테반을 돌로 쳐 죽일 때 그것을 당연하다 생각하고 그 옷을 받아 들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가 주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그것은 만일 예수 믿는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박론하고 결박하여 잡아오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든 사울. 의기양양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중,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빛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땅에 엎드리어 바울이 묻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예수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때 사울의 머릿속은 어땠을까? “죽었구나.” “저들이 믿는 예수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구나. 그런데 그를 믿는 사람들을 내가 잡아가두고 죽였으니……. 난 죽었구나.” 그리 생각했을 겁니다. 더욱이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에 감복한 바울. 그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런 사랑이 없이 복음을 전한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왜 이런 고생해야 하나?’ 싶었을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가 매 몇 대 맞고 나면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는, 교회의 프로그램 또는 목회자가 하도 강조하니까, 또 교회 임원이라는 체면이나 의무감 때문에 전도하다보니, 불신자에게 인격적인 모욕과 냉대를 받으면 즉각 실망하고 중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날 사랑하신다는 감격으로 전도한다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능히 참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복음 전하다 사람들이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셔서 또 외쳤습니다. 그래서 또 잡혀가 채찍으로 맞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게 하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40-41절) “그들이 옳게 여겨(가말리엘의 말에 대해)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오히려 예수님 이름 때문에 매 맞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이제 진짜로 예수님의 사랑 받은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예수님이 잡히실 때 다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그래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도들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 교회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께서 날 사랑하신다는 믿음과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돈이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배운 것이 많고 적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날 사랑하셨다.” “나도 주님을 사랑한다.” 바로 이 사랑을 불신자에게 전하여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실 때 이웃은 믿든 안 믿든 모두가 내 이웃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증거는 “당신은 죄인입니다.”에서 시작하기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말처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도 당신을 좋아하고 도와주고 싶다.” 그래서 전도하는 사람의 사랑의 감정이 전달되면 불신자는 비로소 복음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내가 이웃에게 떡을 주면, 그 집도 우리에게 떡을 줍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먼저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불신자를 전도해야 할 대상자를 먼저 좋아하고 먼저 사랑하여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 풍부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참된 대화는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서 마음속에 늘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고, 또 사랑 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우정을 나누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준다면, 이에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문턱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함에 있어서는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즉, 사랑이란 마음속에만 갖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믿음은 들을 때에 난다고 하였습니다. 듣는 다는 것은? 누군가 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란 물론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만.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 엄청난 일을 하는 것 아닙니다. 거창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 아닙니다. 생활 속에 작은 배려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엘리베이터 탈 때 나중에 타는 사람의 층수를 묻고 대신 눌러 주고, 맛있는 음식을 이웃집에 돌리고, 길을 물어 볼 때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길이 긴 숟가락. 지옥은 긴 숟가락으로 자기 입에다 넣으려니까 먹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떠먹이자니 차라리 굻은 것이 낫겠다는 생각들입니다. 천국은 긴 숟가락으로 서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 떠먹이고, 모두가 다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베풀 때 자신에게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엄청난 수고나 행위를 요구하는 것 아닙니다. 사랑은 관심이요, 인정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으면 보람을 느끼고, 의욕이 생기고, 기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아내의 반찬. 한 젓가락 먹어 보고, “아! 맛있다. 당신 음식 솜씨는 최고야.”하면, 쓸데없는 소리 말라면서도 아내는 속으로 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것이 어색합니다. 어느 집사가 교회에 뭐하면, 인정하고, 칭찬하기 보다는, “흥 그까짓 것.” 그래 버립니다. 자기는 못하면서……. 대개, 자기는 못하는 사람이 남이 뭔가 하면 “흥”소리 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다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을 하면 율법을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면 영혼을 구원할 수 있고, 사랑하는 나에게는 엔돌핀이 넘쳐나서 기쁘고 신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십시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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