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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의 파도를 소망하라 (합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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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을 소망하자

  얼마전 호주 교회를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 한때 큰 교회의 예배당이 술집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술집 경영자들은 얼마나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을 조롱하고 싶었던지 예배당 의자만 치운채 약간의 데코레이션을 해서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강대상이 있던 자리는 제일 비싼 자리라고 합니다. 성가대가 앉던 자리는 그 다음 비싼 자리이고 강단에서 멀어질수록 싼 자리라고 합니다.

  최근 한국에서도 “다빈치코드”니 “유다복음”이니 하면서 기독교복음에 상처를 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갈수록 교회에 대한 세상의 도전은 거세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새롭게 제 자신에게 물어보는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 인간은 과연 변화될 수 있는가?
- 한국교회는 다시 부흥을 소망할 수 있는가?
- 대한민국 - 한민족은 과연 소망이 있는가?

  전 법무부 장관 김성규 장로님의 특별한 관심으로 교도소 안에서 불신자 전도 프로그램인 알파코스를 저희 교회가 섬겼습니다. 막상 알파코스를 시작했지만 게스트들이 쉽게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힘이 들었습니다. 교도소 직원들조차도 그들이 변화되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정성스럽게 간식을 준비하여 열심히 섬겼습니다. 알파코스는 웃고 울어야 마음 문이 열리는데 이들은 웃음과 눈물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그맨의 공연을 보고도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우미들이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성령수양회를 통해 그들의 마음문이 열리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펼쳐진 성령수양회. 30여명의 게스트들 가운데 12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유아세례교인이 3명이나 있어 입교문답을 했습니다. 그 날 세례 받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까지 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죄를 짓고 그곳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시간인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가?” 토크 시간에 그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박장대소가 터졌습니다. 토크 중에 손뼉을 치며 환호를 했습니다. 성령사역 시간엔 치유와 이적,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사역 시간에는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도 울음을 참던 사람들이 동시에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의 역사, 방언 기도,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역을 마치는 시간 간증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자신을 ‘걸어다니는 흉기’라고 고백하던 사람, 그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입소한 형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지은 것인지를 깨닫고 가슴을 뜯으며 간증을 했습니다.

  여러 번의 간통, 강간으로 이혼을 당하고 들어온 형제가 다시는 재범이 없을 것이라고 결단하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없어 죄짓고 이곳에 오는 것이 차라리 좋았다는 젊은이가 예수님 만난 감격을 간증하는 모습들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하얀 연기와 함께 악령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좋아하는 형제도 있었습니다.

  교도소 안은 가히 감격의 도가니였습니다. 한 사람이 변해도 큰 화제가 되곤 하는 그곳에서 성령님이 임재하시자 동시 다발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은 변화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교회는 새로워집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나라와 민족이 달라집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한국교회는 지금 부흥을 소망해야 할 때 입니다.

  대한민국은 예수 안에서 큰 나라입니다. 한국교회가 살아야 세계를 살릴 수 있습니다.

  애국가 유머 - 지금은 한국교회가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

  한국교회는 20년전까지 세계교회가 부러워하고 놀랄만큼 부흥하던 교회,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세계교회가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한국교회만은 급성장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교회가 내적으로는 갈등을 겪고 사회적으로는 비난과 지탄을 받기 시작하더니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이나 적의 침공을 받는 진주만을 연상하게 합니다. 한국교회는 가장 빨리 성장하여 가장 빨리 침체를 경험한 교회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무려 20년 가까이 일어설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 부흥의 파도를 소망해야 할 때입니다.

  어느날 차를 몰고 가다 입에 익은 한 노래가 나오는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 하소서 이땅 고쳐주소서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집회 때마다 부흥을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들 입에서 먼저 불려지던 노래가 어린이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간절한 염원이 되어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부흥 제2탄이  한국 교회를 강타하기까지 했습니다.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

  때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 부흥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박국(문제를 끌어안는 자)

  공동체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삶의 상황이 기울어져 갈때 여러분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 문제로부터 도피하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 아예 포기하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서는 아니되는 태도입니다. 대단히 나쁜, 아주 위험한 태도입니다. 전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오히려 문제 상황을 악화시키는 길이 됩니다.

  하박국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먼저 하박국이란 이름이 가진 뜻이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의미는 영어로 임브레이스(embrace) 즉 “포옹한다, 껴안는다”는 뜻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어려움이 있을 때 낙심하거나 도피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씨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을 때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씨름하는 사람 - 그가 하박국입니다.

  사업이나 직장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직면하고 가슴에 안고 녹여버리는 사람이 하박국입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슴에 안고 몸부림하는 사람이 하박국입니다.

  한국교회와 민족의 문제 앞에 냉소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부흥을 소망하자고 외치는 사람 - 그가 하박국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유다왕 여호야김 시대였습니다. 여호야김은 대단히 악한 왕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6:20-26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성경을 읽어주면 두루마리 성경을 칼로 잘라 불에 던져 버리며 하나님을 모욕하고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을 통해 유다를 심판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주전 605년 유다를 침공, 여호야김 왕을 쇠사슬로 결박해서 잡아갑니다. 그때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젊은 인재들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바로 이런 상황속에서 하박국은 기울어가는 민족의 운명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말고 수년내에 부흥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치유 그리고 부흥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3장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선지자는 몰락해 가는 민족의 운명 앞에 못내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이러한 진노와 심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매를 맞고 이방인의 발굽에 짓밟혀 마땅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잘도 참으셨습니다. 많이도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오나 하나님이여, 당신의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소서. 우리 백성의 선함이 있고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품이신 그 긍휼함 때문에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여, 주의 일을 이 수년내에 부흥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도피하고 낙심하는 사람들 앞에서 역사는 침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판하는 사람들 앞에서 역사는 무너지고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공동체는 부흥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부흥의 파도를 소망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오직 포옹하는 자, 끌어안는 자 ‘하박국’ 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부흥이란?

  부흥이란 말을 사전에서는 “쇠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 또는 다시 일어나게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흥이란 “다시 일어난다”는 뜻으로 침체되었던 것들이 새롭게 살아나고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의 revival이란 말도 ‘다시’라는 말과 ‘산다’는 말이 합쳐져서 ‘다시 살아나다’ ‘소생한다’ ‘활기를 되찾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말씀을 버리고 타락했다가 몰락하고 멸망해 가는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매맞고 심판 받는 사실에 아무런 의의가 없습니다. 사랑 받을 가치도 없고 잘한 것도 없고 내세울만한 공로도 없습니다. 하오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간구합니다. 내 민족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건의 기회를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당당히 살아가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날 그 기회를 주시옵소서. 이방의 조롱거리에서 벗어나 영광의 백성이 되는 그날을 주시옵소서.”

바로 이런 의미로 “부흥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수년내에 부흥하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수년내에 나타내시옵소서” 두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한 두 해가 가기 전에 역사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깜짝 놀랄만큼 짧은 시간내에 부흥을 보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며 희망의 빛을 상실한채 날로 어두워져만 가는 역사를 바라보며 하박국의 기도가 우리의 심장에서 터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구석구석 병든 채 신음하는 민족을 바라보며, 침체와 분열과 갈등으로 허덕이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세속적 가치로 병들어 있는 교우들을 보며, 생명을 잃고 죽어 가는 영혼을 보며 하박국의 기도를 쏟아내야 할 때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지금은 한국교회가 공통의 비전을 찾아 함께 부흥의 파도를 소망하자고 울며 외쳐야 할 때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우리는 가진 것 없는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많은 복을 누렸습니다. 교회도 잘 성장했고 경제와 사회도 잘 발전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만했고 방만했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존재들입니다. 많은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매맞아 마땅하다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이여, 하오나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에겐 부흥을 간구할 아무런 공로도 의로움도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들은 복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오나, 이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을 믿습니다. 수년내에 부흥하게 하소서. 2007년 부흥하게 하소서.” 할렐루야!

  100년전 1907년 일어났던 그 날의 부흥이 오늘 이 땅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Again 1907년, 부흥 2007년!

1907년의 부흥

  1907년 대부흥이 있었던 그 시대만큼 우리민족사에서 고통스러웠던 때는 없었습니다. 국권은 일본의 손에 통째로 넘어가고 황제는 폐위당했습니다. 나라를 살려보려던 애국지사들의 몸부림, 자결, 원수들 암살...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국민들은 허탈과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세계가 한국을 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이 땅을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백낙준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장차 한국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집회시간마다 목이 터져라 심장이 터져라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를 불렀습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함께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죄를 고백했고 관계가 깨진 사람을 찾아가 먼저 용서를 구했습니다.

  회개와 성령의 임재, 대부흥과 불신자를 구원하려는 열정이 예배시간, 기도시간, 찬송시간 그리고 성경공부시간마다 폭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대부흥 운동은 불이 번지듯 교회에서 교회로, 도시에서 도시로, 학교에서 학교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과 길선주 장로님, 신학생들과 제직들이 가는 곳곳마다 성령의 불이 옮겨 붙고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시작된 불이 서울로 대구로 광주로 의주로 공주로, 선천, 해주, 영변과 재령으로 개성, 강화, 재물포로, 원산, 춘천, 북청으로 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으로까지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부흥하게 하소서(참된 부흥)

  “부흥의 파도를 소망하자”고 할때 그 부흥의 파도는 어떤 파도일까요?

  1907년에 있었던 그날의 부흥이 오늘 이 땅에서 새롭게 일어나기를 기대할 때 그것은 도대체 어떤 모습의 부흥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참된 부흥은 어떤 부흥일까요?

회개: 부흥의 선행조건

  우선, 부흥의 파도는 회개의 몸부림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집니다.

  탁월한 평신도 저술가 C.S. 루이스는 “타락한 시대에서는 죄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몸부림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에서도 자신의 죄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다가 질퍽거리는 눈물을 끌어안고 몸부림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어떤 설교자들은 설교에서 “죄”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 죄악이란 말 대신 “부적응, 잘못된 습관, 행동장애” 등으로 표현하라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는 죄입니다. 죄는 다른 말로 미화시킬 수 없는 그냥 죄일 뿐입니다. 죄에 대한 해결 또한 죄를 죄로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 집니다. 암은 암이라고 인정해야 치료의 길이 있습니다. 암을 “피부 부적응” “피부 장애” 등으로 미화시켜 놓고 연고나 발라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독약이 든 병에다 “설탕이나 꿀이 아님”이라 써 붙이고 아이들 앞에 갖다 놓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한국교회가 1907년 그날의 부흥을 새롭게 보고 싶다면 -
- 교회들마다 영적 부흥을 원한다면 -
- 우리 시대가 대각성의 기회를 얻고 싶다면 -
-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길 원한다면 -
- 비틀거리고 허우적 거리던 성도들이 바른 삶을 살고 싶다면 -
- 사탄의 영향에 갇혀 행복을 모르고 불행한 삶을 살던 사람이 자유하는 신앙인으로 살고 싶다면 -
- 우리가 진정 부흥의 파도를 소망한다면 -

  우리는 모두 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정직하고도 진지한 도전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사도행전2:37-38)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어느 시대나 부흥의 선행 조건은 회개였습니다.

  1903년 원산 기도회에서 캐나다 의료 선교사 하리영(R.A. Hardie) 선교사가 자신의 무력함을 통회 자복합니다. 선교의 열매가 없는 자신의 무능을 털어놓습니다. 그는 실패의 원인으로 한국인에 대한 서양 선교사들의 우월의식과 자만심을 고백했습니다. 진심어린 한 선교사의 고백이 회개의 불을 붙였고 회개의 뒤를 따라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언제나 회개하는 심령에 성령이 임합니다. 이때부터 4년 5년 6년 - 그리고 1907년 평양 대부흥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는 회개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살인, 간음,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결한 일들, 도적과 거짓, 서로 상처를 준 일을 고백합니다. 훔친 물건을 돌려줍니다. 마을 마을을 서로 찾아다니며 회개하고 고백하느라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부정직하게 장사하여 모은 돈을 나눠주고 다녔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국인을 대상으로 부정직하게 얻은 돈의 총액을 돌려주자 중국인이 엄청난 돈 보따리를 들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신도는 청일전쟁 때에 아기를 업고 도망하다가 무거워 빨리 갈 수 없어서 아기의 머리를 나무에 부딪혀 죽이고 혼자서 달아났던 참혹한 일을 자백했습니다.

  1907년 집회에 참석한 신자들에 의해 인간으로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죄는 모두 고백되었다고 보고서는 기록합니다. 사람의 체면도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었습니다. 국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는다든지 또 비록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동일한 소원이었습니다.

  집회시간마다 머리를 바닥에 찢으며 몸부림하는 사람, 가슴이 뜨거워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을 뒹구는 사람, 공포와 두려움에 목놓아 울다 울다 지쳐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 그 누구도 구경꾼이 아니었고 비판자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울부짖는 회개자들이었습니다.

  이 회개의 용기가 일제 강점기 순교의 용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회개의 강물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일제 36년, 해방 후 공산당 앞에서 너도 나도 순교의 피바다에 첨벙 첨벙 뛰어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 시대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진실한 회개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힘쓰고 애써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엑스레이가 임하면 작은 죄가 크게 보입니다. 가벼운 죄가 무겁게 느껴집니다.
  사소한 죄가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살려 달라” 몸부림하게 됩니다. 

  부흥의 파도를 소망하라! 이 운동은 -

- 우리가 어찌할꼬 운동입니다.
- “제가 먼저 회개합니다.” 회개 운동입니다.
- “내 탓이로소이다. 나 때문입니다.” 운동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사도행전2:38)

성령의 파도

  두 번째 우리가 소망하는 부흥의 파도는 성령의 파도입니다.

  100년전 평양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폭발된 성령운동은 무디의 부흥운동으로 시작된 세계적인 성령 운동의 하나였습니다. 그 후 1903년~4년 웨일즈 지방에서 커다란 성령운동이 일어납니다. 여러 교회에서 성령의 은사, 치유와 회복, 기도와 찬양의 폭발 그리고 많은 불신자들이 교회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인도 카시아 지방의 교회들은 웨일즈의 성령운동이 인도에서도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기도합니다. 어른들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 아이들이 환상중에 지옥불을 보고 예수님께 피했다고 간증했습니다. 기도 중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전도하므로 술주정뱅이 마을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로 D.L. 무디의 부흥운동, 웨일즈 지방과 인도 카시아 지방의 성령운동의 영향으로 한국 땅에서 성령의 바람이 일기 시작합니다.

  1906년 평양과 서울에서 성령세례 갈구 기도가 열립니다. 여기서 강사로 나선 선교사님이 세계도처에서 지금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고 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누가 성령충만을 받고자 하느냐? 원하는 자는 거수하고 기립하라”고 외칠 때 당시 신학생이요 장로였던 길선주가 일어섭니다.

  바로 그 다음해 드디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와 기도회에 성령의 불이 떨어집니다. 집회때 마다 남자 성도가 1,500명 이상 모이고 여자들은 앉을 자리가 없어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습니다. 여기서 역사적인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저절로 입에서 터져나와 통성 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싱가폴 경험 - 성령을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구령의 파도

  셋째 우리가 소망하는 부흥의 파도는 영혼이 돌아오고 민족이 돌아오는 구령의 파도입니다. 당시는 침몰하는 배처럼 국운이 기울어가던 어둡고도 암울한 때였습니다. 한반도 전역을 휩쓸며 성도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폈던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 불길이 꺼지기 전에 한국 교회 안에서는 100만 구령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오직 민족 복음화만이 꺼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살릴 수 있고 백성들의 희망을 꺾지 않을 수 있다고 한국교회는 믿었습니다.

  이 무렵 새벽기도 운동, 금식기도 운동, 산기도 운동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곳 저곳 기도하고 일어선 사람들은 전도지를 들고 거리로 마을로 미친듯이 뛰어 다녔습니다. 드디어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회의에서 100만 구령운동을 선포하고 교회들마다 “금년 100만명”이란 구호를 외쳤습니다.

  한국 땅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오늘 복음을 전하고 내일 죽을 사람들처럼 몸서리치는 추위와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도에 미쳐 있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안산읍 발왈 장터에서 전도를 하다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온 몸이 부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젊은이를 위해 3일을 금식기도하며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여 온 가족을 구원합니다.

  알렌 선교사는 부흥운동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자를 기적적으로 고치는 능력사역으로 확장되고 있었다고 보고 합니다.

  대구에서 활동하던 아담스 선교사는 본국에 보낸 편지 중에서 “나는 올해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최근 나는 하루에 한 교회를 세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탁월한 한국어 실력으로 사랑을 받던 젼킨(Junkin) 선교사는 추운 겨울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이 마을 저 마을 뛰다가 급성 폐렴에 걸려 죽었습니다.

  클랙 선교사와 시릴로스 선교사는 어린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어린 아이들을 먼저 하나님 곁으로 보냅니다.

  게일 선교사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급성장하는 교회들을 돌보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의료선교사 월리엄 홀 박사를 먼저 천국에 보낸 29살 로제타 홀 사모님은 젖먹이 어린 아이와 함께 본국에 돌아가 다시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한국에 옵니다. 그리고 평양 땅에 여성병원을 세워 밤낮 미친 듯이 복음을 전합니다.

  합정동 양화진에 묻힌 이 백성을 구하고 죽어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저들의 무덤을 보십시오.

  백만인 구령운동은 어른들만의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대학교와 중학교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구령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1910년 길선주 목사가 매큔에게 보낸 편지에는 초등학생들의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얼마나 불타오르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열정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7살난 작은 아이들도 용돈을 모아 가지고 와 전도지와 복음서를 삽니다. 그들은 이것들을 거리로 가지고 나가 전도합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예수 이야기를 서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개인에게 가서 그들의 팔을 붙잡고 구주 예수를 영접하라고 간청합니다.”

  암울한 민족을 살리는 길은 정치적 힘을 키우는 것이거나 경제적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한국교회는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는 황실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알렌과 아비슨 같은 의료선교사들이 고종 황제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잦아지면서 황제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성서공회가 정성스럽게 손으로 만든 성경을 황제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황제의 마음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궁정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한국교회에 전해지자 성도들은 모두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때 일제는 1909년 7월 24일 고종 황제를 권좌에서 강제로 폐위시킵니다. 이 치욕과 민족적 울분을 달랠 수 없어 많은 젊은이들이 자결로 항거합니다.

  그 중심에 바로 교회가 있었습니다. 정동 감리교회에서 권총으로 자결한 정재봉, 대한문 앞에서 자결한 홍태순,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 침략을 지지한 미국 외교관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 안중근의 거사에 동참했던 우덕순, 이완용을 저격한 이재명 - 이들 모두가 기독교 신자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민족적 수난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국채보상운동을 앞장서 이끌어 갑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젊은이들과 민초들은 민족의 희망이 교회에 있음을 깨닫고 물밀듯이 교회로 몰려옵니다. 당시 대한 매일 신보는 “의병들이 무수히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고 보도합니다.

  단 1, 2년 만에 한국은 복음의 불모지가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선교지역으로 탈바꿈합니다. 어쩌면 비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 국가가 되는 첫나라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한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1907년 평양 부흥운동입니다. Again 1907. 그 날 이 땅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일들이 2007년 재현되기를 우리는 소망하고 있습니다.

    Again 1907년 !  한국교회여 다시 부흥의 파도를 소망하라 !

- 그 날의 회개가 우리의 심장에서 쏟아져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 그 날의 성령님이 오늘 새롭게 한국 땅에 임하시길 소망합니다.
- 그 날의 구령 열정이 되살아나기를 소망합니다.
- Again 1907. Revival 2007 - 그날의 부흥이 오늘 이 땅에 일어날길 소망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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