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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 부끄러움을 덮어 주는 곳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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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행복의 비밀 - 가정, 교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회사를 설립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학교를 세운 적도 없으시고 국가를 만든 적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든 공동체는 교회와 가정, 두 개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이고, 우리가 어떻게 가정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은 행복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행복의 비밀을 교회와 가정 안에 숨겨 둔 것입니다.

  이 교회와 가정은 그냥 만들어 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가 터져 피가 흐른 다음에야 교회가 세워졌고 아담의 옆구리가 터져 갈비뼈가 뽑혀진 다음에야 가정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교회와 가정은 그 만큼 소중하고 거기 행복을 가꾸는 일은 수고와 희생을 요한다는 말입니다.  교회 생활과 가정을 소홀히 하고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노벨상 수상자 솔제니친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된 원인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그들이 가정과 교회의 중요성을 과소평가 했기 때문이었다” 라고 단언을 했습니다.

  이 땅의 종교들 가운데 가정의 중요성을 모르는 종교들이 허다합니다.  가정을 버리고 수도하기 위해 입산함으로 시작된 종교가 있습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수도하여 무엇을 얻겠다는 겁니까?  제도적으로 성직자들의 독신을 주장하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신랑 신부가 되어보지 못하고서 신랑되신 예수님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기독교는 가정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행복의 비밀을 가정 안에 숨겨두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성령충만이라는 단어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부부간에 서로 사랑해라.  부모를 공경해라.  자식을 복음으로 잘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 혼자 기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가정 공동체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공동체의 행복이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목표가 있다고 하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교회를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를 만드는 비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해야 인생 살아가는 맛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가정을 만드심으로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종말의 날, 이 역사의 모든 마지막이 다가오는 그날 하늘에서 신부된 모든 성도들과 신랑되신 예수님이 천상에서 결혼 예식을 함으로 천국가정을 베푸시는 예식을 행하심으로 천국을 열어가게 될 것임을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사의 책임은 교인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 강단은 행복을 파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에 올 때마다 여러분 행복을 사 가지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냐?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을 이웃들에게 나누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 한가지 주제가 있었습니다.  가정 같은 교회, 성도들이 이 교회에 찾아올 때에 안방에 들어가는 편안함을 줄 수 없을 것인가?  그것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주님 전에 찾아 나올 때마다 편안한 심정, 어린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기는 평온함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 수 없을 것인가?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천장을 나지막하게 만들어서 아파트에 들어가는 분위기, 바닥을 온돌로 깔아서 옛날에 이부자리 깔아서 두 다리 쭉 뻗고 할머니 옛날 얘기 듣던 그 안방,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안에 들어갔을 때 옷을 벗어 던지고 쇼파에 편안히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그런 분위기.  창문만 하더라도 싸늘한 창문보다는 단아한 창호지 창문을 준비해서 안방에 들어간 것 같은 그런 평온함을 한번 만들어 볼 수 없을까?  그래서 이런 예배당을 지어진 것입니다.

  옛날 아버지 어머니들이 밥을 드실 때에 어떤 식탁에서 드실까?  그래서 강대상을 밥상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예배당에 찾아와서 강대상에 설 때마다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밥을 짓는 기분으로 여기에 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달려나와 “엄마 배고파.  밥 주세요”하고 몰려왔을 때에 아이들에게 맛있는 밥을 차려주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이 강단에 서곤 합니다.

  가정이 무엇입니까?  호텔같은 방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값비싼 침대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서로 편안히 누울 수 있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인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 진수성찬 없어도 괜찮습니다.  서로 웃으며 밥을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정 아니겠습니까?  호화스런 저택에 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화목하게 살면 그만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값비싼 보석을 선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서로 소중한 줄 알고 살아가면 그만인 것입니다.  훌륭한 교양과 인격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명성과 인물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공동체가 가정공동체 아니겠습니까? 



II. 가정 = 에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을 주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가정이라는 에덴을 주었습니다.  여기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 즐거움, 행복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가정에 준 기쁨을 잘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행복을 소중히 지키며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하나님도 있었고 마귀도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먹기 좋은 과일 나무들도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선도 있고 악도 있었습니다.  행복도 있고 불행도 있었습니다.  긍적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흙도 있었고 생기도 있었습니다.  인간은 흙도 될 수 있고 영적인 존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들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지옥처럼 살다가 죽으면 천국가는게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 믿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갈 때도 천국에서 천국 같은 삶을 살아가다가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져 가는 것 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결혼만 하면 행복이 저절로 찾아오는 줄 압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행복은 기성품이 아닙니다.  누군가 행복이란 옷을 만들어 놓고 결혼만 하면 누가 저절로 입혀주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행복은 요술이 아니요 마술이 아닙니다.  예술입니다.  결혼만 하면 요술적으로 마술적으로 행복한 가정이 꽃 피어 나리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훌륭한 예술가가 각고의 노력 끝에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 듯이 온 가족이 함께 눈물 흘리며 기도해야 됩니다.  서로 인내해야 됩니다.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땀을 흘리며 가꿔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피를 흘리는 희생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행복의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울타리 안에 몸을 마주치고 산다는 것 자체가 기쁨도 되지만 때로 상처를 주고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남편의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아내의 투정 한마디가 남편의 가슴을 찢어 놓습니다.  부모의 감정 섞인 징계가 상처가 되기도 됩니다.  자식의 반항 한번이 부모의 행복을 앗아갑니다.  며느리의 태도가, 시어머니의 한마디 충고가 상처가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게 가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사랑의 보자기로 덮어가며 서로 소중히 여기며 이 안에서 행복의 꽃을 피어 가는 것, 그게 가정이라고 하는 거예요. 서로 부족하고 모자라는 사람들이 서로 덮어가며 감싸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남자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는데 천사가 하늘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유인즉 “너희들은 아직까지 살았어야 할 사람들인데 행정상 착오로 너무 일찍 왔으니 땅에 내려가서 남은 일을 하고 오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상으로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줄 테니까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사나이가 “나는 저 땅에 권력을 가져가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주어서 내 보내었습니다. 둘째 사나이는 “저는 재물을 원합니다.” 재물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셋째 사나이는 “저는 이상적인 아내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아내상을 얘기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아름답고 명랑하여 미남들이 주위를 졸졸 따라다니나, 다 버리고 나를 택해야 한다. 그녀는 건강하여 절대 아프지 않다. 그녀는 요리와 청소의 달인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쇼핑을 제일 싫어한다. 남편이 집안일 돕는 것을 결코 바라지도, 생각지도, 꿈꾸지도 않는다. 이외에도 천사처럼 맘씨 곱고, 가정 교육 잘돼 있어 예의 바르고, 어머니처럼 헌신적이고, 낮에는 현모양처같고, 침실에선 요부같고, 외로울 땐 누나같고, 심심할 땐 동생 같고, 마음이 살랑댈 땐 연인 같고, 애 잘 낳고, 돈까지 잘버는 슈퍼우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작가 Bob Phillips의 「모든 남자들이 기대하는 이상형 아내감」중에서)

  이 얘기를 다 듣고 천국을 지키던 천사가 대답을 했습니다. “야, 이 사람아 그런 여자가 있으면 내 아내를 삼지 당신을 주겠는가?”

  세상 모든 여자들이 기대하는 이상적 남편상도 있습니다.

  그는 섬세하고 따뜻하고 이해심이 깊으며, 세련된 화술까지 겸비했다. 그는 당신을 위하여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당신이 무리해서 몸살이라도 날까 봐, 집에만 오면 날렵하게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차려 주고, 바닥을 쓸고 닦아 주며, 아이들과 놀아 주고, 빨래까지 완벽하게 널어 준다. 빌 게이츠처럼 똑똑하고,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분위기 있는 미남이며, 이외 신앙 좋고, 학벌 좋고, 키 크고, 잘생기고, 집안 좋고, 능력 있고, 매너 좋고, 거기다 차남이나 막내면 더욱 좋고, 어지간한 수준의 집과 차는 기본으로 갖춘 남자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이런 남자, 이런 여자는 없습니다.

「완전한 결혼」이란 책머리에 보면, 백지가 한 두장 나오고 거기에 당신의 배우자의 부족한 점을 적어 보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얼마나 적을 말이 많습니까? 속에 맺혀있던 얘기를 조목조목 적어나가노라면 얼마나 속이 후련하고 좋습니까?

  다 적고난 다음,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만약 당신의 배우자에게서 당신이 앞 페이지에 적었던 그 점을 빼 놓으면 당신의 배우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곧 천사이거나 신(神)이 될 것입니다. 그 천사는 당신같이 문제 있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사와 사는 것이 아니고 서로 부족한 사람과 사는 것입니다.

  바바라 월터는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미국에서 매우 인기가 있는 여자입니다. 그는 남편도 유명한 기자이자 컴퓨터 전문가였는데, 이렇게 완벽한 여자와 남자가 부부가 된 것이지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맞은 이 부부가 남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할텐데 이들은 결국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혼한 남자는 ‘이제는 좀더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적합한 여자를 찾아봐야겠다.’며 컴퓨터 통신에도 내고 사람들의 추천도 받아서 컴퓨터에 많은 여자들의 리스트와 자료들을 입력했습니다. 그 입력 결과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순위별로 10위까지 뽑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순위 1위의 여인은 바로 자기와 이혼했던 바바라 월터였던 것입니다. 부인을 바꾸면 남보다 더 잘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한 가정생활은-
  ①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② 너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가정의 완벽한 모습을 마지막 25절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너에게도 실수가 있고 나에게도 허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노출되어지고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 않은 관계, 그게 가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내 실수가 드러나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 내 연약함이 허물이 드러나도 부끄럽지 않은 공동체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가정 공동체인 것입니다.



III. 결혼 - 서로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는 것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파른 경사를 오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너무나 힘이 드는지 애교섞인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영감~ 나 좀 업어줘!” 할아버지도 무지 힘들었지만 남자 체면에 할 수 없이 업었지요. 그런데 할머니 얄밉게 묻습니다. “무거워?” 그러자 할아버지 담담한 목소리로 “그럼~ 무겁지! 얼굴 철판이지, 머리 돌이지, 간은 부었지, 많이 무겁지!”

  할머니를 내려놓고 같이 걷다가 너무 지쳐버린 할아버지, “할멈~ 나두 좀 업어 줘!” 기가 막힌 할머니, 그래도 할 수 없이 할아버지를 업어 봅니다. 이때 할아버지가 약올리는 목소리로 “그래도 생각보다 가볍지?” 할머니 찬찬히 자상한 목소리로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며, “그럼~ 가볍지. 머리 비었지, 허파에 바람들어갔지, 양심 없지, 너~무 가볍지!”

  이쯤되면 서로 좋은 일 하고도 한바탕 싸움이 벌어집니다. 결혼생활이란 서로의 약점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제 사람이 변하고 언제 힘을 얻는지 아십니까? 내 부끄러움을 누군가 덮어줄 때입니다.

  벤자민 웨스트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가 어릴 때 동생의 얼굴을 그려 주다가 방안의 새벽지와 카펫을 다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들어와 새벽지와 카펫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벤자민 웨스트가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 죄송해요. 동생의 얼굴을 그려 주다가 보니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아이의 빰에 키스를 하며 오히려 칭찬을 했습니다. “잘 그렸구나.” “동생하고 잘 놀아줘서 고맙구나. 착하구나. 너는 대단한 화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훗날 벤자민 웨스트는 고백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키스와 격려가 오늘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

  어릴때부터 눈썹이 나지 않은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오랜시간 혼자로 지내다가 결국 혼기를 놓치고 어느 연탄장수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눈썹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는 매일 남편보다 일찍 일어나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자기가 눈썹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남편은 잘 속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의 일을 돕는 직원이 몸이 아파서 나오지 못하게 되어 그녀가 대신 남편의 일을 돕기로 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연탄을 나르는 일은 평생 처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지치고 힘들었고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남편이 잠시 쉬자고 말하면서 쉬는 동안 자신의 목에 감아두었던 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속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편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눈썹만을 피해 조심조심 땀을 닦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참된 사랑은 아픔을 감싸주는 것입니다. 약점과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삽니다. 행복의 비밀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은 결혼해도 후회하고 결혼 안해도 후회한다고 합니다.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결혼해도 후회없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멋진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주님의 일을 위하여 스스로 결혼을 포기한 독신자들이 있습니다.  결혼의 의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직 결혼의 기회를 주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자와 사별해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혼의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우자가 부정을 저질렀거나 또 그 외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독신으로 지내는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가 있음을 성경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독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저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 저들의 신랑이 되고 한 가족이 될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혼자살아가는 독신자가 있으면 여러분 상처를 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가 되시고 신랑이 되시고 주님께서 저들의 가족이 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은 저들의 기도에 절대적으로 응답해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자유로 감당할 때에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저들을 먹이고 입힐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오랫동안 살아가다 보면 불같은 정욕을 이길 수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차라리 결혼해서 사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특별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경은 혼자 살아갈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말씀에 보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랬습니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신구약 성경 가운데 좋지 못하다는 얘기가 처음 나오는 부분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말씀하시고 바로 하와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아담을 이끌어 동산으로 나가시더니 생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했습니다.  물고기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번역이 뭔가 좀 신통치 않아요.  뭔가 이상합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아담의 돕는 배필은 될 수 없었다.”  저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짝이 있었습니다.  짝이 없는 것은 나 하나밖에 없구나.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아내를 맞이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생물들도 아담의 배필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 땅에 모든 좋지 못한 것들을 좋게 만드시기 위하여, 행복하지 못한 것들을 행복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기쁘지 못한 것들을 기쁘시게 만들기 위하여, 피곤한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만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돕는 베필이라는 말은 남자를 돕는 여자의 역할만을 얘기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돕는 배필은 ‘남성 명사형’입니다.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더 많이 도우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입니다.  돕는 배필이 된다고 그러니까 자존심 상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뭘 못나서 남이나 돕다가 죽어!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돕는 배필이라고 그랬습니다.  돕는 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도울 수 있습니까?  힘있는 자만이 도울 수가 있습니다.  강자만이 약자를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서적인 보완의 관계, 성격적인 보완의 관계, 성적인 보완의 관계, 영적인 보완의 관계에 있는 사람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돕는 배필 : 에제르. 이 말은 강한자가 약자를 도울 때에, 하나님께서 상처난 영혼을 치유하실 때에,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실 때에, 힘없는 자에게 용기를 더하여 주실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돕는 전능한 손길을 얘기할 때에 “돕는다”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내 손은 이미 천사의 손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면 내 힘은 이미 전능한 하나님의 손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돕는 배필입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이 바라는 배필이 될 때, 이 짝궁들은 시시한 것 가지고 잘 싸우게 됩니다. 반면 돕는 배필이 될 때, 시시한 것 가지고 쉽게 행복해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매일매일 부딪히는 부부싸움의 논제가 주로 무엇이었습니까?  거창한 문제, 대단한 문제 가지고 부부싸움하게 되던가요?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 가지고 부부싸움 해 보신 분 계십니까?  삼위일체론이 아주 어려운데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 때문에 이견이 생겨서 싸워 보신 분 계십니까?  이불 니가 개라 네가 개라.  조금 늦으면 전화 한통 주면 될 텐데 손이 없냐 발가락이 없냐?  이번달에 용돈이 많으니 적으니, 운전하다 말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운전대 맡겼으면 입이나 다물고 있어라.  유치원 얘들이나 싸울 수 있는 주제가 우리의 부부싸움의 주제 아니었습니까?  이게 부부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일상생활 한 가운데서 행복을 느낄 때는 언제였습니까?  참으로 시시한 것 하나가 나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불행하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존슨이라는 사람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내 아내가 헬라어를 줄줄 외울 때보다도 저녁 식탁을 맛있게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다소곳이 앉아있을 때가 참으로 행복했다.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졌다.”

  새 차를 선물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고, 차 문만 열어줘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꽃송이 하나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둑한 월급 봉투가 아니라 하더라도 “여보, 생활비 넉넉하게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 말 한마디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부인들은 남편이 밥만 맛있게 먹어줘도 행복합니다.  거기다가 먹다말고 “야! 맛있다.  끝내준다.  죽여준다” 한마디만 하면 온종일 피곤이 싹 가셔지는 것입니다.  그게 부부간의 행복 아니었습니까?  때로는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행복의 신비가 거기에 있습니다. 



VI. 사랑의 방법 :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공지영의 장편소설 「봉순이 언니」가운데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마을에 드넓은 초원이 있고, 거기에는 진한 갈색의 멋진 종마가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그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와 그 종마를 사랑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멀리 출타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부탁했습니다.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종마를 사랑하는지, 또 그 말이 자기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이제 종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종마가 병이 나고 만 것입니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에도 보람없는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를 절게 되어버렸습니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습니다. “너는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다는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그 말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했습니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우리는 실상 사랑을 하면서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르게 창조되었는가? 상대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가? 내 남편, 내 아내는 어느 때에 행복해 하는가?

  어떤 신랑이 결혼을 하고서 첫날밤에 자기 신부에게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하오. 그런데 나는 이런 말을 시시하게 반복하고 싶지 않소. 오늘밤 내가 당신에게 한 이 고백은 평생 유효하니, 내가 오늘밤 한번만 고백해도 평생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로 알고 살아가길 바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지혜로운 신부가 “여보, 나는 한 가지 약점이 있는데, 얼마나 건망증이 심한지 몰라요. 그래서 당신이 그 사실을 날마다 고백해 주지 않으면 난 도무지 살 수가 없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따사로운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서로서로”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서로서로 사랑하라” “너희는 서로서로 세우라” “서로서로 용납하라.”

  부부가, 가족이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그 신비의 차원이 또한 오늘 본문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는 말입니다. 약점이 있어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 허물이 있어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 실수해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 말입니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관계가 부부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 신부입장이 오늘 본문입니다.  인류역사상 최초 사랑고백이 “이는 내 살중의 살이요 뼈중에 뼈라”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완전한 관계를 오늘 본문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완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젠가부터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보면 내가 못견뎌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후입니다.  그때부터 사람을 가까이 가서 사귀어 보면 허물이 보입니다.  그래서 존경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이게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누군가의 허물과 약점과 실수가 보이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시면 틀림없습니다. ‘아, 내 죄가 많아서 그렇구나. 내 눈이 타락해서 그렇구나.’

  때문에 먼저는 내가 내 허물을 덮어주고, 다음은 상대의 허물을 용서하십시요.

  여러분 거울을 볼 때마다 선언을 하십시오.  “나는 너를 용서한다.”  왜? 하나님이 너를 용서했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에게 매일같이 용서를 선언하고 살아야 됩니다.  뿐만 아니고 하나님이 너를 용서했기 때문에 나도 너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용서하고 나는 너를 용서하고. 나는 너를 덮고 너는 나를 덮고. 나는 너를 감싸고 너는 나를 감싸고. - 바로 그때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V. 맺으며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 - 가정이란 곳이 그런 곳 아닙니까? 벌거벗고 함께 사는 곳입니다. 부끄러움, 약점, 아픔, 실수, 허물 - 그 모습 그대로 함께 머물며, 함께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한 부부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서로 이혼을 하기로 하고 별거중인 부부였던 모양입니다. 남편이 이대로 가정을 깨뜨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잘못으로 파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아내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용서를 구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 할 말을 가르쳐 주세요.”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낼 때 “네가 말할 것을 염려하지 마라.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다.”는 말씀이 생각나더랍니다. 그리고 아내를 찾아가 첫 사랑을 나누던 바닷가를 함께 걸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내는 도무지 내키지 않았지만 곧 헤어질 사람이니 소원을 들어주자 싶어 함께 바닷가로 말없이, 재미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파도가 밀려드는 바람에 아내가 넘어졌고 바다 밑으로 아내의 손에 끼워있던 결혼반지가 빠졌습니다. 비싼 반지가 아깝긴 했지만 곧 헤어질 것이니 차라리 잘됐다 싶었습니다. 그순간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망설이기만 하던 남편이 자기 반지를 빼 물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남편의 엉뚱한 행동에 아내가 묻습니다. “왜 그랬어요?” 남편이 상기된 얼굴로 대답합니다. “당신 반지가 외로울 거 아냐, 내 반지가 함께 있으면 당신 반지가 외롭지 않을 거야.”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함께 울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손을 잡고 약속이라도 한 듯 “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라고 외쳤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하여 가장 긴급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테레사 수녀는 웃으면서 기자에게 말하기를 “기자 선생님께서 빨리 집에 돌아가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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