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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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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말씀을 향하여

  고양시 일산 마두동에 살던 맹생원이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 재판관 앞에 섰습니다. “그래 예수를 믿었는가?” “아니올씨다.” “그 좋은 한소망교회를 코 앞에 두고 뭘했나?” “유구무언이올시다.” “자네는 지옥에 가야하는데 마지막 소원이 없는가? 한번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돌아올래야 돌아올 수도 없고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고 끝없는 고통과 괴로움 뿐이야.”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 뭔가?” “평생 소주나 마시고 기생충처럼 살던 놈이 지옥가는 거야 당연하지만, 지금 가기는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어릴 때는 농촌에서 고생하다 논마지기 팔아 서울에 올라 왔습죠. 20년전 종로바닥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하다 실패하여, 고양시 일산 땅에 자리잡고 지금까지 고생고생하다가 지병으로 이렇게 재판관님 앞에 섰습니다. 저를 다시 한번만 더 저 세상에 보내 주시되 이번엔 부도 없는 조그마한 중소기업 하나 주시고 양귀비 같은 색시 하나 짜매주시어 말썽 안 피우는 자식놈 두 셋에 힘 좋고 노사분규 일으키지 않는 종업원 몇 놈을 주십시요. 이처럼 걱정 근심없이 다만 몇 년이라도 살다가 그때는 예수 잘 믿고 이곳에 오겠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이 배꼽을 잡고 한참이나 웃다가 하시는 말씀 “야, 이놈아, 인생사에 그런 자리가 있으면 내가 내려가지 너를 내려 보내겠느냐?”

  여러분! 인생을 살아오면서 힘겨운 짐이 없던 때가 있었나요? 나에게는 인생의 짐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고달프고,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대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살아가며,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괴롭고, 권력자는 그들 나름대로 힘겨운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공부하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짐이 있고,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연약함과 죽음의 짐이 있습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에게 괴로움은 떠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통 속에서 태어나서 고통 속에서 살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갑니다. 출애굽 지도자 모세의 기도대로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 그러기에 세계 정복을 꿈꾸던 나폴레옹도 세인트 헤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나는 지금까지 단 일주일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 저기 바닷가에 넘실거리는 물결은 세상 사람들의 눈물이요, 저기 부는 바람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한숨소리로구나”라고 한탄했던 것입니다.

II. 인생의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18세기 영국이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다닐 때, 수없이 많은 배들을 띄웠습니다만, 그 중에는 적지 않은 많은 배들이 침몰되곤 했습니다. 배들이 자주 가라앉게 된 큰 이유는 짐을 너무 많이 싣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사무엘 프림솔(S. Plimsoll)이라는 사람이 이를 연구하고 조사하여 영국 국회에 한 개의 법안을 제출, 통과시켰습니다. 그 법의 이름이 적재한계선(Load Line)이라는 법이었습니다. 일정한 짐을 실은 배가 일단 물 위에 띠워지면 그 배가 물에 닿는 부분에 선, 줄을 긋고, 그 이상은 절대로 초과해서 짐을 더 못실게 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큰 배를 보면 매 아래에 노란선, 하얀 선이 그어져 있지요? 이 선을 프림솔이란 사람이 제안했다고 하여 Plimsoll line이라고 합니다. 일단 이 선이 물에 닿으면 그 이상 짐을 실을 수 없습니다. 이 선은 생명선과 같습니다. 그 이상 짐을 실으면 배가 가라앉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 조그만 풍랑이 일어도 쓰러지고 뒤집혀지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쉬기를 원합니다. 피곤한 영혼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며 살다가 어느 곳에 짐을 내려놓고 쉬기를 원하지만 쉴만한 곳이 없습니다.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지게를 많이 졌습니다. 여린 어깨에 짐을 잔뜩지고 고사리같은 손으로 지게 지팡이를 짚고 콩나물 같은 두 다리를 발발발발 떨면서 다녔습니다. 한참 가다가 너무 덥고 힘들어서 나무그늘 밑에 지게를 내려놓고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온 몸에 흐르는 땀을 식히면 그 상쾌한 기분이야말로 지금 생각해도 시원해집니다. 그러나 인생의 짐은 지게 짐과는 달라서 쉽게 내려놓을 수도 없고 누가 대신 져줄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자신의 짐이 너무 힘겨워 남의 짐을 지려고도 하지 않고 져주고 싶어도 대신 져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애기가 보채고 울기 시작합니다. 열이 납니다. 숨을 할딱거리고 몰아쉽니다. 애기를 품에 안은 엄마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릅니다.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게 됩니까? 안되지요. 입시지옥에 시달리며 밤잠을 못자고 공부를 하는 자식놈의 노력이 안타까와 대학교수인 아버지가 대신공부를 해주고 대신 시험을 쳐주고 싶지만 그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인생의 짐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인류 중에 그 누구도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준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무거운 인생고를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이순신도, 세종대왕도, 아브라함 링컨도, 알렉산더도, 석가도, 공자도, 그 어떤 성현도 괴로움을 안고 괴로워하다가 죽었습니다. 자기가 죽어서 무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까? 흙 위에 누워 흙을 덮어쓰고 누운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인생의 본질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수고한다’는 말은 원문에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사서 고생하는 능동적인 고생을 의미합니다. ‘무거운 짐’은 원문에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피동적인 고생입니다. 원치 않는 환경 속에서 수난을 겪는 그런 고생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고난을 취하든지, 원치 않는 고난을 받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수고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나는 곳이 창세기 타락직후입니다. 이때부터 수고는 인생의 별명이 되었습니다. 저 사람은 고민이 없겠지 하고 만나 보면 고민이 몇 배나 더 있습니다. 일의 고민, 자신에 대한 고민, 부모나 자식에 대한 고민, 부부간의 고민 등, 화려하고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고뇌하고 있습니다.

  웃는 얼굴 뒤에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넓은 가슴속에도 홀로 가슴 치는 아픔이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얽혀 그 갈등으로 영혼이 병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다 아셨습니다. 저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고 그것이 죄로 인해 저주받은 인생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절망하는 인생을 향해 두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에게는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감히 이런 절대적인 초청과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초청이요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III. 예수만이 인생의 짐을 벗겨줄 수 있다

  오늘 교회에 처음 오신 여러분 참 잘 오셨습니다. 왜요? 교회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곳입니다. 교회가 뭐가 그리 좋으냐구요? 사람이 한번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믿음의 맛을 알면 평생을 믿게 됩니다. 자신만 예수 믿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도 자식도 평생을 예수 믿고 살게 만듭니다.

  그만큼 예수 믿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만 아니라 저 멀리 한번도 안 가본 외국사람들도 예수 믿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많은 돈을 헌금해서 선교사를 보내어 예수 믿도록 도와주는 일들을 합니다.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 그 좋으신 예수님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인생의 짐을 풀어 주실 분이 누구신지, 그 짐을 풀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즉 우리 인생의 짐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한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로 예수님 말입니다.

  저는 어릴 때 유교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저희 동리 뒷산에는 합천 해인사의 큰집 연수사 절이 있어서 자주 다니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가 되면 빵 받아 먹기 위해 교회도 종종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교나 불교나 기독교나 종교란 다 한 가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유교도 좀 알고 불교도 조금 알고 기독교도 조금 알만한 시절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 한 토막에 예수님께로 완전히 기울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건 일화니까 이 자리에 혹시 유교나 불교를 숭상하시는 분이 계셔도 이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좁은 사잇길로 가다가 그만 실수로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써도 자기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지요. 그때 마침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어떤 젊잖으신 한 분이 그 옆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하고 소리치는 그 사람에게 지나가던 젊잖으신 분이 혀를 끌끌 차면서 하시는 말씀이, “군자 대로행이라고 했거늘 사나이가 왜 좁은 사잇길로 가다가 그 꼴을 당하는고. 또 설사 수렁에 빠졌기로서니 대장부가 젊잖치 못하게 꽥꽥 소리를 질러!” 그러고는 그냥 지나가더랍니다. 누구의 가르침이겠습니까? 바로 공자의 가르침입니다.

  잠시후 또 다른 사람이 지나갑니다. 또 그 사람은 지나는 사람에게 “사람 살려, 사람 살려”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도 구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인생은 어차피 고해이니라. 생노병사에 시달리는 또 하나의 중생이 있구나. 거기서 잠시 고행을 하여 지푸라기라도 잡고 나올 수 있는 힘을 기르시오.”하고 자기 갈길로 바삐 지나가 버렸습니다. 누구의 가르침입니까?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입니다.

  잠시후 세 번째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이번만은 꼭 살아야겠다는 신념으로 더욱 목청껏 죽을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이 세 번째 사람은 “너는 왜 넓은 길을 놔두고 좁은 길로 가다가 이 고생을 하느냐?”하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불쌍하다고 동정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대로 수렁으로 뛰어들어 빠져서 다 죽게 된 그 사람을 강뚝에 건져내고는 자신은 나오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대신 죽어갔습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곧잘하던 이동국 선수가 혼자 넘어졌는데 인대가 파열됩니다. 어린아이들이 미군 장갑차 위에서 놀다가 고압선에 닿아서 까맣게 타 죽습니다. “나는 감기 한번 앓아보지 않았어”하던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는 병균 몇 마리만 들어가면 죽습니다.

  또한 인간은 약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악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지, 정, 의 모두 총체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좋은 말씀은 금방 잊어버리고 나쁜 소문은 오래 기억이 됩니다. 사랑과 기쁨은 금방 사라지고 미움과 상처는 죽을 때까지 갑니다. 선한 일을 하는 데는 반 시간도 아깝고, 술 마시고 도박을 하고 못된 인터넷을 하는데는 밤을 지세웁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이 주신 영광과 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는 무거운 짐, 죽어서는 역시 지옥고생입니다. 이 인간을 살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위에 오셔서 내 대신 죄 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그 분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 땅에 무덤을 남기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올라가셔서 지금 인생의 짐을 풀어주시기 위해 여러분을 초청하셨습니다.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십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 앞에 오는 사람은 영원히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돈 많은 사람은 오라. 많이 배운 사람은 오라. 건강한 사람은 오라 하셨다면 어떤 사람은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과거에 우리가 누구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강조점은 “내가”라는 것입니다. 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경가 깁슨은 오늘 본문의 진정한 뜻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안식이 되신다”는 뜻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평화요 우리의 안식이십니다. 그분께 가면, 그분은 우리를 만져 주시고 무거운 짐 부수고 녹이고 고치시어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IV. 인생을 초청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초청할 때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초청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대통령쯤 되는 분이 나를 초청해 주셨다면 그것은 대단히 기분좋은 일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큰 영광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일 것입니다.

  여러분을 초청해 주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하늘 위와 땅 위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전 역사를 통하여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마지막 날에 온 인간을 심판하실 우주의 대왕이십니다. 이렇게 높으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만나자고 초청하셨습니다. 마귀의 자식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고 지옥의 백성을 천국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죽음 속에 영원한 천국을 건설하신 그 고마우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초청해 주셨습니다.

  초청받고 나온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초청은 짐 없는 자를 부르지 아니하고, 짐이 있는 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병이 전혀 없는 자를 부르지 아니하시고, 병든 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죄 없는 자를 부르지 아니하시고, 죄있는 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부담없는 자를 부르지 아니하시고,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우리 나라에 선교사가 처음 왔을 때는 요즘의 승합차 비슷한 큼직한 자동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어느날 할머니 한 분이 시장에 갔다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갑니다. 선교사가 차를 세우고 “할머니 이 차에 타십시요.” 그런데 할머니는 차에 타고 나서도 그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인 채 내려놓을 줄을 모릅니다. 보다 못한 선교사는 “할머니, 짐 내려놓고 편히 가세요.”하고 말하자, 이 할머니는 “나 하나 탄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이 짐까지 내려놓는담”하며 미안해 하더랍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예수께 맡기고 살아가라고 그만큼 알려주어도 왜 혼자서 끙끙거리며 살아가십니까?

  어떤 분은 하나님을 “쓰레기통과 같은 분이다.” 소개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옆집에다 쓰레기 갔다 버리면 “우리 집에 왜 쓰레기 버렸냐”고 우리 마당에 쓰레기 휙 집어 던지면서 자기네 집 쓰레기까지 갖다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고통들, 영혼의 진통들, 내 인생의 무거운 짐들, 주님 앞에 가지고 가면 주님께서 모든 것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V. 예수님이 풀어주시는 짐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풀어야 할 짐, 예수님이 풀어주시는 짐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께 나오면 죄의 짐이 풀어집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죄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죄가 없어.” “나는 법 없어도 살아”하는 사람을 종종 보는데 그런 사람이 제일 흉측한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은 죄 중에 잉태되고 죄에서 태어나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짐을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죄짐을 다 풀어 주셨다는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짐은 그 자리에서 당장 풀어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질병의 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서운 고통 중의 하나가 질병입니다. 질병은 생명을 앗아가고 행복한 가정을 파괴해 버립니다. 가정에 남편이 병들면 행복이 깨집니다. 자식이 아프고 아내가 병들면 온 가정이 우울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병을 퇴치하려고 지구가 생긴이래 수천년간 약초를 찾아다녔고, 오늘날도 의학이 발달했다고 자랑은 하지만 불치병은 더욱더 늘어갈 뿐입니다. 말세의 재앙 중에 질병으로 고통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성경은 예고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암, AIDS, 이름 모를 난치병들...

  그러나 야훼 라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출16:16) 이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만난 모든 환자들은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 시간도 예수님께서는 질병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내게 오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못된 질병의 짐아 풀어 져라!” 이 시간도 진정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질병의 짐이 풀어집니다.

  세째로, 가난의 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계지도를 펴놓고 국민 소득 2만불, 3만불 이상 되는 나라마다 색칠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색칠된 나라가 예수를 믿는 나라인가 다른 종교를 믿는 나라인가를 알아 보십시요. 여러분이 찾아낸 30여개 국 중에서 95%가 기독교 국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5%에 해당하는 그 외 한 두 나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경제부흥을 이룩한 다음 껍데기만 취하고 알맹이 예수를 버린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는 그 물질적 풍요로 인하여 무서운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네째로, 죽음의 짐이 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오늘밤 찾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죽음 이후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예수 앞에 나와 죽음의 짐이 풀려진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 인생이 끝난다고 해도 오늘 지구가 없어진다고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무거운 짐들을 벗기를 원치 않습니까? 짐이 이것들 뿐이겠습니까? 인간은 모두가 생활고의 짐, 자녀들의 염려, 근심, 걱정, 절망, 좌절, 실패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모든 짐진 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금까지 여러분이 어떤 인생의 짐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그 짐들이 몽땅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VI. 어떻게 그 짐을 풀어놓을 수 있는가?

  어떻게 인생의 짐을 풀어 놓을 수 있을까요?

  서너살 난 어린아이가 밖에 나갔다가 동리의 큰 아이가 괴롭히면 “엄마”하고 찾습니다. 밖에 나가 놀던 아이가 넘어져 상처가 나면 “엄마”하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십시오. 무슨 일을 만나면 “하나님”하고 기도하는 것이 어린아이가 되는 길입니다. 상처난 몸을 끌어안고 실패한 몸을 이끌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하며 겸손히 예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교만한 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마을에 호랑이가 내려오면 큰 개들은 무서워 흔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왈 왈 거리고 짓는 개가 있어요. 강아지입니다. 그것도 똥개 강아지입니다. 이걸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겁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겸손합니다. 여러분은 초청에 응하셔서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영접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차려놓은 뷔페식당에서도 내가 집어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향해 아무리 멋진 계획을 준비하고 계서도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VII. 맺는 말씀

  인생의 무거운 짐 - 이것 해결하지 않고는 평안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다 내게로 오라” 우리 함께 예수님 앞으로 가십시다.

  언젠가 제가 조그만 수술을 했습니다. 제가 병실 침대에 누워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좀더 살아야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왜 더 살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 제가 건축을 해야 됩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신 줄 아십니까? “건축은 건설    회사가 한다. 네가 걱정할 것 아니다.” “하나님 저는 전도를 조금 더 해야 합니다. 교회를 부흥시켜야 됩니다.”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전도는 집사들이 잘 할게다.” “하나님 제가 아이들을 돌보고 아내를 돌봐야 합니다. 그리고 노모님도 계십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돌보는 줄 아느냐 내가 돌본다.” 더 이상 할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의 종으로서 오늘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부끄럼없이 위엄있게 죽겠습니다. 오늘 죽어도 천국가는데 무슨 후회가 있고 여한이 있겠습니까?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랬더니 주님께서 “오래 살아 교회와 나를 섬겨라”하셨습니다. 제게 평안을 주셨고 생명도 주셨고 새로운 기회도 주셨고 건강도 주셨습니다.

  묻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수고가 무엇입니까? 짐이 무엇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다 예수께로 오라 말씀하십니다.

  당신도  /  당신도  /  당신도  /  오라 하십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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