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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5) (신 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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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 양재동에 있는 어느 미션 스쿨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학교에 가기 전 교장 선생이 참 훌륭하신 분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교장실에 들어 교장 선생님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삶의 교훈 하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저에게 ‘저는 있으나 마나한 교장이 되려고 힘씁니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 이었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있으나 마나한 사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당연히 우리는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컸습니다. 그런데 그 교장 선생님은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힘쓰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밑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다음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의 리더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제 소원과 기도는 ‘저도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가 되었습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리더쉽은 초기에 필요한 리더쉽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리더쉽이 끝까지 가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와 같은 리더쉽이 끝까지 작용하게 되면 그 한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아주 나약한 조직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그 리더쉽이 없어지게 되면 안 되는 조직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정말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40년 동안 하나님에게 충성한 모세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고 느보산에 올라가 죽으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모세는 가나안 땅에 일등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이나 속 썩으면서 가나안까지 인도한 모세를 느보산에서 죽으라 하신 하나님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당사자도 아닌 제가 섭섭해서 하나님께 충성하기 싫을 만큼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세를 위한 하나님의 결정이셨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모세를 없어서는 안 되는 리더쉽에서 정말 정상의 리더쉽인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공을 높이 보시고 그것을 보존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그 어느 나라 교회보다 없어서는 안 될 참으로 충성스러운 주의 종들이 많았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리더쉽들의 충성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우리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으리만큼 부흥하고 성장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우리 한국 교회가 언젠가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약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중요한 이유가 그 모세 같은 충성스러운 주의 종들이 거의 다 가나안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없으면 이 교회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정확하고 정직한 은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확신이 지나친 일부 대형교회는 나이도 어린 자기 아들을 세워 세습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혼란을 격지 않고 안정된다는 논리를 저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논리는 근본부터 틀린 논리입니다. 담임목사의 아들이 후임이 되지 않으면 위험할 교회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건강치 못한 것입니다.

몇 년 전 30대 아들에게 수 만 명의 교회를 세습케 한 목사님에게 어느 신문사 기자가 ‘왜 아들을 후임으로 삼으려고 하는가?’라고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심장 이식 수술에 비유하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심장 이식 수술을 할 때 조직과 피가 맞지 않으면 거부 반응이 일어나서 결국 죽게 되는 것과 같이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제가 글을 올렸습니다. <도대체 그 교회의 심장은 누구의 심장인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인가 아니면 김 아무개 목사의 심장인가? 도대체 그 교회에 흐르는 피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인가 아니면 김 아무개 목사의 피인가?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흐르는 교회라면 그리스도의 심장과 피를 가진 어떤 목사가 와서 목회를 해도 거부반응이 없는 교회가 되어야 옳지 않은가? 도대체 그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신가 김 아무개 목사이신가?>

스스로 약속한 은퇴를 지키지 못하고 몇 년을 더 시무해야만 하시는 대형교회의 목사님도 가나안에 들어간 모세 같은 사람입니다.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지 않으면 교회가 무너지고 넘어질 것 같아 불안해하시는 분들도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모세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는 느보산으로 올라가라 하시고 아브라함에게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십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식입니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죽으면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에 빠져 죽을 것 같고,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면 맥도 못추고 유리방황하는 나그네처럼 살다가 죽을 것 같아 보이는 것은 일반적인 세상의 식입니다.

믿음 없는 눈에는 하나님의 뜻과 식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고 옳고 하나님의 식이 맞습니다. 모세가 가나안까지 들어가야만 하는 조직은 이미 죽은 조직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조직입니다. 이미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조직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등에 업고 일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의 하나님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절대로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모세 너무 근사합니다. 모세는 느보산으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들어가지 못할 가나안 땅에 대하여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없으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습니다.

여호수아를 백성들 앞에서 세우고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지리 속 썩이던 이스라엘 12 지파 하나, 하나 이름 불러가며 축복한 후 가나안 땅을 한 번 바라 본 후 느보산에 올라가 죽습니다. 너무 근사합니다. 너무 훌륭합니다. 모세는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끝까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최고의 리더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느보산에서 죽음으로 최고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신명기 34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이후에 이스라엘에 모세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최고의 지도자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세처럼 충성한 사람은 쉽지는 않으나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충성한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느보산에서 죽은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동안교회 건축 중에 안식년을 하였었습니다. 교회 건축 중에 담임목사가 안식년을 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때가 IMF 중이어서 매우 불안한 때였습니다. 안식년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였습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왜 하나님이 안식년이라는 제도를 만드셨을까?’에 대하여 아주 깊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너 없어도 돼’ 였습니다.
6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짓다보면 자기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는 것인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먹고 사는지가 오락가락 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먹고 사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안식년을 만드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안식년을 해석하고 생각하자 그때가 가장 적절한 안식년의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담임목사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때에 교회를 비워보자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당회에 말도 안 되는 안을 내 놓았고, 제 설명을 이해하신 당회원들이 결정을 해 주어 저는 예배당 건축 중에 안식년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식년 중에 가급적 교회에 전화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전화를 하면 저에게 무엇을 의논하고 허락 받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 두 달을 남겨 놓고는 외국에 나가 있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경희대 병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때문에 귀국을 해야 되는가를 알아보려고 병실로 전화를 하였을 때 그 전화를 지금 러시아 선교사로 가신 남국치 장로님이 받으셨습니다. 장로님이 제 전화를 받자마자 제게 하셨던 말씀은 ‘목사님, 교회 이상 무’였습니다.

세상에 그 중요한 때 담임 목사인 제가 없는데도 교회는 이상 무라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지만, 즉시 하나님이 옳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없으면 교회는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믿음 없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없어도 교회는 큰 문제없었습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장로님들에게도 안식년을 하시도록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장로님들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고집을 부리다시피하여 결국 장로님들도 일년씩 안식년을 하시게 하였습니다. 안식년을 하시게 된 장로님이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도대체 왜 안식년을 하라 하시는 겁니까?’ 제가 서슴치 않고 대답해 드렸습니다. ‘장로님이 없으셔도 교회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배우시라고요......!!!!!’

교회에 충성하는 젊은 집사 한 분이 저와 대화를 하다가 ‘저 죽으면 하나님 손해지요’라는 소리를 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제가 그 집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아무개 집사 그거 걱정 되서 못 죽었어? 걱정 말고 죽어. 내가 파묻어 줄께. 나 장례 전문이다. 지금은 청년들이 많아 매 주일 결혼주례를 하지만 전에 있던 교회는 할머니들이 많으셔서 매주일 장례했었다. 하루에 네 분도 장례한 적 있어. 너 같은 건 눈 감고도 파묻을 수 있어.
걱정 말고 죽어. 너 죽는다고 하나님 손해 보실 것 하나도 없어.>

저는 내년 10월부터 안식년을 하려고 합니다. 쉬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놀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제가 안식년을 갖는 일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건강해 지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14개월 반이나 남은 일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그래도 될 만큼 교회를 다져 놓으려고 합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영향은 있을는지 모릅니다. 교인이 조금 줄는지도 모릅니다. 교인들이 좀 흩어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의 문제는 스스로 이겨내고 극복해 내야만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워 담임목사가 일년도 교회를 비우지 못한다면 앞으로 십년 후에 어떻게 교회를 은퇴할 수 있겠습니까? 좀 과격한 말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캐치프레이지를 걸고 6년을 목회한 교회가 담임목사가 안식년을 한다고 무너진다면 그 참에 아예 무너지는 것이 좋습니다.

고양이를 여러 번 키워 보았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고양이가 정말 새끼를 잘 키웁니다. 고양이가 자기 새끼를 키우는 것을 보면 정말 감동적입니다. 밥을 주어도 새끼가 다 먹고 물러서기 전까지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자기 새끼를 끼고 돌던 에미가 어느 날이 되면 갑자기 새끼를 버립니다. 근처도 못 오게 합니다. 새끼가 자기 가까이 오면 공격합니다. 고양이를 여러 번 길러 보았지만 매번 똑같았습니다. 고양이 몸 안에 어떤 시계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시간이 되면 어미는 새끼를 버립니다. 그것은 모든 야생 동물들의 공통점입니다. 고양이에게는 아직도 야성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나중에서야 그것이 새끼를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끼가 예쁘다고 평생 어미가 품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약한 존재가 되어 야생의 세계에서 독립하여 살아갈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미를 잃게 되면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야생 동물에게는 마마보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만 마마보이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 날 많은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마마보이입니다. 그 교회를 일으켜 세운 모세 같은 목사에게 꼭 매달려서 그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에 목사를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사는 마마보이 같아 보입니다.

물론 목사를 우습게보고 아무렇게나 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해도 목사는 목사이지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목사가 훌륭해도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흔들리는 그런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건강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죽도록 충성한 후에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느보산으로 올라가 교회와 교인들을 축복하고, 자신의 후임을 축복하고 죽는 것입니다.
오늘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모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세하면 정말 설교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서 가장 근사하고 훌륭한 것은 그가 죽도록 충성한 후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묵묵히 느보산에 올라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까닭에 자기 없는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죽도록 충성한 후에도 느보산에 올라간 것이 구체적인 자기부인입니다. 그리고 그 자기부인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공을 세웠다고 내 것이라 하지 않는다. 내 것이라 하지 않음으로 구태여 머물려하지 않는다.> 세상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노자도 공을 세운 곳에 구태여 머물려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노자만도 못해서야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느보산에서 죽는 모세가 좋습니다. 제일 좋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느보산에서 죽는 모세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노망하지 않고, 착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높여 드리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넘어 있으나 마나한 삶을 주 안에서 근사하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고 싶습니다.

죽도록 충성한 후에도 느보산에서 죽은 모세의 뒤를 따라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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