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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삿 16: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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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사사기 16:15-22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기를 원하는 모든 심령들은 시간마다 때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기를 원하신다면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로운 존재로서의 감격을 안고 살아가십시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시간마다 때마다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말로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과거를 말하고, 과거에 매여서 살아간다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나간 과거를 붙잡지 마십시오.  지나간 과거를 묻지도 마십시오.  지나간 과거의 상처가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일반적으로 그 마음에 쓴 뿌리가 많은 사람은 인생을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쓴 뿌리가 깊이 박혀 있는 사람은 자신도 힘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합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내 안에 있는 모든 쓴 뿌리들이 다 제거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보다는 현재를 크게 보십시오.  현재보다는 미래를 더 크게 보십시오.  과거보다 미래를 크고 밝게 보는 사람이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가운데 보면 현재보다 과거를 더 크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대체적으로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언제나 환경 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과거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꿈도 없습니다.  이루고자 하는 소망도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통해서는 어떤 일도 이루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복은 미래를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신앙은 항상 미래를 향한 새로움에 도전하는 기상을 말합니다.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미래에 도전하십시오.  믿음이란 내일을 준비하는 존재들의 작업입니다.  역사는 미래를 향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도전하는 자에게만 열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다시 한번 꿈을 새롭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꿈이 새로워지면 영혼이 새로워집니다.  꿈이 새로워지면 마음도 새로워지고, 삶도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나와 내 가정과 내 교회를 향한 꿈을 가지십시오.  과거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신앙의 내용과 삶의 내용을 만들겠다는 뚜렷한 꿈을 가지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멋진 인생을 살아보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으십시오.  내 인생에서 제대로 한번 하나님을 믿어서 하늘의 복을 누려보리라는 결단을 가져보십시오.  이런 준비가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침체와 낙망을 극복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은 꿈이 있어야 소중한 것입니다.  꿈이 있어야 싱싱합니다.  꿈이 있어야 즐거움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있어야 인생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나님 안에서 미래를 열어 가는 가능성 그 자체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하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십니까?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자가 하늘의 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정말로 믿는다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질 위대한 날들에 대한 믿음의 결과를 기대하십니까?

성경은 끊임없이 말씀합니다.
"네 믿음대로 되느니라.
믿고 구한 것은 이루어진 줄을 믿으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믿음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는 언제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에는 절대적인 결과가 나타났고, 어설픈 믿음에는 어설픈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큰 믿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그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이러한 기대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체험한 사람일수록 더 크고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 시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의 믿음의 그릇을 크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위대한 날들에 대한 기대를 품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언제나 참된 것, 한 가지만을 가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죄의 가면을 벗어 던져서 마음속에 있는 아간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모든 위선과 거짓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죄인은 쓰셔도 가식에 물든 사람은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세리는 쓰셔도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쓴 바리새인은 쓰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한 승리의 생활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우리의 매일의 삶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변화된 내 삶의 모습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증거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죽은 신앙은 어떠한 역사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대단한 영력을 행하다가도 몇 년이 지난 후에 그가 가진 삶의 메시지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의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의 존재가 되지 말고, 기쁨의 존재가 되십시오.  변화된 우리의 진실된 삶의 모습으로 승리의 생활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CCM 가운데 '축복송'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
너의 영혼 우리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노래는 여러분이 잘 알 듯이 맑은 목소리, 스스로가 하나님과 하나됨을 확신하는 무대 매너, 사명감으로 가득한 송정미 사모님의 곡입니다.  이 분은 지금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렇게 인기를 누리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 때문이겠죠.  저는 노래를 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제 노래를 들으면서 그분이 기뻐하신다는 확신도 가집니다.  그래서 저는 '최선의 것을 최고의 분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노래합니다."

"최선의 것을 최고의 분께 드린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축복할까요, 안 할까요?
확신하건대 이런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우리의 인생도 당연히 성공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껏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말라기를 보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린다고 하면서도 더럽고 썩은 것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봉헌한다고 하면서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최선의 것을 최고의 분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것을 최고의 분께 드렸습니다.

이러한 행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계속해서 그들의 자손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 때문에 너희 자손을 꾸짖겠다.  너희 얼굴에 똥칠을 하겠다.  너희가 바친 희생 제물의 똥을 너희 얼굴에 칠할 것이니, 너희가 똥무더기 위에 버려지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질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당신을 향하여 절대적인 사랑으로 다가오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을 최선의 것으로 사랑하셨고, 최고의 것으로 축복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최선의 것으로 최고의 분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쓴다면 나머지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나와 우리의 자녀들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삼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서 인생의 실패와 성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 바로 삼손일 것입니다.

삼손의 생애는 성공의 전성기를 거쳐 처절한 실패로 막을 내립니다.  두 눈이 뽑힌 채로 감옥에서 맷돌질을 하고 있는 삼손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눈에서 떨어지고 있는 처절한 피눈물.  복수심과 호기심으로 들뜬 군중들 앞에 불려나와 곡마단의 어릿광대처럼 재주를 부리는 삼손의 비참한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삼손의 당당했던 첫 출발과 기적으로 일관했던 그의 삶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성공하는 삶에서 처절한 실패의 삶으로 떨어진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삼손의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실패를 막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 자신을 향한 희망을 거두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사기 15장 20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더라"

우리는 여기에서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써 20년 동안을 다스렸다는 것은 분명히 성공한 인생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본문이 시작되는 16장 1절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영어 성경으로 보면 삼손이 한 창녀를 보고 그에게로 들어가서 잤다고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의성경에서는 '어떤 창녀를 보고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문맥의 앞 뒤 어디를 살펴보아도 삼손이 주저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본문이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삼손이 창녀에게로 들어가는 사건은 이 한 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삼손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정적인 원인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한 데 있었습니다.  16장 4절 이하에 들릴라가 등장하지만 그러나 들릴라 이전에 삼손은 벌써 두 명의 여자를 거쳐온 상태였습니다.  첫 번째는 딤나의 여인이었습니다.  삼손은 이 여자 때문에 엄청난 곤욕을 치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절에서 3절을 보면 그는 두 번째의 여인을 찾아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1절에 나오는 가사라는 곳은 블레셋의 5대성 가운데 제일 남쪽에 있던 전략적인 성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영토를 한참이나 벗어난 적진의 남단까지 들어가 거기 있는 기생과 불륜을 행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으면 죄의 끝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서운 사망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끼가 아니라 그 미끼의 끝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낚아채는 바늘을 보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미끼는 항상 아름답습니다.  먹음직스럽고 탐스럽습니다.  인생을 걸 만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삼손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바른지 그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본능대로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이성적인 판단과 사리 분별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반복적인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삼손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경건의 모양만 있었을 뿐 경건의 내용은 없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에 나간다고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신실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신앙의 신분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내용이 신앙을 증거해 주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 앞에서 평생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성결한 삶을 위해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 안됩니다.  부정한 것을 먹어서도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한 상징을 유지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물론 삼손은 하나님께 구별된 상징으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한 약속은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성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헌신한 표시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지만 실제 그의 삶은 엉망이었습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면서 육신의 정욕을 따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창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의 내용은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삼손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 주간에 단 한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에 대해서 만족하는 사람은 삼손과 같이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삶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 있는 신앙 생활입니다.  그는 지금 종교적인 의무를 이행하는 종교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가정과 직장과 사업에서 그리스도인답게 말씀을 따라서 생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축복된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신앙 생활에 만족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삼손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삼손에게는 약점도 있었지만 장점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삼손은 힘이 센 장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도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수께끼도 낼 줄을 알았고, 장난도 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매사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인생을 게임으로 생각했습니다.  도무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들릴라와도 게임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자르지 말라고 하신 머리카락을 들릴라에 의해서 잘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걸어가고 있는 인생 여정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존 전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별의 삶을 살아드리고 있습니까?  어쩌면 불신앙의 모습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되지는 않습니까?  마치 옆집에 놀러가듯이 교회에 나오고, 그러면서 신앙의 성숙을 위한 진지함보다는 이웃들과의 친교에 더 힘을 쏟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진정으로 예수님을 내 인생의 구주로,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 우리 주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드리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이 시간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만을 섬기고 따르겠다고 고백했으면 실제 생활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말씀대로 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일 낮에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조금 읽고, 기도를 잠깐 하면 형식은 유지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신앙의 내용을 만들어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없고, 구원의 감격도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움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도 없는 냉랭한 삶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삼손과 같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 자신을 향한 희망을 거두는 어리석은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 잔의 커피에는 집을 40㎝ 두께의 안개로 감싸고도 남을 수분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 소량의 물이 얇게 퍼지면 시야를 온통 가릴 수도 있습니다.  안개가 길을 가로막으면 당황해 하면서 태양이 위에서 안개를 말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왜 당황해 할까요?  바른 시각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와 근심은 우리의 현실 상황에 마치 안개처럼 작용하여 사물을 바른 시각으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때로 우리는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처럼 모든 것을 30초 만에 해결하려고 허둥대며 생각이 나지 않으면 당황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늘에는 돌발 사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지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안개도 거두어주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은 영적으로 민감할 때에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둔감하고, 죄성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하나님 안에서의 영적 체험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삼손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은 삼손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보십시오.  삼손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몰랐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처참한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열정을 바치지 않고 주님께 온전한 삶을 드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서 조금씩 조금씩 주님 곁에서 멀어지는 것이 바로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안가도 별 탈이 없다고 느끼고, 기도를 안 해도 잘만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서서히 신앙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징조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부분에 민감해야 합니다.  영적인 부분을 개발시켜 나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개발되지 못하면 어느 한계에서 신앙이 멈추어 버립니다.

흔히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른 것을 보고 다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영적인 부분은 가면 갈수록 더 오묘해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신비하고 좋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훈련은 범사에, 그리고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도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먼저 영적 훈련이 잘되어야 합니다.  영이 거룩해지면 마음도 거룩해집니다.  영이 거룩해지면 우리의 육신도 평안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부분을 개발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모태 신앙으로 자라는 것은 매우 축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모태 신앙이지만 어려서부터 교회에 왔다갔다하는 것만 훈련시켰다면 커서도 그것밖에 모릅니다.  어려서부터 영적인 체험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알게 해야 합니다.  제대로 알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교회학교 아이들의 성령캠프에 여러분의 자녀들을 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위기는 영적 위기감을 알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데 비극이 있습니다.  자신의 메마른 영혼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적당히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삶을 헌신하는 신앙 고백이 없는 세대는 삼손과 같은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경건의 내용이 없는 껍데기뿐인 신앙 생활은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무디게 만들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눈앞에 임박했음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가 삼손의 비극이고 우리의 비극입니다.

보십시오.  삼손은 하나님 앞에 헌신된 나실인이면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여러분도 일주일 내내 전혀 기도 없이 살다가 주일 예배 때 겨우 형식적으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날마다 삶을 주님께 의탁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생활하지 않는다면 삼손처럼 될 위험이 있습니다.

삼손은 기도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과 꾀만 믿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자신의 육신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죄가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생에는 하나님께서도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삶은 결국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생 최고의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집에 가셔서 사사기를 정독해서 읽어보십시오.  대부분의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는 그 땅이 태평했다고 했습니다.  그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그 땅이 평화로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사사로 있는 동안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한 지도자의 잘못된 인생이 그 땅을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신앙이 그 가정에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돌아서야 합니다.  껍데기 같은 신앙의 형식을 벗어 던지고 더 늦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한 생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죄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실패와 절망을 이겨내고 성공할 수 있는 삶의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한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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