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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 샬롬 (삿 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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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 만족과 평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래전, 세계적인 도시 로마를 터벅 터벅 걷고 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으로서 자신이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로마까지 왔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에게 만족을 줄만한 것들을 모조리 다 해 보았습니다. 성에 탐닉하여 어린나이에 아이를 낳았으며, 학문에 몰두하여 젊은 나이에 학문의 대가가 되었고, 신비한 철학에 깊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또 열광적인 이단 종교에도 빠져 보았습니다. 이렇게 육신의 쾌락, 학문의 즐거움, 열광적인 종교심 등 참된 만족 주는 것을 얻기 위해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에게 만족과 평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를 더 허전하게 만들었고, 갈증만 더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도시에는 뭐든 자신을 만족시켜줄 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로마까지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정말 거대 도시였으며,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모여 든 다양한 인종들과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문화들, 그리고 다양한 학문들로 인하여 정말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서도 진정한 만족을 찾지 못했습니다. ‘참된 만족은 어디에 있는가? 진정한 평안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찾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오늘 우리 시대는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 풍요의 시대이며, 남아도는 것을 어떻게 잘 버리느냐 하는 것이 또 하나의 미덕이 된 시대입니다.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얻을 수 있고, 가 볼 수 있고, 맛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오래 전 참된 만족을 찾아 방황하던 그 청년처럼 우리 시대의 사람들 역시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이 가득 차 있으며,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한 채, 좌절과 절망과 불면과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쾌락을 누려 보아도,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 보아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산해진미를 먹어도, 최고 브랜드의 명품을 입어도, 세상의 갖고픈 모든 것을 다 소유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오래 전 로마를 방황하던 한 청년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오래 전 로마를 방황하던 그 청년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신앙인으로 불리는 어거스틴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은 후 그의 삶은 180도 바뀌어서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거스틴이 그렇게 찾으며 구하던 참 만족과 평안을 가지고 계십니까? 만족하십니까? 평안하십니까?

2. 하나님 없이는 평안도 없습니다.

1) 평안이 없는 세상

분문은 현대인들이나 어거스틴처럼 평안을 갈구하던 시대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7년째 미디안인들의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미디안인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다스렸든지,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은 정말 말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고향이나 정든 집에서 살 수가 없어서 사람들은 고향과 집을 버리고 산으로 들로 피난하여 도망을 가서 거기서 살았습니다. 전쟁을 경험하신 분들이나, TV 등에서 당시의 기록 필름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집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피난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엄청난 괴로움이고 고난도 그만한 고난이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이 너무도 혹독하게 괴롭히니까 산으로 가서 굴에서 살거나, 땅굴을 파고 거기서 생활하거나, 은밀한 곳에 산성을 쌓아서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미디안의 학대를 피할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이 산으로 도망가자, 미디안인들은 아말렉 사람들과 요단강 동쪽에 사는 아라비아 사람들까지 이끌고 왔는데, 그 수가 얼마나 많았든지 마치 “메뚜기 떼” 같았습니다. 이들은 주로 낙타를 타고서 옮겨 다니면서 생활하는 유목민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산으로 피신하여 살아가던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쑥대밭을 만드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로서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가지 않고 텐트를 치고는 눌러 앉아 이스라엘을 계속적으로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농산물을 비롯한 각종 양식과 다음해에 파종할 씨앗까지, 그리고 양이나 소나 나귀 등 모든 가축들까지 강탈해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늘 감시당하며 사는 기분을 아십니까? 정말 마주치기조차 싫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기분을 아시는지요? 고향산천 버리고 산으로 와서 숨어살려고 했더니, 그곳까지 따라온 원수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먹을 양식을 다 빼앗기고, 밭에 뿌릴 것도 없으며, 자란 곡식을 거두지도 못하며, 설사 거둔다 해도 타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원수들이 없는 곳에서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자 보는 것, 열심히 땅을 일구어 거기에 씨를 뿌린 후 땀 흘려 거두어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것, 제대로 먹고 제대로 쉬어보는 것 등이지 않겠습니까? 즉 그들이 간절히 바란 것은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은 이 세상에는 평안이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머리와 마음이 뒤숭숭하고, 중국이 우리 민족의 발해 역사와 고구려 역사를 앗아가려 하고, 이미 백두산은 절반이나 중국 땅이 되어 버렸으며, 미국 등 외국 강대국들과의 FTA 협상으로 우리나라 농업을 비롯한 산업 전체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으며,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과 그에 맞서는 미국의 제재조치와 일본의 선제공격 가능성 어쩌고, 이에 대한 대통령과 정부의 입장이 어째 마음에 들지 않고 …. 어떠세요? 금방 평안이 다 날아가 버릴듯하죠? 오늘 본문의 사사시대처럼 지금도 이 세상에서 진정한 평안을 찾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2) 평안이 없는 사람들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가도, 내 마음 편하고 내 가정 편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11,12)”께서 이스라엘의 므낫세 지파 지역, 아비에셀 집안에 속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오브라라는 동네로 가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아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가셨는데, 그때 그 집의 아들 기드온은 밀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밀 타작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몰래 밀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밀 타작은 넓은 마당에서 마차나 황소의 힘을 이용하여 하는데, 그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만든 작은 웅덩이나 용기에 들어가 기구나 짐승의 힘 대신에 자기 발로 밟으면서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밀을 타작하면 타작이 제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그가 이렇게 몰래, 그것도 포도주 틀에서 밀 타작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미디안인들이 밀 타작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금방 달려와 곡식을 모조리 강탈해 갈 것이고, 곡식을 숨겼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이나 가족의 생명이 위험해 질 수 있기 때문에,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타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포도주 틀에서, 자신이 발로 밟아서 타작해도 될 만큼 그 양이 적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곡식을 구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것은 외국의 압제를 받으면서, 간신히 생명을 이어가는 괴로운 현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가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을 방문했을 때, 기드온의 첫 마디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당시 기드온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이제야 오셨습니까? 저와 우리 백성이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참, 정말 하나님이세요? 주님을 뵌 적이 없어서 …” 이런 식의 반응이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대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의 처지가 이 모양 이 꼴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미디안과 아멜렉과 아라비아인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지독한 학대와 가난과 핍박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불평과 원망, 현재의 불행에 대한 분노,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대한 감격이 없는 것 …. 이것이 기드온의 모습니다. 이런 그에게 만족이나 평안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평안하십니까? 이 세상이 어떻든지, 나라가 어떻든지, 지금 우리나라 경기가 바닥이라 살아가는 것이 엉망이든지 말든지, 이런 상황에서도 여러분이 만족하고 행복하고 살만하다면 괜찮겠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렇다’고 대답할 분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한 끼도 제대로 떼울 수 없는 적은 양의 곡식을 포도주 틀에서 밟고 있던 기드온처럼 물질로 인하여 힘들고,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주위 눈치 보느라 힘들고, …. 기드온처럼 지금 여러분들도 평안이 없지 않으세요?

3. 평안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1)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와 같이 세상에 평안이 없고, 그 가운데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평안이 없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현장으로 임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는 처음에는 단순히 “여호와의 사자”라서 천사 중의 하나이겠거니 할 수 있지만, 뒤이어 그 분이 바로 여호와이시며, 기드온이 이 분을 “주”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분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심으로서 평안을 주시려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기드온은 자기를 찾은 하나님께 ‘왜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렇게 평강이 없느냐’고 불평합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평안하게,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야지, 이토록 고생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들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집니다. ‘하나님께서 무책임해도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묻습니다(13).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평안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몰아내었습니다. 6장 1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7절부터 10절에는 이스라엘 가운데 평강이 없는 것,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6장 25절, 26절에는 “바알의 단 … 아세라 상”이 이스라엘 한 가운데 있었으며, 온 백성이 그것을 섬기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평강 없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 등 가나안의 신들을 섬긴 것은 하나님보다는 이 땅의 부와 재물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입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요, 아세라는 쾌락과 다산의 신으로 숭배를 받던 우상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전도하는 일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더 나은 집, 더 나은 교육 환경, 좀 더 새로운 모델의 승용차, 아직껏 못 가 본 또 다른 해외여행, 정말 그들은 갖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으며, 해보고 싶은 일도 많았으며, 가고 싶은 곳도 많았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는 이 급변하고 각박한 경쟁의 시대를 이겨내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철저히 이 세대 사람들과 같아져야 하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세상의 논리를 따랐습니다. 세상의 물질과 부에 관심이 더 많았고, 그래서 하나님과 말씀과 예배에 소홀해 지더니 결국은 하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이스라엘에 평화가 사라진 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이 좋아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버렸고, 그로 인하여 평안이 없는 고통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을 때, 먼저 그들을 찾아오셔서 평안을 주려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와 평안을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으시고 평안을 주려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여호와 샬롬”

평안이 없는 세상, 불안과 불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기드온이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여호와 살롬!”, 즉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이렇게 부른 것은 이스라엘과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평안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평강은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평강은 우리가 잘 아는 “살롬(샬롬)”입니다.

“샬롬”이라는 말은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분쟁이나 갈등이 없는 것을 살롬이라고 합니다. 미디안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나 일과 나 사이에 있었던 갈등과 싸움이 사라지고 화해하는 것이 살롬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살롬은 갈등의 당사자끼리 서로 화해해서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임하심으로, ‘너가 잘 했느냐 내가 잘 했느냐’고, ‘너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갈등의 자연소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서로간의 갈등과 분쟁이 저절로 사라진 것이죠. 성도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괴롭더라도, 하나님이 임하시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눈 녹듯이 사라지고 참된 평화가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미디안을 몰아내시고 여러분에게 참 평안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가 여러분에게 넘치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성경이 말하는샬롬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과 관련되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9절, 33장 20절, 그리고 신명기 5장 25절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뵐 수도 없지만, 만약 보게 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알고 있었던 기드온이었기에, 자신이 여호와의 사자, 즉 성자 하나님을 본 것은 당연히 자신의 죽음으로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죽음을 앞둔 사형수처럼 괴로워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찾은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을까요? ‘내 짧은 인생, 이것으로 끝인가?’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소망이 아직 남았는데 …’, ‘나이 많으신 아버님께 작별인사도 못 했는데, 아내와 어린 아이들에게 하직 인사라도 해야지…,’ ‘아니 그건 그렇고 하나님은 왜 내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는데 하필 나한테 오셔가지고는 이렇게 죽게 만드시나? 잘 나가는 유다 지파나 장자 르우벤 지파의 유력자들이 많은데 왜 하필 나에게…. 그 참, 생각할수록 억울하네!’ 뭐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었겠죠. 이렇게 기드온은 하나님을 직접 뵌 것으로 인하여 평안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과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 탓으로 돌린 불신앙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로 평안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23절에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안심하라”는 말이 바로 “살롬”입니다. 즉 ‘비록 네가 인생으로서 하나님을 보았을지라도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자라는 축복과 은혜와 영광이 네게 있을 것이며, 이 이후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삶이 네게 열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그가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가 느낀 것이 바로 평안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바로 기드온과 같습니다. 기드온을 찾으셨던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을 찾으시고, 함께 하시고, 은혜와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한 살롬은 하나님과 함께 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에 여러분에게도 이 살롬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샬롬은 성경 원어적으로 “성장과 번영”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기드온이 볼 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찾으셨기에,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여호와께서 우리 삶의 현장에 개입하시고,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몰아내실 것이기에, 비극 끝, 불행 끝, 원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오늘로서 끝이고, 이제부터는 한 개인과 사회의 성장과 번영만 있을 것’이라고 믿고서 “여호와 살롬”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평안을 앗아가는 것을 다 제거하시고, 당신이 친히 함께 하시면서 여러분을 복되게 하고 성장하고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것을 믿고 하나님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드온처럼 여호와가 살롬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즉 하나님은 이제부터 여러분을 성장과 더 나은 축복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것이 살롬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평안이 넘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평안하십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삶의 환경이 평안이 없고,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평안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평강이 없는 이스라엘과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가심으로 그들에게 살롬이 시작되었듯이 오늘 여러분들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진정한 만족과 평안, 즉 살롬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기 시작하고서 100일간의 일기인 「막쪄낸 찐빵」과, 그 이후 100일간의 일기인「세상속의 찐빵」의 저자인 이만재씨는 그 책들에서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는 10대 초반에 6.25 전쟁을 홀로 겪었으며, 세상살이의 험난한 파도에 시달리면서 오직 살기위해, 배우기 위해, 또 서울 시내에 자기 이름으로 된 불 하나 밝히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전쟁터 한 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군인처럼, 야생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47세에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디딘 날, 그가 받은 첫 느낌은 “평온, 마음의 평안”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포근한 침대에 눕혀져 있는 어린아이가 아닌가!” 10대에 집을 떠나 전전긍긍하던 그가 30여년이 훨씬 지나서야 비로소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안에서 느낄 수 있는 평안을 맛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당신의 이름은 ‘평안’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하나님도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삶의 안팎에 있던 모든 갈등과 싸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고 동행하는 가운데 영적이고 신령한 tif롬이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안팎이 성장하고 번창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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